우상의 도시에 복음을 심다 (행17:16-3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 전파의 패턴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어떤 상황이 발생하고,
②그 상황에 “불신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③그 의문에 대하여, “사도들이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사도]가 답변하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자신]이 하는 것 같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앞서 행하십니다.
오늘 말씀에도, [바울]은 베뢰아 지역을 떠나, 아테네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동료들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아테네 도시를 둘러보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아테네]는 그리스 헬라 문명의 발상지로 철학, 문학, 예술, 모든 분야의 중심지이고,
유명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자 활동 무대입니다.
도시를 둘러본 [바울]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합니다.
[바울]의 눈에는 우상이 가득한 “저주의 도시”로 보였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상]을 예술로 미화한 것으로, 많은 [신상과 신전]들이 멋지게 포장되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가평에 [통일교 건물]을 보면, 화려하고 멋진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그 화려한 건물에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길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우상과 신전]은 타락한 인류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테네에 있는 많은 신전들은 제우스와 아폴로를 앞 세워,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바울]은 그 도시를 바라보며, 격분했는데, ▶왜, 격분했을까요?
이와 같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우상을 보면서,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면서, 슬퍼한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더 많은 전도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므로, [아고라]로 갑니다.
거기는 사람들의 중심을 이루고, 정치 집회와 연극 공연을 하고, 흔히 “민주주의의 출생지”라고 불리는 장소입니다.
[바울]이 [아고라]에서 당시의 철학자들을 만나,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던 장소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말쟁이”라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쟁이]라는 단어는 “씨를 쪼아 먹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표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들어보는 “십자가와 부활, 복음의 신선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9- 20절에, “그때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갔습니다.
당신이 소개하고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에게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행17:19-20)
바울이 전한 “새로운 가르침”,
이것이 [복음]이고, “복음의 소식에 새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철학자들은 “새로운 사상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은 “이것을 따져보고,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열매이지만, 그러나 매우 소수였고, 바울이 방문한 도시에선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빌립보]에는 지하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에선 거짓된 고소로 불량배들을 사주해서 소동을 일어나서,
누명을 씌워져서, [바울]은 재빠르게 아테네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지만, 열매는 별로 없고, “실패한 선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전도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이에요.
[전도를 안 해본 사람]들이 언제나 전도하는 사람을 폄하하고, “열매 없다.”고 말하죠.
더군다나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의 결신자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서 복음 전파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복음 증거]는 언제나 “한 영혼”을 놓고 하는 거예요.
[선교지]에서 선교사님이 10년 이상 있어도, “한 명의 회신자도 얻지 못한 선교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선교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분들이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이 그다음 세대를 이어가서, 사람들에게 통해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겁니다.
[복음 전파]는 단 한 번에, “수만 명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우상의 도시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17장 22- 23절에, “그러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행17:22-23)
여기에서 사람들과 [접촉점]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1)첫째로/ 아테네 사람들을 “여러분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고,
“마음속에 있는 경계심을 풀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속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심하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고, “여러분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긍정적인 언어]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문을 열어준 셈이죠.
여러분 [타종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마음을 여는 것이 지혜”입니다.
(2)두 번째로/ [바울]이 발견한 것은 아테네에 많은 신전을 보면서,
무수한 신들이 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화려한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이 신, 저 신, 다 만들다가, 혹시 “그 신이 진노할까” 만든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특별한 접촉점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①“내가 안다.”는 것이고,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신]을 ②”내가 알려 주겠다.“는 마음으로,
[바울]은 사람들과의 접촉점으로, ”이렇게 대화를 풀어가자.“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본론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오늘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전파했습니다.
아니 진화론이 거의 전부인 이 세상 속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역설했습니다.
25절에, ”하나님은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행17:2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봉사할 때, ”하나님을 도와드린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 일을 스스로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동력이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신]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이방신]에게 많은 것을 갖다 바쳐야 하고,
제단에 예물을 드려야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이론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는데,
①일부는 비웃었고, ②일부는 더 알고 싶었고, ③일부는 믿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에 대해서 반응도, 이렇게 세 부류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아테네와 같은 많은 우상들과 신전들이 존재합니다.
①보이는 신전과 신상은 일부 만 있고,
②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교묘한 형태의 우상과 신전이 존재하죠.
그것은 돈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정욕과 부도덕의 우상, 정치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
그 밖에 우상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바라보며 품었던 거룩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혜로운 변론으로 바꾸어 증거를 했듯이, [그 열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담대한 증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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