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빛, 복음의 길을 비추다 (행17:1-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제가 사랑하는 말씀이 시편 119편 105절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
여기서 ”내 발의 등불이라“고 함은 [내 발 위에 등불]이 있으므로,
”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위를 비춰주는 등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등불]은 멀리 비추지는 못하지만,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위험이 없는지,
내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내 발걸음을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①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매 순간에,
말씀을 기준으로 [등불]과 같이,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②둘째로/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한 것은 멀리 비추어 주는 빛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장기적인 비전과 나의 꿈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그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서, ”먼 미래의 꿈“을 심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바로 앞에 있는 발걸음도 비추어 주시지만,
우리의 먼 미래까지도 비추어주시는 ”그런 빛의 역할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서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환상을 통해,
①첫 번째로 만난 [루디아]라는 여인, ②귀신들린 어린 소녀, ③감옥에 있었던 한 간수,
④그리고 그 주변에 있었던 가족들이 구원받은 것은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성령]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면,
밝은 빛이 그에게 비추었기 때문에, 그가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과 실라]가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고, 빛이 어둠에 비치되 그 어둠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어둠에 더 깊이 들어가는 그러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이제 빌립보를 떠나, 큰 항구 도시로 이동하게 됩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이 통치하려고 그 지역에 도로를 닦았는데,
지금도 가보면 마차 두 대가 쌍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견고한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바울]은 늘 하던 대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과 함께, ”성경에 대하여 토론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유대 사람들에게서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왜, 시기했을까요? ①자신들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에 대한 시기이지만,
②또 믿게 된 귀부인들의 남편들의 불편함일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화재를 일으켰다.”고 뒤집어씌우듯이,
도시에 불량배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과 실라]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로 잡히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야손의 집]에 숨기고,
밤에 [베뢰아]라는 도시로 이동하게 됩니다.
11절의 말씀에,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행17: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비해, 매우 긍정적인 모습이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되, “다른 도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받아드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빛]이 “그들의 삶에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1)첫째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꿀 송이보다도 더 달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간절함”이 우리에 있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속에, 인류 역사상 한 민족을 택하여 세상의 구원자를 주셨고,
역사를 주관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셨다.“는 말씀을 전해 주었을 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그 말씀의 빛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2)둘째로/ 그들은 [들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지?”를 스스로 검증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계시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질문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막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뻐하십니다.
2- 3절에, ”바울은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3주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에 대해 사람들과 토론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후,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전했습니다.“(행17:2-3)
여기에 보면, [바울]은 ”①토론하고, ②설명하고, ③증명하고, ④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①토론하고, ②설명하고, ③증명하고, ④선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①우리가 믿으려고 하고,
②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러한 설명과 증명은 “하나님이 충분히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3)셋째로/ [말씀이 진리]라고 한다면, “모든 영역에서 진리”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면한 이 현대에서 가장 큰 위기는 진리를 갈라버린 것입니다.
[프란시 헤포]라는 기독교 철학자는 [사실]과 [가치]의 세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사실](= 팩트)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고, 과학과 이성으로 검증된 것만 사실이고,
그러나 [가치]의 영역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선택하는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가치의 영역“에 넣어버린 거예요.
[성경]은 ”예배당 안에서만 개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뿐이지,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될 사실은 아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버린 거예요.
[성경]은 “하나의 가치 있는 종교의 영역일 뿐이다.”라고 선을 그어버린 겁니다.
이것이 무서운 구분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그룹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모든 인간에 대하여 모든 사회에 대하여 구속력인 진리를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으로,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공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더욱 심해져서, [창조]는 ”학교에서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실제로 부활하셨느냐?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가 부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성경의 진리]들을 주관적인 비유나, 은유로 만들어 개인 영역에 가둬놓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복음을 우리에 갇힌 사자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지적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선택, 가치의 영역일 뿐, “예배당 안에서만 진리라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진리이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아니다.”는 해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울타리에만 갇힌 종교적 경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말씀]은 역사적으로 소멸해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적용하며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고,
시편 119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라.”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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