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믿음의 절정을 이루는 교회 (창22:1~19) 2023.10.08

다이나마이트2 2023. 10. 8. 14:47

믿음의 절정을 이루는 교회 (창22:1~1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교회 38주년 창립기념 주일이고, 또한 추수감사 주일인데,
창세기 22장의 말씀을 통해, 성경에서 가장 극적이며 중요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25년 만에, 독자 [이삭]을 낳았는데,
그 [이삭]이 잘 자라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 명령은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려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절정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명령입니다. 
 
▶[믿음의 절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고, 언제나 시험을 통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시험을 받지 않은 믿음은 [관념]일 뿐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시험을 통해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①경제적 어려움, ②육체의 질병, ③또 자녀와의 문제, ④때로는 부부의 문제로,
다양한 시험들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믿음]으로 통과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험 중에서도, [믿음의 절정]을 이루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 [시험]은 이전에 경험한 시험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전혀 다른 영역으로 이끌어 올리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여러 시험을 받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시험을 당했습니까“
①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드림으로 ”대를 이으리라“고 생각하였고,
②하녀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출생하였고,
③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믿음의 시험이고, 불신앙이었습니다.
④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주시겠다.”고 할 때,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부침]을 경험하고, 때로 실패를 경험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시 세워주시고, 또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믿음이 굳게 다져져 왔습니다. 
 
드디어 [이삭]이 출생했을 때, 그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쁨의 웃음”입니다.
 
[이삭]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다.”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 [명령]은 이전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과 차원이 다른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만큼의 그런 충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을 세워 가실 때, “[믿음의 절정]에 이르는 시험”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절정]을 이루는 시험”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명령]은 ①아브라함에게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②하나님께 대한 순종,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잔혹해 보이는 시험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만일에 내버려두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수 있는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절정]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전혀 없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온누리교회를 세우시고, 38년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시험]을 계속해서 잘 통과하였고,
[믿음의 절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이 자라고 있을 때, 큰 [시험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2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창22:2)
 
여기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약속과 ”서로 충돌되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해서 주신 그 약속,
“하늘의 별과 같은 큰 민족으로, 많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말씀과는 상반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녀를 주셨는데, 이제 그 자녀를 받치라니요“? 
그 [명령]은 그동안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과 ”서로 모순되는 말씀“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아브라함]은 ①약속을 믿는 것과 ②약속하신 분을 믿는 것을 서로 구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하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하신 그분]을 믿는다면, 약속하신 분이 현재 주신 명령이 과거에 주신 약속과 충돌이 되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1) 첫 번째로/ [믿음의 증거]는 5절에, “그가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를 데리고 여기 있으라.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 너희에게 함께 돌아오겠다.”(창 22:05)
 
여기서,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씀,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종들이 함께 ”하나님이 정하신 모리아 산으로 떠나는데, 목적지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종들을 “그곳에 기다리라.”고 하고, 이삭과 둘이서 산에 오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다면, [이삭]은 돌아올 수 없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함께 돌아오겠다.”고 종들에게 말하고,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스토리]를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고백”입니다.
 
(2) 두 번째로/ [믿음의 증거]는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나타납니다. 
 
7-8절에, “불과 나무는 여기에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이삭이 아버지에게 질문하니까,
아브라함이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아브라함의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 장면인데, 만일 [스토리]를 영화로 만든다면,
아브라함이 그런 충격 속에서, 당황하는 그 표정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묘사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삭이 제물”인데,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찢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겉으로는 담대하고, 의연하고,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믿음의 절정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의 충돌은 그 약속을 무너뜨리는 것인데,
“왜, 이런 명령을 주실 것인가?”를 틀림없이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생각을 뛰어넘고, 그 생각을 해결하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놀랍게도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의 말씀에,
“성령께서 그 믿음의 이유”를 해설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사람이면서도 자기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고 불릴 사람은 이삭으로 말미암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하자면, 그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돌려받은 것입니다. (히 17:19)
 
여기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도 ”그런 생각을 했고, 또 그것을 믿었다.“는 것은 결국에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므로, 
그렇다면 [이삭]은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삭]은 죽을 것이고,
그러면 ”죽은 [이삭]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디렘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에서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지금 나에게 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니,
하나님은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이 중지시키셨습니다. 
12절에,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창22:12)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합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서 숨는 것처럼, 
하나님을 무서워하면 피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게 됩니다.
 
이 시험으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을 통하여, 번제가 진행되었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또한 성취된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양을 잡아, 자기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창22:13)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여줍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정에 이른 것은 준비하신 어린 양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명령도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 순간에/ [아브라함]이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이레]라는 것은 ”이르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  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절정]에 이른 성도의 고백은 ”언제나 여호와 이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시고, 준비하고 계시고, 일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만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원리]와 [복음의 진리]와 [십자가의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양을 통해, 우리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삭]은 희생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는 희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이삭은 죽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 때문에 이삭이 살아났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하여 헌금하고 봉사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제물을 준비하신 그 예수님,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거기에서 교회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죠. 
 
▶[믿음의 절정]이란 무엇입니까?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믿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대신한 어린 양으로 이삭이 다시 살았듯이, 우리를 대신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다시 살았음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 외에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절정에 이르는 것”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온전히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이런 믿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