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행의 시작 (창3:1-13) 말씀: 이재훈 목사님
복음을 거부하는 분들 중에서 이런 질문으로 반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면, “왜, [악]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진짜 악의 기원에 대하여 궁금해서가 아니라,
실상은 자신에 있는 악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고 싶은 겁니다.
[성경]은 만물의 기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악]의 기원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임을 증거하고, [악]의 기원은 인간의 의도적인 반역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처럼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속에 창조된 인간과 천사의 반역에 의하여,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3장]의 말씀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악]은 [선]에 대한 반역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반란으로 생긴 것이 [악]이기에, [악]은 “그 근원이 선에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선]에 기생하는 것입니다.
[악]은 기생충과 같이, 어딘가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악]은 놀랍게도 [선]에 붙어서 기생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세상에 [악]을 저지른 사람을 보면,
얼굴에 “나, 악인이오.”라고 써 붙여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 악한 사람일수록, 선한 모습으로 [위장]을 하지요.
[악인]이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려면, 먼저 그 사람에게서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먼저 [신뢰]가 있어야 그 사람에게 범죄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먼저 그 사람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속이려면, 어떻게 [위장]을 합니까?
①성실한 모습으로, ②믿을 만한 모습으로, ③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려고 하니까,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그 이면에는 “[악]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면서 [자기 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착한 일을 하면서도 “악한 의도가 꿈틀거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인간의 본질(인간 안에 있는 악한 모습)을 우리는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2장의 말씀을 통해, 인류의 첫 조상들이 누렸던, 행복과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는 힘이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절정]에 있는 인간이 이제 [저주에 중심]에 서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은 모든 “불행의 시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불행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반역에 영향을 미친 [사단]이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서 [사단]이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의 사단에 관한 언급이 없으므로, 언제 생겨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단]은 “타락한 천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렇다고 전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직이 천사였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그 역할을 통해서 선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가 있는 거죠.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단지 [뱀]으로 나올 뿐입니다. 지금의 [뱀]은 끔찍하지만,
그러나 탈락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완전한 조화가 이루었을 때, 뱀은 인간과 친숙한 관계였기에, 뱀을 이용했을 겁니다.
[사단]이 뱀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단]은 늘 이렇게 변장하고 활동하고, 자신을 늘 숨깁니다.
그것은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뱀] 뒤에 숨어서, 거짓을 행한 것처럼, 늘 숨어서 거짓으로 공격합니다.
그리고 늘 같은 편인 것처럼 위장하여 공격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내가 너에게 악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우리들의 삶은 ”사단과의 영적 전쟁의 삶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여 쓰러뜨린 전략으로,
”오늘, 우리들도 공격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세 가지 [공격의 원리]가 나옵니다.
①첫째는, 의심입니다.
여자에게 ”정말 하나님께서 동산에 어떤 나무 열매도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느냐?“
개정 번역에는 [참으로]라는 단어를 썼는데,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단의 말은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또 ”어떤 나무 열매도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어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되지만, ”한 가지의 나무 열매만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이라는 단어로 의심을 불어넣을 때, 이 여자는 혼동을 하게 됩니다.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죠.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말을 했고,
“그러나 만지거나 건드리지도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여자가 먼저 뱀과 대화하며 그 과실을 따먹을 때, [아담]은 바로 곁에 있었기에,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어요.
이런 의심이 들어올 때, 말씀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을 때, 우리는 혼동하게 되고,
결국 말씀을 부인하는 영적 세력을 거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창세기 3장 4- 5절을 보면, 사단이 부인을 하는데,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려서 [선]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먼저 부인하고, 거짓말로 불순종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결국 따먹게 됩니다.
이 과정의 출발은 [의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심]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의지적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의심을 “지성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입니다.
사단의 꾐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의지“에 전염이 된 거예요.
여러분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 편에 서는 선한 의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라“는 말씀이 뭡니까?
[지성]은 한 영역일 뿐, [믿음]에는 ”다 알아야 믿는 것“과 같지만, 믿고자 할 때에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려는 의지로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정보를 줘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의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결국 불순종의 의지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불순종의 뿌리가 꺾이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이 아니고는, 불순종의 의지가 꺾이지 않습니다.
(2) 두 번째로/ [사단]이 최초의 인간들을 넘어뜨린 것은 [욕망]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유심히 관찰해서, ”어떤 욕구가 가장 강한가?“를 관찰하고,
그 욕구에 집중하게 합니다. [선한 욕구]를 [악한 욕망]으로 바꾸는 겁니다.
오늘 6절을 보면,
”여자가 보니, 그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창3:6)
이 말씀을 보면, 배고파서 먹은 게 아닙니다.
[타락]은 ”배고픔의 욕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부름의 욕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의 욕구]입니다.
이것은 ”배고픔의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인간에게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지혜의 욕구]인 것입니다.
[교만]이 ”만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배고파서 짓는 죄가 있고, 배불러서 짓는 죄가 있어요.
▶어느 것이 더 중한 [죄]일까요? 배고파서 먹을 것이 없어서 ”빵을 훔쳐 먹었다.“는
죄와 먹을 것이 풍족한데 짓는 죄, 이것은 다른 차원이지요.
(3) 세 번째로/ [사단]은 분열을 시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모든 환경 속에서 평화를 누렸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심을 받아들이고, 불순종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피하고, 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였을 때,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아의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볼 때,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라는 그런 친밀감으로 고백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왜 먹었느냐.?“라고 아담에게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게 되었다.“고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기서 [타락의 순서]를 보면, ①[뱀]이 먼저 타락했고, ②그다음에 [여자], ③그다음에 [남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임을 추궁하시는 순서를 보면, 누구를 먼저 추궁하십니까?
①먼저 [뱀]이고, ②두 번째로 [아담]에게 책임을 묻죠. ③그다음에, [여자]이고,
④그다음에, 다음 주에 살펴볼 [뱀]에게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왜, 이렇게 했느냐?“라고, 그런 말씀을 안 하세요. 그냥 저주만 하세요.
▶왜냐하면, 회복에 길을 주시지 않은 거예요.
[사단]은 그냥 ”지옥에 갈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회복을 하시기에, ”왜, 그렇게 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책임을 추궁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순서]로 보면, ①뱀, ②여자, ③남자의 순서이지만,
하나님이 질문하시는 순서는 ①남자, ②여자, ③[뱀]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반역]입니다.
[화초]를 심으면 화초만 자라지 않고, [잡초]가 항상 옆에 나게 돼 있어요.
[알곡]을 심으면 알곡만 자라주고, 항상 [가라지]가 옆에 붙어서 서게 됐어요.
[인간]은 늘 이런 자연의 역습, 자연의 반역 속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모든 관계의 축복이 다 분열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분열“이 되었어요.
우리 모두는 ”다 분열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선택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악]이 들어왔고,
하나님 만드신 동산에 완전한 조화가 깨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행의 시작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의 동산]이 [저주의 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악]에서부터 건짐을 받는 일,
그리고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고, 그 원죄의 영향력으로부터 구원받고,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의심]이 [믿음]으로 변하고,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선한 뜻에 쓰임을 받고,
그리고 모든 분열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나님 안에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의 시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행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려면,
오늘 말씀인 [창세기 3장]에 나타난 “[불행]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이 어떤 [신화]나 [우화]처럼 보입니까?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적용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선한 하나님의 창조를 “반역한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직시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날에, 더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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