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설계도 (창2:18~25) 말씀: 이재훈 목사님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인간]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진리]이고, 이와 같이 남자와 여자로, [양성]의 창조 질서는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염색체”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흐름이 언제부터인가 [양성의 질서]를 깨뜨리고,
제3의 염색체]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왜곡된 느낌을 주장하며, 새로운 질서로 세우려는 흐름이 나타나서,
유럽과 북미 대륙을 중심으로 이런 흐름이, 마치 올바른 질서인 것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매우 위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준]을 바꿈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성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진리 수호의 길”인 것입니다.
최근에, 국회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이라는 것은 영성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미 우리나라에 20여 개가 넘는 법으로 충분히 보완하면 될 일을, [평등법] 혹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을 만들려고 하는 핵심은 바로 양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법이 제정된 유럽과 미국사회에 나타나는 문제를 보면,
우리가 살아가기 어려운 힘든 사회의 모습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것은 우리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외교적으로 강력한 [한미 동맹]을 구축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국에 대하여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완전한 조화로 존재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다움을 통해, 여자는 여자다움을 통해, 인간다움을 만들어 가시고,
또 [양성]을 통해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신 [창조 질서]를 이루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는데, 18절에서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인간을 잘못 지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18절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맞는 [돕는 사람]을 만들어주겠다.
이것은 누군가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성]입니다.
몇 년 전에, 영국 적십자사의 조사에 의하면, 6천 5백만 명 중에 ”9백만 명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담당할 [장관]까지 임명을 했는데, 거기서 ”가장 친한 동반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영국 사람의 삼백육십만 명이 ”텔레비전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본 남성 중, 네 명 중 한 사람은 혼자 살고 있어서, ”이제 일본은 [단신 사회]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이제 한국에도 마찬가지인데, 혼자 사는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거주 형태에서 “혼자 산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이제 누구와도 관계없이 “홀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행복]은 “진실한 관계 속에서 얻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틴 부버]라는 분이 “나와 너”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핵심은 “나를 알려면,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성 대명사], [이트]라고 불리는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환경도 모두 [이트]이고, 건물도, 자동차도, 모든 것은 다 [이트]에요.
여기에 [중성 대명사]가 “[너]라는 인격적 존재가 누군가에게 있어야,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코 패스]에 빠진 사람들이 “너라는 존재가 없기에, 자기를 보지 못하기에”, 이상한 상태에 빠져버리는 거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이러한 [너]라고 불리 우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에게 ”맞는 사람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생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들과 공중의 온갖 새들을 다 빚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데려오셔서 그가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보셨습니다.
아담이 각 생물들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름을 짓는 일“을 하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는/ 이 [통치권]을 연습하고, ”행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최초의 과학자인데, 어떤 현상을 발견하고, 현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현상과 현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결하는 것이 과학인데, 이런 과학적인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기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피로를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에게 맞는 돕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각종 동물들이 짝을 지어, 자기 앞에 지나갈 때마다 모두 제 짝이 있다는 것을 보았을 것인데,
그러나 ”자신에게는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격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반려동물을 자신의 배우자처럼 착각해서,
그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한 분을 봤어요.
그저 동물은 동물일 뿐이에요. 돌봐주어서 기쁨을 주고, 때로는 웃음을 주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영혼의 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심각한 인간됨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 맞는 [돕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부르고,
히브리어는 [에젤]이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에젤]이라는 단어를 ”돕는 자, 돕는 배필이라“고 할 때, 여성을 잘못 오해하는 단어로 해석되면, 안 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부속적이고, 남자를 돕는 존재 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왜, 여자가 남자에게 결정적인 존재입니까?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은 아담 홀로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죠.
또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이 기쁨과 만족은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21절의 말씀이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의 주석이 ”왜,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통해서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가장 정확하며,
또 전통적인 모든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여자를 아담의 옆구리에서 취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은 ”남자를 지배하라“고 머리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자에게 짓밟히라“고 남자의 발로 지어진 것도 아니고, 남자와 동등하며, 남자의 품 안에 보호받으며,
그 심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으라”고 옆구리로 지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최초의 결혼”이 가정의 탄생입니다. [결혼]은 또 가정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개입하신 사건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배우자를 나에게 데려오시는 사건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23절에, “아담이 말했습니다. 드디어 내 뼈 가운데 뼈요, 내 살 가운데 살이 나타났구나.
이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으니, 여자라 불릴 때, 내 뼈 가운데 뼈요, 내 살 가운데 살이라”는 이 표현,
이것이 하나님의 “[가정의 설계도]의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이 [히브리식 표현]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배우자가 나에게 어떤 기능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고, [아내]는 살림을 해 주고, 나에게 어떤 애정을 만족시켜 주고,
나에게 어떤 역할과 기능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와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능을 해주지 못할지라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지라도,
”그 존재 자체가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리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뭡니까? 사랑하면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살아가다 보면, [나 자신]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나를 알아가는 겁니다.
[루터]는 “이러한 [복]을 ”새벽이슬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 그 새벽이슬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인데, 그것을 포기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빠진 [저 출산의 위기]가 창조 질서의 위기요, 그리스도인들 가정의 위기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또한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설계하심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일이고,
내가 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헌신함으로, 그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24절- 25절에서,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02-24-25)
①첫째는, [떠남]이죠.
그것은 ”부모와 결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인 가장 우선적인 ”충성의 대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사람보다 더 가까운 이가 없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모]는 둘 사이에 개입해선 안 되며,
또한 이 두 사람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②둘째는, [연합]입니다.
말로만 하는 [연합]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연합입니다.
③셋째는, [친밀함]입니다.
여기서 [친밀함]이라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악이 들어왔을 때, 분열이 일어나는 것, 자신을 감추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혼의 거울처럼 투명하게 조금 더 가릴 것이 없는 숨길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하나 됨을 경험한 친밀함이죠.
가족 간의 [사랑의 표현]이 아직도 부끄러워하면, 그것은 익숙하지만 친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익숙하지 않을 수 있어요. 몇 십 년을 오래 살아도 서로의 습관에 익숙하지가 않을 수 있어 낯설 수 있어요.
그렇지만 친밀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족과 분열이 있는 경우에는 부끄러움이 그 가정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저 출산]의 위기를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족의 설계도]에 따라,
또 각자 다른 가정을 낳음으로, 연합과 친밀함의 축복을 나누며,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게 하소서.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 가정이 온전히 회복되며, 가정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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