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길 진리 생명[2] (요14:1-6) 2023.01.08

다이나마이트2 2023. 1. 8. 21:26
길 진리 생명[2] (요14: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인간의 삶]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정답은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잘못된 관계”에 있거나,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인해,
가정과 사회생활에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런 통계가 없지만, 미국의 통계를 인용하면, 
“2천만 명이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현상을 미국에서는 “Fatherless Epidemic](아버지 없는 전염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청소년 시기에 아버지가 감옥에 갔거나, 약물 중독이거나, 자신이 학교에서 중퇴하거나,
가출한 어린이니까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통계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들은 [무신론자]들이거나, “하나님이 없다”는 문화에서 살고 있어서,
실제로는 아버지가 진짜로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아버지가 있지만, 
①“잘못된 아버지”이거나, ②“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신의 아버지]들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의 “아버지의 문제”라고 일축하지만, 그렇다고 늘 [조상 탓]만 할 수는 없지요.
실제로 그들은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입양된 사람]에게 물어보면, “늘 친부모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부모를 찾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육신의 아버지]도 있지만, 인간을 만드신 [아버지]도 계십니다.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용어도 쓰지 않고, [엘로임 여호와]라는 단어도 쓰지 않으셨고, 
 
▶오로지 [아버지]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 이루셨고, 또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셨다가, 아버지의 때에 다시 오실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또 자녀가 되도록 하신 것이고,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자기소개]에 나타난 의미를 집중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 진리, 생명이라”고 소개하신 것을 3부분으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1] 크게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러나 [죄]로 인해서, 불순종에 빠지므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졌고, 진리가 아닌 거짓을 따라 살게 되었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회복시켜 주는 방법으로, 
첫째 방법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 바로 [길]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집 밖에 있다.”는 것이고, 
[아버지 집]이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알려주려고 누가복음 15장에서, 유명한 [3가지 비유]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으므로, “인간은 아버지와의 단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①첫 번째 비유는/ 100마리의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에 잃어버리고, 그 한 마리를 찾아서 기뻐했다”는 비유입니다.
 
②두 번째 비유는/ “동전을 찾는 비유“입니다.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기뻐했다.”는 것이고, 
 
③세 번째 비유는/ “집나간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쁨으로 맞이하고, “잔치를 벌렸다.”는 비유인데, 
 
이 세 가지 [비유]에서 공통점이 3가지가 있습니다.
(가) 첫째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①목자에게는 한 마리의 양이 소중했고, ②여인에게는 한 드라크마가 소중했고, 
③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소중했는데, 여기서 [공통점]은 ”소중한 존재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나) 둘째로/ 잃어버려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찾는다.”는 것입니다. 
 
①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어떻게 찾았습니까? 
그것은 “99마리를 남겨 두고,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②여인도 한 드라크마를 찾도록 ”끝까지 찾았다.”는 것이고,
③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다) 셋째로/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함께 기뻐했다.”는 겁니다. 
 
목자와 여인 그리고 아버지의 공통점은 “그 기쁨을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먼저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돌아왔기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아버지의 집 밖에 있는 잃어버려진 우리들을 찾아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회개가 가능하도록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돌이키고 돌아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일이 아닙니다.
 
내가 [회개]를 했다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기에, ”내 안에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회개]는 예수님을 통하여, ”나에게 찾아오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2] 크게 두 번째로/ 인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남으로써 [진리]를 잃어버렸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진리]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옳고 그름을 착각하고, [진리]를 떠나, [거짓]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 뜻을 망각하고,
[진리]를 떠나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될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진리의 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차원이 아니고,
”진리이신 그분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3] 세 번째로/ 인류는 [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생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왜, 과실을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버지와 단절된 상태에서, 진리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계속 먹으면, 단절된 상태로 지내게 되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게 하심으로” 오히려 은혜를 베푸신 것이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생명]을 두 가지 단어로 사용하는데, 
①하나는 [영적인 생명]으로,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하고,
②또 다른 것은 [자연적인 생명]으로, 자연을 의지해야 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놀랍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지만, 자연 질서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생명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뛰어 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어떤 [길]을 제시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곧 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생명]에 대해서도  ”그분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길]을 모르고, [진리]도 알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중간 위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배타적이다.“라고 평가하지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분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이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므로,
이것은 사실이고, [교회]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았어도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방황하고 있나요?
우리는 거짓에 속고 있기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인 생명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에, 방황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올 한 해에도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실히 믿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