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새벽기도[4] 어떻게 다시 볼 수 있는가? (요9:1-11)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부천 온누리교회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에 오니까 “처음에 부천에 교회를 세우려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의 [밀워키]에 가보면, “엠브룩 처치”가 있는데, 그 교회가 동서남북으로 갈라져서 “이스트 부룩 사우스”라고 부르고, “웨스트 부룩 노스 ”라고 부르며, 4개의 교회가 함께 나누어져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교회가 독립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또 한 가족으로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고, 하용조 목사님과 함께,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가 마침 서빙고 예배당에 ”한 해에 오천 명이 몰려 와서 교회의 공간이 포화 상태이고, 더 이상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고민을 하던 때에, 부천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의 문제”를 상의하러 왔다가, “서로의 비전을 나누면서 그 비전이 같음”에 공감하고, [부천 온누리교회]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그 어려운 교회“가 점점 회복되고, 그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꿈]을 실현 시키는 귀한 교회로 변화되기 까지,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요즘에,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신하는 40일“을 보내고 있고,
”이 [길]이 우리의 인생에서 유일한 길이 되심“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왜 진리인지?“를 다시 깨닫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고, 의학의 힘으로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소경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난] 앞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고난에서 사람들은 “그 장애가 나의 잘못이 아니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기에” 더욱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에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라고 원인을 찾고 싶어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주시는 의미”를 다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고난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만, 찾을 수 없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도 ”나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될 때, 놀랍게도 “고난을 이기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랍비여,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이 사람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요 09:02)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공통점]은 “과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되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를 생각하며,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고”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가 잘못해서, 그 결과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①내가 선택을 잘못했다든지, ②욕심을 부렸다든지, ③게을러서, ④아니면, 거짓을 행했다든지, “그 어떤 이유로 그런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의 잘못이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날 때부터 이런 고난이 있다면“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인데, 제자들은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보면, “이 제자들은 불교의 [윤회설]을 믿는 사람”과 같아요.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이전에 생이 있었다.”고 믿고, 순환론적인 세계관으로 보는 사람으로, “전생이 있다”고 생각하며, 과거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소위 [Karma(카르마)]라고 “윤회사상”의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모를 탓하며, 조상 탓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3절의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 (09:03)
예수님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고난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고, 미래에서 찾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들이 있다.”는 겁니다.
많은 고난에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를 통과하면 더 좋은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래에서 원인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서 원인을 찾으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하는 일들을 드러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①그 고난을 믿음으로 대하고, ②예수님 안에서 그 고난을 통과하면서
③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체험하게 되므로, ④그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미래에서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고통이 따릅니다.
▶어떤 고통입니까“ 그것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한 생명을 품고 잉태하는데, [해산의 고통]이 따르는데,
①그 고통을 과거에서 찾는 사람은 ”내가 왜 결혼을 해서, 내가 왜 저 사람을 만나서“라고 탓을 하지만,
②미래에서 찾는 사람은 ”태어날 생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라보며, 그 고통을 이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는 낮 동안에 나를 보내시는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요 09:04)
3절과 4절의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어찌 좀 어색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영국의 [캠벨 몰간]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의 죄도 이 사람의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그 안에서 나타나려면, ”우리는 낮 동안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은 [카르마 사상](업보사상)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카리스마](하나님의 선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알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방법이 좀 방법이 이상합니다.
아니, 눈을 고쳐주시려면, 깨끗한 물로 씻어야 하는데, “오히려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눈을 더 악화시키는 거 아닌가요?
이것을 “치료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십자가]의 입장으로 보면, “십자가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서 “나를 살게 해 달라”고 하는데, “당신은 죽어라.”고 말을 하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메시지]는 “당신이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상태가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이고, 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①“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은 [부활의 생명]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②”내가 왜, 그렇게 따라야 하나?“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눠지는데,
①한 부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실행한 사람은 ”그때부터 눈을 뜨게“ 되었고,
②또 다른 부류는, ”자기는 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 되었어요.
①눈 먼 사람은 ”진흙으로 이겨,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은 눈을 뜨게 되었고,
②눈을 뜨고 보던 사람인 [바리새인]들은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①”하나님, 저는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보게 되고,
②그러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본다“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인생“이 되었어요.
그래서 9장 39절-41절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와 함께 있던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09-39-41)
그러니까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간증하는 사람은 실제로 고난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온몸이 멀쩡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우리의 몸이 상한 채로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여러분들 중에,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먼저 데려가셨다면, 그 고난의 원인은 과거에 내가 무슨 죄를 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으로 해석하십시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를 더 뚜렷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고난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까?
①하나님은 우리의 생명도 선물로 주셨고, ②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자연도 선물이고,
③우리가 함께 하는 가족과 자녀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내가 속한 귀한 공동체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승리의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유일한 길이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과거에서 원인을 찾지 말고, [미래]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주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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