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새벽기도[8일차] 은혜와 진리 (요1: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지난 주간은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다.”는 말씀을 드렸고,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진리.”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도전”에 처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진리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의 도전”입니다.
그렇다고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 유일한 진리를 부정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진리]를 “①공적인 영역과 ②사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진리]를 두 가지로 분리 하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고, 대통령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인데,
최근에는 모든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변한 원인은 [공적 영역]에서, ”소위 퍼블릭 월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교회와 성경과 기도는 [개인적인 가치]이므로, 문화의 수준에서 그렇게 분리시켰습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다.“는 말은 안 하지만, [진리]에는 ”공적인 진리가 있고, 사적인 진리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①[사적인 진리]는 ”개인이 옳다.“고 믿는 것으로,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②[공적인 진리]는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들만 진리”라고 [이분법]으로 구별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 안은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악한 곳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부정되는 결과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그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사립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가르칠 수 있어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운 유아원, 유치원, 어린이집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했는데,
어느 한순간에 학교나 관공서가 공적 영역이기에, 모두 다 금지하게 되었어요.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진리]를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사상]이 세상을 뒤덮고, 또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조차도 그런 사조에 끌려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것은 ”진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진리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서,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했으나, 그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하여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학들의 [심벌]이나, [로고]에 [베리타스](진리)라는 라틴어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의 목표가 [진리]를 찾고, ”진리를 탐구하는 전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거짓 이론]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법과 제도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도전 속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는 존재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면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말은 ”예배당 안에서 당신들끼리 믿는 것은 우리가 뭐라고 하지 않겠다.
다만, 밖에 나와서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쉬쉬하면서 지나갑니다.
이미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못합니다.
제가 목회하던 [뉴저지]의 백화점이나 거리에서 ”해피할러 데이“로 바뀐 지 오래 됐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유일하심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어요.
또 한편으로, 인간의 성은 과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남자와 여자,
[양성]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질서가 있는데, 이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인간의 염색체“에는 [XX]염색체와 [XY]염색체,
두 개 이외에는 다른 염색체가 없는 것이 [진리]인데, ”또 다른 중성이 있다.”고 주장해요.
그런 운동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성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을 [성혁명]이라고 부르고,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뒤집고, 진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그래서 무서운 현상입니다.
[인간의 성]을 자신이 부여된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무서운 발상입니다.
그래서 [성전환]을 자기가 결정하는 [트랜스 젠더]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어, 그래도 우리나라만 저항하고 있는 형편이네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 영광이었습니다.“(요1:14)
16절 17절에도,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요 01-16-17)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또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온누리교회에서 [은혜와 진리]라는 표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은혜 50%, 진리 50%”가 아니라, “은혜 100%, 진리 100%”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하나로 연결된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3위 일체 하나님, 그분의 영적 DNA가 [은혜와 진리]라는 겁니다.
인간의 신체 DNA도 두 개의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은혜와 진리]는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잘못 깨닫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진리가 먼저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은혜가 필요하고,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으면, 은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쓰여 진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쓰여 진 책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진리를 선명하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진리 앞에서 합당하지 않은 나에게 그 진리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이 진리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진리 없이 마음대로 살게 은혜롭게 내버려두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진정한 은혜]는 이 진리에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선명한 진리의 기준이 존재하고, 그 진리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우리를 그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설 수 있는 이 진리의 합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살펴본 대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심으로 그 원인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끌어올려서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 없는 은혜도 문제지만, 은혜 없는 진리도 문제인 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은혜와 진리]를 분리시키고, 또 진리를 [공적 진리]와 [사적 진리]로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죄]로,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를 분리시키고, [진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유일하신 진리 되심을 확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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