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새벽기도[3] 어떻게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요4:1-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어제, 우리는/ [니고데모]라는 한 지식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이고, 율법학자이고, 또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한 종교인입니다.
[니고데모]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으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구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고, 신학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혈통이나, 율법의 준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므로 들어가는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인생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시면서 한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의 삶] 속에 [우리의 삶]이 나타나고, 이 여인의 문제 속에 우리의 문제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주신 말씀에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이 [만남]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구원의 우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나고,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우물가의 여인]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이미 임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성령님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①[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②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③“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의 [갈망]과 [욕구]와 [목마름]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서, 예수님을 스스로 밤에 찾아왔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모르고, 관심조차도 없는 상황인데도, 예수님이 그 여인을 찾아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을 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더 먼 길이지만 돌아서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빠른 길]이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기에,
또한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서” 찾아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소외된 여인까지 찾아가서,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느끼는 것은 [목마름]과 [갈망]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역시 [목마름]이 있지만, 이 [여인의 삶]에도 “목마른 인생”으로, 그것을 해결해 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갈망과 목마름]에는 “그 속에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갈망하고, 영혼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 여인도 다섯 번의 남편이 있었지만 여러 번 실패하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여러 번 바뀔수록, 사람들의 경멸은 더 심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는 소외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정오 시간에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의 말씀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또한 물을 저장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렘02:13)
이 말씀은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목마름과 갈망의 원인은 그 갈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인간은 다른 곳에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었는데, 거기는 ”물을 저장하지 못하는 웅덩이라.”는 지적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갈망의 대상”이 [남편]인데, 그 남편이 “[남의 편]처럼 느껴져서”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해결되지 않는 갈망이 있는데,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꼈던 모든 것인데,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만든 터진 웅덩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마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하니, 여인의 대답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여인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닌 것을 당신은 알지 않습니까?”라는 묵언의 태도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당시에 여러 인종들이 혼혈되어서, “저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그런 인종적인, 문화적인 편견으로, 그런 장벽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장벽을 허물고, 도덕적 장벽을 뛰어넘어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여인의 이런 태도에도, 예수님은 똑같이 대응하지 않고, 온유와 인내로 나아가십니다.
4장 10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부탁했을 것이고,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 04:10)
여기서 “물을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러 오신 분이고, 너에게 생수를 주러 왔다.“고 말을 합니다.
여인은 당황하여, ”아니, 당신은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이렇게 깊은데, 당신이 어찌하여 나에게 생수를 준단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니고데모]가 마치 내가 나이가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모태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다시 나옵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직도 모르기에, 그렇게 대응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라고 표현하고, 그 생수로 그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의 우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물]은 중요한 장소입니다.
특별히 기근과 가난이 있는 곳에 반드시 먼저 해줘야 되는 게 [우물]입니다.
예수님은 13절과 14절에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03-13-14)
▶[야곱의 우물]과 [구원의 우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목마름은 “밖에서 안으로 넣어 주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안에서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구원의 우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샘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영원을 잃어버린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 단절되어 있고, 그분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목마름과 갈급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할 때,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갑자기 당황스러운 요구를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이 예수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매우 불편한 모습이 연출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실 때도, “가장 불편한 단어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내 인생에서 꺼내고 싶지 않고, 지우고 싶은 바로 그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 상처를 주었던 사건이 없다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사건이나,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고, 나 스스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문제 아픈 문제를 예수님은 그것을 끄집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①“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통해서, 치유해 주시는 샘물이 되시고,
②또 “나의 연약한 상처를 씻어주시는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모금 한 모금씩, [육신의 목마름]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는 아픈 문제]를 “솟아나는 샘물로 깨끗이 씻어주는 구원의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여기서 감추지 않고, 살아 온 인생을 예수님 앞에 드러냅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도 맞고, 내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내 남편이 아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구원의 샘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주는 물은 그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가지 목마름과 갈망은 “외부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우물]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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