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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역사 탐방 (2022.10.15)

다이나마이트2 2022. 10. 22. 21:00

2015년 제1차로 호남선교역사 여행(광주, 순천, 여수)를 시작으로,

2016년 제2차 전주, 김제, 군산으로,

2017년 제3차 강화도 선교역사여행,

2018년 제4차 "끝나지 않은 소풍" 부산, 창원편,

2019년 제5차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 적에" 대구 선교여행.

2020년 제6차 정동 선교 역사 탐방에 이어서

2022년 제7차 장로교회의 역사 탐방 새문안 교회 역사 탐방을 다녀왔다.

현재 새문안 예배당의 모습이다. 역사 탐방에 너무 좋은 날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교회 입구에 언더우드 (한국명 : 원두우(元杜尤)) 기념비와 김영주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다. 김영주 목사님은 1950년 6.25 전쟁 당시의 새문안교회 3대 담임목사님으로 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 가셔서 생사를 확인을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노회의 허락을 받아 기념비를 세워 놓으셨다고 한다.

새문안교회의 첫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라고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서울특별시의 도움을 받아서 예배당 바로 옆에

복원을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 같다.

증축 종탑 예배당의 모습. 이 예배당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꾀 많이 계신다.

김응삼 선교사의 대만선교 축하증표 타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나도 35년 전에 군대에서 타자기를 처 본 기억이 있는데

급속도로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젠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 되었다.

교회 창립 85주년 기념 머릿돌과 1919년 3.1 운동 참여교회 간판이 교회 1층 로비에 전시 되어있다.

교회 맨 위층인 13층에 언더우드홀에 이런 배너가 걸려 있다. 도서관과 카페가 13층에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에 의해서 개척이 된 대한민국 장로교회의 장자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보다 더 많은

선교사님을 배출하셨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교회 건물 증축 당시에 발견된 유적지인 모양이다. 4대문 안에 교회증축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발견 될 가능성이 있는데

교회 증축 과정에 이 배수지가 발견이 되어 예배당 내부에 보존을 하고 있다.

새문안교회 서원석 장로님께서 우리 양재 이천선교팀의 탐방을 환영하시고 직접 설명해 주셨다.

역사 책에서만 보았던 소래교회를 세우신 서상륜, 서경조 목사의 손자라고 소개해 주셨다. 깜짝 놀랐다.

새문안교회는 언제나 붉은색 벽돌로 예배당을 건축했었나 보다.

맨 아래가 오래된 벽돌이도 두번째 증축 때 , 그 이후에 증축한 벽돌이 선명하게 들어 나도록 벽면 자체가 역사관이다.

한국선교역사의 위인들의 직계 후손인 서원석 장로님께서 직접 새문안교회의 역사를 소개해 주셨다.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예배당은 예배에 집중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서 공간을 잡았고, 스피커도 빔 프로젝트도 안보이도록 공간 처리를 하셨다고 설명해 주신다. 2,500석 규모의 예배당이고, 100석 규모의 성가대석이고, 파이프 오르간 아래에 공간을 트여서 성가대원이 돌아오는 소리가 아니라 직접 소리를 듣고 찬양하도록 했다고 하신다. 예배당 공간 내부가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이 나도록 잘 디자인 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엘리베이터가 7대가 있고, 경사 이동 통로가 있어서 5분 이내에 2,500명이 유사시에 예배당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고려하셔서 건물을 디자인 했다고 하신다.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예배당 내부에 정말 많은 공간을 배치했다고 강조해서 설명해 주신다. 계단으로도 사용하지만 일부는

분반 공부 같은 공간이나, 친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배치를 하셨다고 한다.

서원석 장로님께서 새문안교회의 이곳 저곳과 역사 박물관을 직접 설명을 해 주셨다. 너무나 감사하다.

예배당 공간 효율면에서 최상인지는 의문이 들 정도로 곳곳에 빈 공간들이 참 많이 있다.

여백의 미인지는 몰라도 여유로운 공간이 참 부럽다.

여러분들은 새문안교회 역사관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 역사관에 들어오셨다기독교 역사관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서론으로 말씀드리면 한국 교회가 한국의 현 근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것을 중점적으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그러니까 교회가 가진 사명은 구원, 우리가 구원받고 하늘나라 가는 그 그 목적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교회가 이 나라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느냐? 하는 그 점을 염두해 두시고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새문안교회 역사관은 1부 새문안이 있기까지부터 10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까지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특히 우리 장로교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새문안교회 역사 박물관에 근대사와 교회사를 잘 비교에 놓은 자료가 여럿 있었다. 다른 어떤 설명보다 조각 조각 부분 부분 알던 역사가 교회사와 연결되는 고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를 해 놓아서 정말 큰 도움이 된다.

~1886년까지 17C에 천주교가 전래 되면서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온 이야기 부터 시작을 한다.

천주교가 전례된 과정입니다. 1784년에 이승훈이 영세받습니다영세 받고 정약용, 정약종 이런 사람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천주교가 시작 되었습니다. 어떻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느냐? 하는 것을 좀 알아야 됩니다.

우리나라는 소위 유교가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유교 학자들이 중국에서 발달한 성리학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성리학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이런 학문들을 활성화시킨게 성리학인데 성리학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우리 학자들이 성리학에 한계를 느낀 겁니다왜 그랬을까요? 불교는 너무 산중으로 들어가 있고, 그 다음에 도교는 너무 은둔하는 그래서 이 동양 종교가 한계를 느끼던 차에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책을 중국에서 펴냅니다천주실의를 보고서 성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이 깜짝 놀랍니다이게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 또 다른 세계가 있네! 그래가지고 시작한 것이 천주교에 대한 접근입니다

그럼 천주교는 어떻게 접근이 되느냐? 천주실의를 볼 때 학문적 접근이었지 신앙적 접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학문적으로 성리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정중하게 해서 어떻게 해결하는지?  죽음 이후의 세계라든지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천주교가 시작이 되는데 천주교의 시작은 뭐예요. 학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천주교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이런 박해가 엄청나게 일어나죠. 박해가 일어나면서 뭐 6,000명 혹은 8,000명, 일만명까지 순교당하는 일이 생기죠. 이 사건은 뭡니까? 서양에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해서 소개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이것이 개신교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영향을 받아서 개신교회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는 데 제일 관심을 많이 가졌던 선교회는 영국의 런던 선교회입니다. 그래서 런던 선교회가 중국의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한국으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1866년에 순교당하는데 이분도 런던 선교회 출신이고요. 그 전에 귀츨라프가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근데 그 앞에 무슨 이제 이런 뭐 벨테브레, 맥스 홀 이런 사람들이 접촉은 하지만은 이 사람들은 기독교를 직접 전하지 않았고 기독교를 직접 전한 선교사는 귀출라프 입니다

19C 후반에 만주에서부터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 목사가 나타납니다. 존 로스 목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입니다. 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국 설교를 시작합니다개신교, 천주교하고 달리 실용적으로 시작했습니다신앙을 가지고 시작하고 천주교는 학문적 접근으로 시작했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우리는 굉장히 복음적인 복음적인 설교 활동을 했고 아직도 천주교는 좀 우리에게는 못 미치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요즘은 천주교도 많이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는 파란 가방이 있는데요이게 언더우드가 사용하던 가방입니다. 저 가방을 저희 집안이 중국으로 저거를 가지고 다니고 귀국할 때 가지고 오고, 6.25 전쟁 때 끌고 다니고 그러다가 기증했습니다. 저게 굉장히 무겁습니다. 근데 저걸 어떻게 우리 전쟁에 피난 때도 저걸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저걸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시다가 교회에 기증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 안에는 항상 명주옷만 넣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연 자연 섬유니까. 보존하기 위해서 전혀 화학섬유를 넣지 않고 그렇게 해서 사용하시다가 교회에다가 기증했는데 언더우드의 개인 손이 묻은 것은 거의 이거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사 역사 부분은 제가 좀 자세하게 설명을 드립니다.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목사인 존 로스 목사와 메켄타이어 목사 이 두 분이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집니다이분이 심양에 와 있으면서 심양하고 단동 사이에 장문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서 이제 조선 사람하고 중국 사람하고 무역을 하는 곳입니다1년에 두 번씩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는데 거기에 로스 목사가 갔다가 조선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이상한 종족을 만났는데, 중국 사람과는 다른 글과 언어를 가지고 있고, 흰 망토같은 옷을 즐겨 입고 연통 같은 모자를 썼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을 번역하겠다뭡니까? 갓을 쓴 것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신기하게 보이는데 말을 붙이니까 중국 말 하지 않거든요그래서 이 사람이 조선 사람이구나!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당한 지역의 조선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경 번역을 시작을 하는데, 1876년에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이응찬, 백홍중, 김진기, 서상륜, 서경조, 이성하, 이익세등 한 10여 명의 조선인들이 로스 목사와 메켄타이어 목사하고 성경 번역을 시작을 합니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기 한국인 이 사람들이 모두 세례 받았습니다. 보통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할 때 어떡합니까? 원주민에게 말과 글을 배워서 성경 번역을 하는 거 아니에요그런데 우리나라는 성경번역자들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1879년 대단히 역사적인 해인데 그 해에 이응찬, 백흥중, 이성하, 김진기 요렇게 네 사람이 메켄타리어 목사님한테 세례를 받습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입니다. 그 다음에 서상륜, 서경조등이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 번역에 참여한 분들이 모두 자기의 신앙 고백과 함께 성경 번역을 합니다그래서 요한복음, 누가복음이 출간되고, 1982년에 요한복음이 중국에서 출간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을 누가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갈까? 서상륜이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나섭니다당신의 대부분의 쇄국정치로 인해서 성경책이 한국에 못 들어오는데 성경책 500권을 의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국의 성경이 전례된 이야기들이 백낙종 박사님부터 여러 분들이 쓰셨는데 그건 거의 다 구전에 의한 것들이고, 실제로 대한성서공회사가 자료에 의해서 이 역사를 정리했습니다그래서 서상륜이 성경책 500권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오는데 아주 마음이 좋은 검사관을 만나서 통과 과정에서 성경책을 찾아가지고, 황해도 소래에서 소래교회를 세웁니다. 소래교회를 세우고는 서울로 와서 전도를 열심히 하는데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합니다그러면 어떻게 된 거예요. 한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에 이미 크리스찬이 있었고, 세례 받은 크리스찬이 있었고, 성경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습니다이것이 전 세계의 선교 역사에서 거의 유일한 예입니다

1985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오면서 이수정이 일본서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옵니다한국에 들어와서 보니까 당신이 가져온 한글 성경 말고 다른 한글 성경이 엄청나게 보급된 걸 보고 깜짝 놀랍니다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만나자마자 첫 마디가 목사님 이제 오셨습니까? 서울에 세례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70명이 됩니다.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에 따라 미국에 보고하기를 "나는 한국의 복음의 씨를 뿌리러 가는데 열매를 거두기에 바쁘다"라고 하는 즐거운 보고를 합니다그래서 서상륜과 서경조와 언더우드가 협력해서 세운 교회가 새문안교회 입니다.

그런데 새문안 교회가 설립될 때 될 때 창립 예배에 소래교회 교인 5명이 함께 참석합니다그래서 소래교회와 새문안교인은 같은 공동체이고, 그 다음에 첫 교회인 소래교회는 자생 교회라고 얘기하고, 새문안교회는 첫 예배에서 두 사람의 장로를 선출해서 당회를 조직합니다그래서 새문안교회는 조직 교회 한국의 첫 교회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저에겐 할아버지가 두 분인데 서경주가 동생이고 서상륜이 형인데, 서상륜은 장로 장립을 못 했습니다. 왜 어떻게 되냐 하면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했는데 첫 부인을 첫날 밤에 소박을 놓고 이제껏 둘째 부인하고 살았습니다이게 엄청난 죄의식이 있어서 장로 선출이 되고 장로 임직을 안 받았고요. 서경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님 일곱 분 가운데 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두 증조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새문안교회의 현재 소위 설립 가족은 저희 가족만 지금 남아 있습니다.

제 손주까지 6대째 새문안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와~~아, 마음속으로 박수 짝짝짝....부럽다)

제가 지금 말씀드렸던 내용을 잠깐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로스 선교사가 상해에 도착했는데 이응찬을 만나서 1872년에 한글을 배웠거든요그리고 이제 1872년에 서상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서 콜레라에 걸렸는데 로스 선교사가 고쳐주니까 나도 고쳐주면 예수 믿겠다그래 가지고는 그 약속을 지키느라고 성경 번역을 시작하면서 1879년에 네 사람이 이제 세례 받습니다. 1882년에 최초의 한글성경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한국으로 들어옵니다이때 서상륜의 공식 직책은 영국 성서공회의 북중국 지휘부 권서였습니다. 권서는 성경 번역과 성경 책을 판매하는 사람인데 아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전도인이었습니다그리고 1983년 혹은 84년 설이 있는데 황해도 장연에 소래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다음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왔죠. 그리고 1887년에 새문안 교회가 설립이 됩니다그런데 여기에서 14 명의 신자가 모였는데 그 14명 가운데 서상륜이 있고요, 13명이 모두 서상륜이 전도해서 모이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교회 창립을 하는데 어떻게 창립 예배를 드립니까? 보통 우리 창립하면 어떡합니까?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예배하고, 떡 먹고, 뭐 음식 나눠주고, 수건 나눠주고 그렇게 하는게 창립예배 아닙니까? 근데 새문안 교회의 창립 예배에는 교인을 모아놓고 첫 예배를 드리고 장로 두 사람을 선출합니다이때에 소래교회 출신 다섯 명이 예배를 함께 참석해서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는 같은 공동체로 이렇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언더우드의 초기 활동: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 언더우드가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1886년 7월 18일 서울에서 처음 전도한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 드리는 장면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았다. 모두가 다 갓을 쓰고 있어서 양반들 같은데 실제로 모두 양반은 아니었다고 한다. 앞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언더우드 목사와 키가 더 크신 분이 로스 목사님이라고 한다. 새문안교회 첫 창립 예배에 로스 목사가 참여하신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새문안교회 창립 이전에 로스 목사가 6천 권의 성경을 보내주거든요그 성경을 보냈는데 그게 세관에서 통과가 안 되는데 마음씨 좋은 세관장이 봐줘 가지고 성경책을 6,000권을 서상륜에게 인수를 시킵니다그래서 서상륜이 그걸로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 그 다음에 언더우드가 들어온 거예요그러니까 서울 바닥에 6,000권의 성경책이 굴려다니고 있었으니까 언더우드가 너무 놀란 거죠. 로스 목사가 서상륜에게 소형책 6,000권을 보내놓고 잘하는지 못하는지 궁금해서 한국까지 확인하러 여행을 옵니다여행을 와서 확인하고 너무 감사하고 그랬는데 오늘 저녁에 예배가 있습니다그래서 쫓아갔더니 이렇게 첫 예배가 시작되고 그래서 로스 목사님 머리가 좀 벗어진 로스 목사님의 형상도 이렇게 만들어서 미니어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언더우드에 대해서 좀 새로운 시각을 가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제가 언더우드를 네 가지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째, 언더우드의 가장 신앙적인 종교적인 활동은 성경 번역과 찬송과 편찬입니다. 성경 번역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00년에 신약전서가 나오고, 그 다음에 1910년에 구약이 나옵니다성경 번역은 번역을 하고 나면 돌아서서 바로 개정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경 번역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1910년에 구약전서가 나온 다음에 곧 개정위원회를 만들어서 성경 번역 개정 작업을 하다가 1916년에 언더우드 목사사 별세하십니다. 평생 성경 번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어떻게 성경 번역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뉴욕 대학에서 문학 석사를 받았습니다그러니까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뉴욕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그게 무슨 과인지는 안 나오는데 문학 석사 학위를 받으면서 어문학에 대한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리고 1894년에 한국 최초로 찬양가를 펴냅니다. 이 당시에 찬송은 어떻게 불렀냐 괘도에다가 괘도 혹시 아십니까? 괘도 보실 분이 있습니까? 괘도에다가 가사 붙여서 불렀습니다그런데 그때는 재밌는 게 선율을 몇 개만 합니다예를 들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막 갖다 붙입니다우리나라 찬송가처럼 음절이 정확하게 떨어지는 찬송가가 전세계에 없습니다그러니까 찬송가 음절이 8 8 4 4 6 6 이런 숫자들이 찬송가 옆에 있죠그게 음절의 숫자거든요. 그러니까 음절만 맞으면 몇 개 안 되는 선율에다가 다 붙여서 노래를 부를 때에 그런 세상에 오선 악보를 내놓은 겁니다소파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는데 이게 소위 말하는 콩나물 대가리죠! 콩나물 대가리가 있는데 이거를 각각 불러보니까 그래서 네 사람이 사중창을 해보니까 듣기 좋거든요. 우리나라의 현대 음악을 소개한 분이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책을 어디서 만들었냐?하면 미국에 가서 당신이 모금해서 찬송가를 미국에서 찍어서 가지고 왔습니다그런데 애석하게도 찬송가가 나오기 2년 전에 1892년에 감리교에서 찬미가라는 걸 만들었습니다그런데 찬미가는 가사만 있는 겁니다. 여기 오선 악보가 있는 찬송가에는 조선 사람이 쓴 시로 만든 찬송가가 89곡이 들어가 있습니다그리고 조선의 음률, 선율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 들어 오니까 다른 선교사들이 질투하고 이 찬송가를 인정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배제학당, 이화학당에서 음악 교재로 쓰였습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사성 악보가 교회를 통해서 왔고, 또 우리나라의 현대 음악의 효시라고 할 수 있죠. 근데 이것은 성경과 찬송가라는 이렇게 두 가지의 의미도 있지만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역할을 합니다.

두번째,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키는게 YMCA 운동이 들어가죠이 YMCA 운동을 왜 했겠어요?  게일, 할버트, 질네트 이런 사람들하고 YMCA 운동을 왜 했을까요?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을 도무지 청년들이 못하니까 이 YMCA운동을 통해서 이런 문학을 통해서, 음악을 통해서, 우리 민족주의를 살려내려고 애를 썼던 거예요

세번째 전도를 엄청나게 많이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여덟 살 연상인 호튼 선교사와 결혼을 합니다결혼하고는 이제 여행 가겠다고 그럽니다그러니까 조선총독부가 서울을 못 떠난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신혼여행 간다 그러니까 신혼여행 가야 된다 그래가지고 신혼여행을 떠납니다어디로 갔을까요? 서해로 해서 평양으로 해서 의주로 해서 압록강에서 33인 세례를 베품니다. 이 33인 세례가 재밌습니다어떻게 보면 압록강에 신의주 쪽에 조선 땅 쪽의 강가에서 세례 문답을 했습니다70명이 문답을 나섰는데 33명만 합격시켰습니다그리고 거기서 배를 태워가지고 중국 땅으로 건너가서 중국 땅에 건너가서 중국 땅쪽 압록강에서 세를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국법을 지켜지 않으면, 선교 활동 못하게 했거든요거기는 어디에요. 중국 땅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압록강 33인 세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언더우드는 정말 전도 열심히 하고 다니신 분이였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고종을 지키는 언더우드 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1895년에 명성왕후의 시해 사건이 벌어지죠. 그런데 명성왕후의 시해 사건을 직접 목격은 안 했지만 옆에서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언더우드의 부인 호튼입니다. 명성왕후의 어의였습니다 시의라고 그랬죠. 왜냐하면 여자나 왕비는 여자 의사가 가서 진료와 의료 행위를 해야지 남자가 못 가잖아요그래서 호튼이 명성황후하고 아주 가까이 지냈는데 시해 당하는 걸 보면서 이 호튼이 아주 그냥 정신세계가 아주 아주 무너집니다그리고 우울증에 걸리고 그냥 괴멸감에 빠지고, 영어로는 이그저스트라고 그러는데 아주 그냥 확 그냥 꺼지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는 고종 황제도 도저히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는 겁니다왜군이 뭐 명성왕후를 그렇게 아주 잔혹하게 죽였는데, 결국은 한 사건이 터지는데 춘생문 사건이 터집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그 그해 11월에 경복궁 춘생문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친미파, 친러파, 개화파, 친일파의 갈등 상황 가운데 언더우드, 홀보트, 에비슨 이 세 사람이 춘생문이라는 경복궁 옆에 작은 통로로 고종을 빼내서 미국 공사관에 피신시키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모의를 했습니다. 그 모의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일본 경찰에 밀고 했어요그래서 이게 탄로가 났어요. 근데 그 현장에 언더우드가 있었거든요그러니까 고종을 모시고 나가다가 그만 실패하고 고종이 방에 갇혔는데 언더우드가 옆에서 고종을 지켰습니다근데 일본의 그 망나니들이 막 총을 들고 들어와서 다 죽이려고 하는데, 고종을 죽이려고 들어왔는데 보니까 미국 시민권자가 임금을 지키고 있잖아요기록에 보면 육혈포를 들었다고 그랬어요권총이죠. 권총, 육혈포를 들고 언더우드가 고종을 지킨 거예요. 이분은 미국 시민권자이니까 어떻게 쏘겠어요그래서 고종을 보호합니다. 그 후에 고종은 궁궐 수랏관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을 못 먹습니다그래서 언더우드하고 헐버트하고 에디슨이 만들어준 밥통에다가 음식을 만들어서 그거를 경복궁 영문으로 넣어주면 그거를 고종이 먹습니다. 고종은 끝내 개종하지는 않았습니다그런데 고종은 자기의 생명을 선교사들에게 맡겼습니다그래서 고종의 침소 옆에 방을 하나 마련해가지고 선교사들이 불침번을 섰습니다. 선교사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그러나 미국 시민권자쟎아요. 그게 얼마나 큰 힘이에요그러니까 고종이 불르면 얼른 뛰어가는게 선교사들이였다고 고종이 고백했습니다내 생명을 누가 지키노? 저 선교사들이 날 지켜준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집어 먹는 것을 일본이 양해하고, 일본이 한국을 집어 먹는 걸 미국이 양해하는 조약이었어요그 그 조약이 이루어질 쯤 되니까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몸을 도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왜요?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필리핀으로 간다는 뜻이 거든요. 그런데 언더우드는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켰습니다언더우드가 이 한국 사랑하는 거는 말로 표현을 못 합니다여기에 헐버트하고 에비슨. 에비슨이 나중에 연세대학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하죠언더우드에 이어서 그 세 분이 아주 헌신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합니다이건 정말 눈물 겨운 일인데요. 언더우드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습니다여러분 선교사는요 그 나라의 국민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굉장한 개인주의가 많아 가지고 그때 선교사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1904년 러일 전쟁 직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이 인도를 집어 먹는 것을 일본이 양해하는 영일동맹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 가운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다 용인했습니다. 루즈벨트가 얼마나 친일이었습니까? 루즈벨트가 엄청나게 친일이었거든요. 그런 와중에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지킨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분이 한국 사랑한 거는 정말 정말 놀라운 일이고 이런 선교사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쪽에 보면요. 이 화면은 애국가가 있습니다이 화면은 자꾸 돌아가는데 이게 뭔지 아세요?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이 곡에다가 가사를 붙여서 만든 애국가 인데 이 애국가를 새문안교회가 제일 처음 불렸습니다. 근데 이 애국가에 가사가 재밌습니다. 저기 가사에 뭐가 나오냐 하면요. 이 당시의 애국가는 뭐냐 하면 임금을 칭송하는 겁니다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칭송해야지 어떻게 임금을 칭송합니까? 임금을 칭송 해야합니까?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임금은 곧 나라를 말하는 거예요그러니까 나라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일제의 핍박 때문에 못하니까 어떻게 해요? 임금을 칭송하는 겁니다. 임금을 칭송하는 건 일본 정부도 어떻게 못 했습니다그래가지고 새문안교회에서 이 애국가를 부르는데 그래서 예종의 민경찬 교수님이라는 분이 이 애국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애국가이고 새문안교회가 불렀다고 그분이 논문을 써서 그 논문이 인정받고 있습니다그래서 이 애국가가 교회에서 불려집니다심지어는 고종 탄신 축하 예배도 합니다 고종은 개종도 안 했는데, 고종 탄신 축하 예배도 하고요.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임금을 사랑하는 걸로 이렇게 바꾸도록 하는 그리고 그 다음에 이 애국가 다음에 이제 도산 안창호가 한 애국가가 나오고요. 도산 안창호는 우리 교회 교인이었습니다안창호가 가사를 바꿔서 애국가를 부르게 됩니다'높으신 상주님' 상주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죠역사의 임금으로 불리다가 자비로 성주님 그물이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주옵소서 그 다음에 여기 이 절에서도 우리의 대군주 폐하 하나님 보고 폐하라고 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살아가는 마음으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에는 언더우드의 형 존티 언더우드가 있었는데 그분이 참 대단한 분입니다언더우드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셨는데요언더우드의 패밀리가 타자기 만들고, 잉크 만들고, 농기구 만드는 회사를 했습니다그때 아버지는 조금 일찍 돌아가시고 큰 형이 아버지 노릇을 했는데 그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전 세계적으로 공급했어요돈을 많이 벌었어요. 여러분 그때요 타자기 팔고 사업해가지고 5만 달러를 언더우드에게 보냈습니다. 여러분 5만 달러가 얼마나 큰 돈일까? 상상이 되십니까? 목사가 그 당시에 선교사가 1년에 받는 연봉이 200불 내지 300불이었습니다그런데 5만 달러를 줬어요. 그래서 그거 가지고 연세대학 세우는데  사용이 됩니다. 크게 땅도 사고 이제 건물도 지어야 하거든요그래서 언더우드 뒤에는 존티 언더우드라는 맏형의 헌신과 헌금과 참 정성이 대단했습니다. 뉴욕에서 떠나서 샌프란시스코 가서 배 타고 한국에 오는데 이 존티 언더우드가 시카고까지 동행을 합니다뭐 타고 왔을까요? 당시에 칙칙폭폭 하는 기차 타고 가죠동생이 한국 가는 걸 전송하기 위해서 시카코까지 전송하고 거기서부터는 혼자 왔는데 아주 정말 멋진 형을 언더우드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브란스는 세브란스 의사가 도네이션해서 세운 병원이고요. 그게 1960년대에 연희전문하고, 세브란스하고 합쳐서 연세가 됩니다예 그러니까 연희전문은 1915년에 언더우드에 의해서 설립되고, 1964년인가요 그때 세브란스 병원하고 합해서 세브란스 의과 대학하고 합쳐서 연세대학이 되었습니다.

개화기 독립운동과 새문안교회와 관련된 분은 안창호하고 김규식 두 분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개화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면면을 좀 살폈는데 이 도산 안창호하고, 김규식. 김규식은 우리 교회 장로였고요.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양자로 컸죠. 고아로 있다가 커서 미국 로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고,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도 하고요. 우리 교회 장로였고요. 안창호는 잘 아시는 대로 우리 새문안교회 교인이였습니다.모두 8분의 독립유공자가 있습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혜 권사님 그 다음에 이제 도산 안창호하고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 맺었던 세브란스 1기의 김필수, 김필수는 언더우드에게 영어를 배웠습니다영어를 너무 잘해서 의학서를 세브란스에 다니면서 의학서를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그리고 김규식의 부인 김순혜의 오빠가 김필순이고요, 그 다음에 김규식의 친 동서인 서병호, 친동서인 서병호가 김규식 박사와 함께 신한 청년단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다음에 서영호의 아들, 서재현 그분도 신한청년단에서 활동했습니다그리고 이제 여러분 잘 아시는 김마리아. 김마리아가 사학교에서 세례 받았습니다그때 당시에는 김필순 안창호 둘은 의형제로 너무 가까이 지내다가 경찰을 쫓으면서 김필순은 밤에 야반 도주해서 중국으로 도망갑니다망명에서 중국에서 거처하고 해서 활동을 하다가 거기서 이제 죽게 되는데, 이제 지금 말씀드리신 김규식, 서병호, 서재영, 그 다음에 김순혜, 김필순, 김마리아 모두 6분은 광산 김씨 문중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광산김씨 문중이라는게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소래 교회를 세운 집안이 광산 김씨인데 광산 김씨 문중에서 나온 독립유공자가 6분입니다그런데 광산 김씨 문중은 굉장한 부자였습니다그런데 서상륜이 복음을 전하니까 진취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손에 꾀도 세우고 그렇게 했거든요근데 그 집은 그렇지만은 시간이 아주 고질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방이 유명한 시간인데 거기 지금 김주식의 손위 동서인 서병호 아들인 재영은 저희 할아버지하고 저희 아버지입니다그래서 이제 이게 이제 광산 김씨 문중에 독립운동 했던 것이 세문안교회하고 언더우드하고 연결하면서 뿌리가 깊게 새문안교회의 흐름을 잡고 있습니다.

1910년 벽돌예배당 건축, 언더우드 성서 완역, 연희전문학교 세우고 1916년 별세하심.

언더우드 이후에 경신학교장 쿤스 선교사가 부임 함

이게 1935년 언더우드선교 50주년 기념 예배로 추정되는 사진입니다. 차재명 목사님이 계시고 단상에는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 원한경 박사(언더우드 아들)입니다. 그런데 뒤편에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적혀 있지요? 데커레이션을 영어로 했으니까 이거 좀 특별하죠. 이때 당시 1935년 이니까 성경하고 찬미 몇장 이라고 빈 칸에다가 분필 같은 것으로 써서 이렇게 예배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물은 쿤스 목사, 윤치호 장로(감리교), 양주삼 목사(감리교)님입니다. 송순명 장로, 강헌집장로, 에비슨 목사(감리교)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야 감리교와 장로교 이때는요 감리교, 장로교가 한 팀원이었어요. 완전히 같이 그러니까 장로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감리교에서 꼭 가야 하고 감리교에서 무슨 행사 있으면 장로교가 꼭 가야 했고 한덩어리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역사에서 참 자랑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 장로교가 미국에서 기독교 관찰했을 때 북장로교와 남장로교가 있었죠.  그래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가  미국 국내에서는 아주 라이벌이었습니다. 근데 국내에 들어왔던 미국 선교사들은 북장로교, 남장로교로 모두 똑같이 했습니다. 그 대신 북장로교는 서울 이북을, 서울 이남은 남장로교가 지역을 맡아서 하자 그래서 전주 광주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호주 선교사는 부산에서 활동하고 이렇게 아주 평화롭게 그러니까 한국이 미국 장로교를 하나로 만든 시초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미국에서 남북 교단이 합칩니다. 참 자랑스런 역사구요. 한국에서는 장로교단 뿐만이 아니라 감리교와도 아주 평화롭게 화합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 이후에 세번째 벽돌 예배당을 봉헌 하셨다. 두번째 예배당은 100석 규모인데 이미 150명 이상의 성도들이 모이셔서 500석 규모의 예배당을 봉헌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초기 새문안교회의 치리는 엄격 했는데 창립 때 장립한 장로 2명 가운데 1명이 치리를 받아 출교를 당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렇게 엄격하게 치리하면 많이 쫓겨 날 것 같다. 불륜, 축첩, 음주, 주일 성수 위배를 할 경우 당회에서 불러서 권면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의 기록 유산 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거는 보물입니다. 이게 교적부입니다. 지금은 다 인터넷으로 뭐 컴퓨터로 하지만 옛날에는 붓으로 다 썼습니다. 대단한 거 아닙니까? 뭐 집안의 내력등을 붓으로 깨알같이 썼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것으로 우리가 해제를 붙어서 해제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 단어들을 잘 알 수 없는 단어들은 해제를 붙여서 다시 번역하는 거죠. 그래서 이 책을 우리가 다시 만들고 있는데 이 책의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교회 당회록은 어떻게 합니까? 최종 결정사항만 기록을 그런데 여기 당회록이나 제직회록은요 그 결정하기까지의 분위기가 다 적혀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여기서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다시 만들어 가지고 해제 붙여가지고 책으로 엮어서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자료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문화재 등재하는 거기에 한국 문화원인가요?  거기에 우리가 지금 문화재 등재 신청을 해놓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 일지 이런게 있고요. 그래서 하여튼 새문안교회 100년사 쓴 한태동 박사님이 70년사를 쓰셨고, 민경규 교수가 85년사를 썼는데, 85년사를 쓸 때에는 이런 자료가 안 나왔습니다. 100년사를 쓸때 이 책이 다 발견된 것입니다. 이 역사 책이 우리 교회 지하 이상한 창고 캐비넷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까 1947년에 빨간 벽돌로 다시 지었다고 설명드렸지만 1950년에 6.25 전쟁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가 다 폭격을 받았는데 우리 교회도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미군들이 저 한국의 첫 교회인데 저기 공격 폭격하지 마라 그래가지고 우리 교회는 전쟁 내내 인민군들이 가득 들어와 있었습니다. 제일 안전한 곳이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돼서 교회가 보존되면서 이런 것들이 지하 창고에 있던 것들이 그대로 발견돼서 100년사 역사 책을 쓰고 새로 썼습니다. 70년사하고는 완전히 다른 그래서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르죠
여기는 언더우드 목사님이 이제 번역했던 성경들 이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새문안교회가 가진 보물들입니다여기 뭐라고 써 있습니까? 당회록 그렇죠. 

이것은 새문안교회 교우 문답지 입니다. 지금 어느 교회에도 세례 문답을 할 때 좋은 답안지 만들죠? 근데 여긴 직업, 예수 믿게 된 동기, 그 다음에 문답에 대한 결과, 합격 불합격, 아니면 다음에 봐라 뭐 이런것들이 자세하게 쫙 적혀 있어요그런데 이게 회장 원두우, 서기 김규식 그러니까 두 분이 당회 회장하고 당회 서기가 이 기록을 남긴 겁니다그래서 여러분 이런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세례 분답을 하는데  '예수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믿느냐?',  '예 구세주인 것을 믿습니다.'  '그럼 됐네' 자네 이제 세례를 받는데 자네 주초(酒草)는 어떻게 되었는가? 술, 담배 어떻게 되어 있는가? 물어보는 거죠? 그러니까 '아직 못 끊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초는 세례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나, 덕을 세우지 못하니 주초를 끊고 와서 세례받도록 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술, 담배는 세례를 받는 거와 상관없잖아요그런데 남들에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는 거예요그러니까 끊고 와서 세례 받게 그래서 6개월 뒤에  다시 와서 세례 받습니다그 사람들의 이런 참 멋있는 전통이 이 문답집에 그대로 실려져 있습니다얼마나 감사한지 이거는 보물입니다.

기록 유산은 정말 보물 같은 것이다. 평양신학교 종교교육과 1회 졸업생 사진도 있고, 교회 주보도 있고, 차재명 목사님의 중국어 성경, 일본어 성경도 있고, 면려회의록등도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제2대 차재명 목사님입니다. 1920년에 한국에 목사는 거의 모든 교회 목회는 선교사들이었어요그런데 언더우드 목사님은 생각이 달랐습니다이분을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세우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 공부하도록 뒷받침하고, 그 다음에 목사가 된 다음에 영등포교회등에서 목회 훈련을 한 다음에, 새문안 교회의 목회자가 됐습니다왜 그랬을까요? 한국 교회는 빨리 한국 지도자들이 맡으라고 하는 그분의 철학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이거는 정말로 1920년에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가 선교사에 의해서 목회가 안 되고 한국인 목사가 목회했다는 것은 놀라운 입니다그래서 주목을 받게 되고요, 여기 있는 이 책들은 이 목사님이 공부하고 있는 책입니다이거 전부 다 신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책을 우리가 후손으로부터 전부 다 뺐다시피 해서 이곳에 전시를 했습니다.그리고 차재명 목사님 사모님이 차활란 이렇게 미국 식으로, 사실은 김 씨인데 근데 이분은 영어 선생님이었습니다유관순을 가르쳤고요, 그리고 유관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차활란 사모님과 원한경 목사님 두 분이 영어 성경 반을 시작합니다1930년 초반이죠. 근데 그때 당시에 무슨 영어 성경만이 있었겠어요. 영어 성경만 했고요 ,이분이 교육에 워낙 관심이 많으셔서 새문안 유치원이 1930년에 시작하고 네 굉장히 빨리 시작합니다그래서 이 유치원은 지금까지도 연결되고 있습니다어린이집으로 그 전통을 계속 이어 받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역사관에 이런 판이 여러 개가 있는데요.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가 탄압 당했습니다. 왼쪽은 통사입니다. 오른 쪽은 우리 교회사 입니다. 이 교회사하고 한국의 통사하고 연결고리를 젊은이들에게 좀 가르쳐 합니다. 통사 따로 배우고, 교회사 따로 배우면 이게 연결이 안 돼가지고요 의미가 없어요1938년에 38년에 신사 참배하죠신사 참배하는 그 해에 성경 개혁판이 나옵니다이 성경 개혁판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개혁 개정판의 원조 입니다.  그런데 1911년에 성경 신구약 완역본이 나오잖아요신구약 성격이 나오고 바로 돌아서서 성경 개정 작업을 해가지고 언더우드가 여기에 참여하다가 언더우드 1916년에 돌아가시고 계속해서 1938년에 39년에  성경이 나오면서 한국교회는 신앙적으로 크게 부흥합니다

왜 그래요? 이 성경이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하면 " 예수님이 방에 입(入)하시다 그랬어요.

입하시다가 뭡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예수님이 방에 들어가시다" 그랬어요그랬더니 굉장히 보수적인 분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한글로 쓰느냐? 입(入)하시다 그래야지 들어가시는 게 뭐냐? 그런 저항을 받을 정도로 이 성경은 아주 획기적인 성경이었어요이 성경의 뿌리가 지금까지 온 거예요. 연대표를 보시면 이제 이렇게 신사 참배 그 다음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거든요.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는데 성경이 딱 나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거 놀랍지 않으세요. 조선어학회 사건이 뭐예요. 조선말을 말살시키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그런데 조선어로 신나는 성경이 나오는 거예요네 이런 것이 이렇게 매칭 매칭되면서 이제 이렇게 통사와 교회사가 연결되는 이런 판이 여럿 있습니다그래서 이런 판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부터 차재명 목사님이 부임하시고, 나라를 잃어버린 일제 시대에 천황숭배에 항거하시다가 강제 사임을 당하시고 국가적 시련기에 용하게도 새문안 교회가 한국 교회를 어둠에서 이그신 것 같다. 김영주 목사님이 1944년에 부임 하셨다.

여전도회가 참 활발했던 것 같다. 구제 사업과 절제운동, 금주운동, 공창 폐지 운동, 성미 운동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교육 사업에도 열심이셨던 것 같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한 원동력이지 밑거름이 이 때부터 시작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근대 음악가들을 근대 음악가들을 전부 다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근대 음악가들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은 피아니스트 또 작곡가 봉선화 작사한 김형준, 홍남파(새문안교회) 교인이었고요 그리고 홍성유 선생님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인영 선생님,  이인범 선생님 이런 분들 여기 계세요. 새문안교회에 연악회라는 게 있었습니다무슨 말일까요이게 연합회가 연주회를 했습니다. 근데 교회 지금도 조금 그렇죠 옛날 본당에서 음악회 한다면은 아 그 경건한데 어떻게 올라가서 음악 세상 음악을 어떻게 해 이런 얘기를 할 때 이미 새문안교회는 본당을 내주고 음악회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대가 없었거든요. 음악 그러니까 이 현대 음악을 공부하신 분들이 어디 연주할 무대가 없는 겁니다새문안교회가 이 장을 열어준 겁니다그래서 뭐 신인음악회도 하고 이렇게 되면서, 이제 현재명의 아동 찬송가 됩니다이런 것도 새문안교회가 하면서 음악 발전에 상당히 기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현대 음악을 공부하시는 역사를 공부하신 분들은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 있어요브라스 밴드를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처음. 트럼펫 부는 사람도 전부 다 교회로 불러서 밴드가 생길 정도니까 대단한 거죠

여기는 장지영 선생님, 최현배 집사님 두 분의 이야기인데요. 참 이게 한국 교회가 참 가슴 아픈 일인데요. 이게 뭐냐 하면 조선어 연구회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게 터집니다. 이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뭐냐 하면요. 조선어 대사전을 만들었다는게 죄였습니다. 아니 조선 사람이 조선어 대사전을 만드는게 무슨 죄입니까? 근데 총독부에서 뭐라고 하는 거니 일본어를 이렇게 해야지 조선어를 발전시키는 조선민족의 민족정기가 계승을 한다 그래가지고 이 조선어 대사전를 만들었던 사람 40여명을 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그때 최현배 선생님이 앞장섭니다. 장지영 선생, 최현배 선생은 장립 집사 지금의 안수 집사입니다.  장지영 선생님도 우리 교회 집사님 이신데 물산장려 운동, 신간회 이런 데서 또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분들의 뒷받침을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그렇고 그래서 아주 대표적으로 이 두 분이 조선어 대사전 만드는 데 참여하면서 고충을 당하는데 새문안 교회가 함께 동참합니다. 그리고는 동방요배라는 것이 있었죠. 1938년에 신사참배가 벌어지죠 신사참배 벌어지니까 어떡합니까? 예배 드리기 전에 남쪽의 신국 쪽으로 향해서 동방요배(일본 황궁을 향하여 절하는 것)를하고, 주문을 외우고, 노래 부르고, 그 다음에 묵도하고 예배 드렸거든요. 그런데 한 번은 차재명 목사님에게 종로서 형사가 안 와서 오늘은 동방요배 안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을 누가 밀고 해서 결국은 총독부가 쫓아냅니다. 국가 의례를 빼고 예배를 진행하느냐? 이게 고발장의 사유입니다. 총독부가 강제로 사임을 하게 했는데 미루다가 나중에는 어쩔수 없이 신수비 그러니까 지금은 퇴직금이 있지만 옛날에 퇴직금은 없었습니다. 퇴직금 쪼로 3 달에 신수비를 드리고, 사택을 사드려서 편하게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일제 총독부에 항거하는 거죠. 일종의 너희들은 내쫓지만 우리는 잘모신다라는거죠. 이렇게 해서 잘 모시면서 잘 떠나시도록 하는 가운데 사임을 당하는 이런 고초를 격었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목사도 1942년에 쿤스 목사와 함께 추방당하죠.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1942년에 선교사들이 다 쫓겨나는 어려움을 다 하는데 차재명 목사님이 참 힘들고 어려울때 근데 차재명 목사님이 일제와 협력하는 연설도 하셨고요 안 할 수가 없어요.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도 하셨고 그것을 안 하면 목회를 못하니까 이제 그렇게 협력하신 부분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에 있던 조선에 있던 목사님들은 모두 협력했습니다.

여기는 3대 목사님 김영주 목사님 이십니다. 김영주 목사님은 동지사대학을 나오셨어요동지사대학이 좀 진보적인 신학교입니다. 진보적인 신학교인데 이분이 목사 되기 전에 남대문 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시면서 무슨 얘기를 하는고 하니 '모세 오경은 모세가 다 쓰지 않았다'라고 하는 주장을 했어요이게 난리가 난 거예요. 모세 저작설 이것은 그때까지도 굉장히 보수적이니까 모세 오경은 한 자도 모세가 쓰지 않은 게 없다라고 하는 게 그 당시에 신앙이 신학적인 보수적인 신학 사주도 이거는 일본서 공부해보니까 아니거든요. 그게 모세가 쓸 수 없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총회에서 징벌을 받게 됩니다그런데 지혜롭게 이분이 잘 피해 갑니다피해가면서 이제 총회에서 벌 받는 거는 피하게 되고, 그리고 새문안교회로 오시는데 새문안남교회는 그런 모세 저작설로 문제를 일으켰던 목사님을 새문안교회의 목사님으로 모시는 거 이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굉장히 획기적이에요. 왜 그랬을까요? 이게 1944년 해방 직전이거든요그러니까 지난 1944년에 새문안 교회가 제일 어려울 때였습니다교인 숫자도 100명 미만으로 줄고, 핍박 많이 나가고 힘들고 어려울 텐데 이럴 때 새로운 신학을 공부하신 분을 모셔오자고 하는 게 교회의 뜻이었습니다그래서 기록에 보면요. 만장일치로 온 교인이 만장일치로 김영주 목사님을 우리 교회 모십니다그런데 여기에 오시자마자 해방이 터지죠. 근데 이거는 진보적인 시각이 강했다그래서 물론 구원도 개인의 구원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국가적인 구원, 사회적인 구원에 굉장히 매력을 가지고 노력하십니다. 그래서 계몽 운동을 하고 국민 계몽 운동에 열심히 나섭니다그리고 질서가 무너질 때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십니다그리고 그래서 이제 저런 활동을 하시다가 6.25를 맞습니다그런데 1947년에 아까 말씀드렸죠. 1947년에 벽돌 예배당을 지었습니다그때 교인들이 다 벽돌 한 장 한 장 구워가지고 정말 벽돌 한 장씩 짊어지고 그러고 예배당을 세웠대요 그래 가지고 정말 힘들게 세웠는데 6.25를 만나 피난 떠나지 못한 교인들이 '목사님 피난합시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교인들이 있으니까 나는 이분들을 지키겠다라고 하시면서 피난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납북 당합니다그래서 8월달에 납북 당하셔서 이북으로 끌려가셔서 생사를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생사를 모르는데 분명히 돌아가셨을 것으로 우리는 보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는 총회의 인준을 받아서 순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저나 교회는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새로운 신학을 새로운 생각을 이렇게 공부하신 분들을 나라가 어려울 때 모셔서 교회가 새롭고자 했던 노력을 했던 그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4대 강신명 목사님은 좀 아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강 목사님은 프리스톤에서 기독교 교육과 교회사를 전공하셨습니다석사를 받으셨고요, 숭실대 나오셨고 그리고 강신명 목사님은 어학에 뛰어난 아주 실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은 애큐메니컬 운동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라고 생각합니다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셨고 이분은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교회 연합 일치운동 이쟎아요. 그리스도를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종교인과는 우리는 존경한다. 그래서 상당히 교회 강단은 항상 모든 교단에 다 오픈되는 그런 것을 했고 그 다음에 이분이 뛰어난 것은 행정력이 뛰어났습니다여러분 거기에 고개를 잠깐 돌리시면 새문안교회 일람표가 있지요. 이게 1966년도 강 목사님이 만드신 교우 일람표인데 지금도 저대로 그대로 우리가 쓰고 있습니다뭐 부서가 좀 늘어났겠지만 부서가 늘어나고 구역이 좀 늘어났지만 저 시스템을 그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정의 달인이셨습니다. 그래서 강 목사님은요 우리나라 교회의 행정에 아주 모범을 보이신 그런 어른이십니다. 그리고 행정력이 아주 뛰어나셨고요. 음악을 너무 잘하셔서 동요 300곡을 작곡도 하셨고요, 음악의 너무 깊은 경지에 들 만큼 음악적 제주도 있으셨습니다이분에 대해서는 뭐 에피소드가 많고요 저는 입교를 이분에게 받았고, 결혼 전에도 그랬고 그런데 이분이 기억력이 너무 뛰어나서 이제 문제예요교인들을 만나잖아요. 만나고 잠깐 인사하는 사이에 '야 너희 삼촌 회사가 이것이 어렵다는데 괜찮니? '이런 거 물어보는 그러면 이렇게 또 젊은이들 만나면 '야 다음 주일이 너희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야 잘 좀 챙겨드려' 그리고 기억력이 너무 뛰어나서 온 교인들의 족보를 가족사를 다 꿰고 계세요그러니까 이건 뭘 얘기하는거냐면 목사님과 교인들만의 즉 직선적인 그 컨넥션이 굉장히 좋았다는 거죠그리고 이분은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저희 할아버지도 그랬지만 남자 교인이 돌아가시면 강 목사님이 가셔서 염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돌아가시거나 여자 성도가 돌아가시면 사도님이 가셔서 염을하셨습니다그러니까 어느 집이나 다 강 목사님 내외가 염을 다했으니 여러분 우리 풍습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할아버지를 염해주신 목사님이야 그러면 이거 끔찍하잖아요그러니까 그런 아까 말씀드린 그 가족 사랑을 다 꿰고 있는 것처럼 목사님과 개인 간의 교인 간에 이 친근감이라는 것이 정말 끈적끈적했습니다그래서 이 목사님은 교회를 부흥시켰다기보다는 질적으로 질적이란 말이 죄송합니다만 하여튼 아주 업그레이드 한 교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살리는 그런 훈련을 했습니다.손동욱 판사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우리교회 안수집사님이 셨고 대법관까지 하신 분이에요그런데 재미있는 거예요. 툭 하고 사무실에 가시는 거예요변호사 사무실에 '손집사 차 한 잔 줘' 들어와서 그냥 차 한 잔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세상 사는 얘기하다가 '나 그냥 갑니다'  그러고 그냥 가신다는 것 입니다. 뭘 이야기하는 것 입니까?  교인들과 아주 친밀하게 교제를 잘 하셨다는 것이지요. 아주 멋있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통큰 목회를 하시면서도 새문안 교회의 교인들의 적극적인 이런 교인들의 모습이 상당히 우리 강 목사님때에  만들어졌다고 저는  얘기합니다정말 우리가 기억에 많이 남는 강 목사님이시고 우리 교회에서 정년을 하셨습니다.

1966년에 제4대 행정의 달인 강신명 목사님이 만드셨다는 교회 일람표.

아직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참 놀랍기도하고 박물관 같은 교회라는 인상이 너무 만히 든다. 

이제 제5대 김동익 목사님입니다. 강신명 목사님 때 하나 얘기를 해야 되는데 강 목사님 때 박정희 대통령 서거가 있었죠그러니까 우리 청년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새문안 교회가 굉장히 활발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10년 동안 우리 청년들 한 30명이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그런데 그때 강 목사님은 뒷받침을 다 하셨고, 김동익 목사님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우리청년 대학생의 민주화 운동에 뒷받침을 하셨습니다그리고 강 목사님은 당시 중앙정보부 중령이 와서 강 목사님한테 와서 목사님 소년들 좀 챙겨주세요그러면 막 혼내서 보내고 그랬습니다그리고 그때 기독 학생 운동의 새문안교회가 중심에 서죠그때 제 동생 서경석 목사가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드러날 뻔했는데 저는 마침 졸업할 때여서 저는 그렇게 끼지는 않았지만 같이 하는 그리고 김동익 목사님 시대에는 전두환 시대의 민주화 학생 운동을 뒷받침하겠습니다우리 김동익 목사님이 좀 특별하시는 것이 전두환 시대에 겁 없는 설교를 하셨습니다이렇게 표현하는데 5.18 사건 났을 때 한 석 달 뒤에 설교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냐면 '광주에서 500명 내지 1천 명의 시민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얘기하면 그냥 잡혀가게 되거든요. 그렇게 용기 있는 설교를 하시고 그래서 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닉네임을 얻을 만큼 설교의 힘이 있으셔서 김동익 목사님 시대에 교회 제직이 3천여명 모이고 교인이 6천 명이 되고요, 예산이 막 늘어나고 성가대가 늘어나고 장로 부목사들이 늘어나면서 교회가 무슨 사업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사역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교회가 사이즈가 커집니다그래서 이제 이때부터 새문안 교회가 좀 더 광범위한 사역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셨고, 이 예배당에 시드 머니를 마련하신 분이 김동익 목사님이십니다저희는 김동익 목사님이 인간적인 규모에 굉장히 애착하고 있고 그리고 온 교인들이 지금도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그분이 여기 있었던 게 199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때 나왔던 자료들입니다.

이제 제6대 이수영 목사님 시대는 잘 아시는 데는 장신대 교수 18년 하셨죠. 이수영 목사님은 아주 정직한 목회 저게 성경 중심의 설교 정직한 목회 아주 따뜻한 성품을 가지신 목사님으로 기억되고 이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 헌신하신 목사님은 그러셨습니다나는 교회 건축하러 간 거 아닌데 그렇게 처음에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교인들의 뜻을 받들어서 교회 건축에 올인하셨고, 교회 건축의 신학적인 밑바탕은 우리 목사님이 다 만들어 놓으셨고 착공하시고 거의 준공 때까지 목사님이 목회하셨습니다정년 은퇴하셨습니다.

제7대 이상학 목사님은 우리 교인들이 엔조이 하는게 있습니다왜냐하면 김동익 목사님은 굉장히 아주 다이나믹하게 설교하셨고,  이수영 목사님은 성경 본문 중심에 설교하셨거든요근데 이분은 생각하게 하는 설교를 하십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목사님들이 바뀔 때마다 교인들이 참 우리 좋은 목사님 모시고 훈련 참 잘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늘 감사하게 생각을 갖고 지금 4해수로는 5년째인데 목표를 어느 정도 아주 박력 있는 설교로 힘 있는 설교로 생각하게 하는 그런 설교를 해 주시는 목사님 이십니다.

새문안교회 안내 : 서원석 장로님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목사님과 새문안교회의 역사만 배운 것이 아니라 한국선교역사를 배웠습니다.

서원석 장로님은 존 로스, 메켄타이이어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우신

서상륜, 서경조 목사의 손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한국선교역사의 위인들의 후손을 통해 직접 선교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더 감회가 새롭습니다.

서원석 장로님 오랜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작 직강을 듣는 기분이 였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어른들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이렇게 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새문안 성도가 남긴 믿음의 유산, 당신도 남길 수 있는 믿음의 유산

나는 무슨 믿음의 유산을 이 땅에 남기고 갈 것인가?

새문안교회 135년 역사 가운데 담임목사, 위임목사별 시무기간들이 정리되어 있다.

오늘 이제 결론 같은 말씀인데 새문안교회 목사가 위임 목사가 일곱 분입니다. 135년의 역사 가운데 일곱 분의 목사님 그런데 당시에는 위임 목사라는 제도는 없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임시 목사가 중간에 잠깐 잠깐 계셨거든요.  정식으로 목사로 사역하신 분들은 모두 7분 이셨습니다.

1950년대 이전에 본당에서 사용한 피아노라고 한다.

나는 1977년 중학교 1학년 때에 처음으로 피아노라는 것을 보았다. 초등학교에서는 풍금만 보고 자랐다.

선교역사 여행에 함께하신 온누리 이천선교 믿음의 용사들, 우리 각 부서 팀장님들 감사합니다.

김태완 목사님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김병순 장로님, 남주언 장로님 고맙습니다.

특별히 서빙고의 조성현 대표장로님 함께 참여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또 어디로 가실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