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종교인의 반발 (롬3:1~8) 2022.06.26

다이나마이트2 2022. 6. 26. 19:18

종교인의 반발 (롬3: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로마서]가 알려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①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것이고,
②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③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이다.”는 것입니다.
④그 심판의 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가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저편에 있는 것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이지만, 단절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절]이 아니고, [연결]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영혼을 연결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판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합니다. 
 
인간은 “[역사]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탈락했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은 화살을 쏘았는데, 쏜 이후에 과녁을 화살이 떨어진 다른 곳에 놓고,
“화살이 잘못 갔다.”고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은 존재하셨고, 영원하신 그분이 살아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의로우신 성품이 바로 그 과녁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정당화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변명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 전적인 타락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복음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가난해지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입니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것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①하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②또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죄인입니다.
 
▶[어거스틴]은 [죄]와 관련하여, 인간을 네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습니다. 
①첫째는/ 타락 이전의 상태로서 죄가 없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죄 없이 지음을 받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상태가 가능한 것입니다.
 
②두 번째 상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바로 완전히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③세 번째 상태는 성령을 따라 행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 속에는 죄가 있지만, 죄를 선택하지 않고
의를 택함으로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④네 번째 상태는 이제 우리가 온전한 구원으로 영화롭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죄가 없고, 사망이 없는 나라에서 죄를 이제는 지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죄 가운데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구원]이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건너오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장 1절에서 8절의 말씀은 지난주 본문에 이어서,
자기 과신에 빠진 유대인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사실 [종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저는 “종교인의 반발”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모습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나 [은혜]를 “종교로 만들은 유대인들의 모습”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제목을 잡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에 빠질 때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나 [은혜]를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서] 서론에서, 모든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며,
스스로를 의롭게 하는 [죄]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했을 때,
틀림없이 반발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이 종교성을 가지고, 종교인의 마인드를 가지고,
“복음을 대적할 것”을 알고, 이에 대해서 반박하는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죠. 
사도 바울도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그러한 마인드와 사고방식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해 놓고, 대화해 가고 논쟁해가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바울]과 [그리스도인 바울]이 “서로 논쟁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으로 가졌던 마인드를 더듬어보면서
복음을 어떻게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화된 유대인들이 공격하는지 어떻게 반발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 바울이 거기에 대해서 대응하는 그런 구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논쟁의 세부적인 내용이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간략하게 한두 문장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 주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유대인들 종교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어떤 논리로 반발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한다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지난주 본문에 나타난 가르침을 더듬어 보면, [율법과 할례]를 잘 지키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철저하게 행하는 것으로, “인간은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한 [할례]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며, 
[진정한 유대인]은 “영적인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이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특권 속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고, 그들에게 놀라운 이 “구원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을 착각하여서,
자신의 [죄성]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방편으로 이것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종교인으로서 반발하며 제기한 논리들을 설명할 때,
바로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러한 논리적인 반발로 인간의 교묘한 수사로 복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직면해야 될 가장 중요한 진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그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인정하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