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드의 사랑이 가정을 살립니다 (호6: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하나님께서 ”가정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될 때에,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 알아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 일이 없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만이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약점과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가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 [고메]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는데,
그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지 않고 “아내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메]는 [호세아]를 배신할지라도, [호세아]는 [고메]를 포기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배반하는 인간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고 계속해서 호소합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 6장 1절~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찢으셨지만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다. 그가 때리셨지만 우리를 싸매주실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그가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3일째에 그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우리가 그 앞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호6:1-3)
[가정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가정의 회복]은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정에 임할 때, 가정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에 250번 정도 사용이 됐어요.
[영어 성경]에는 다양하게 이 [헤세드]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Love(사랑)라고 표현하지만, Lovingkindness, Unfailing Love(실패하지 않은 사랑), Steadfast Love(견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풍성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에는 그냥 [사랑]으로도 번역하지만, [인애]라고도 번역을 했습니다.
그 [사랑]은 ①무조건적인 사랑이고, ②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③변하지 않는 사랑이고, ④ 끊을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가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헤세드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세드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첫째로/ 허물과 죄를 은혜로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호세아 6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워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할까?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할까?
너희 인애는 아침 구름과 같고, 금방 사라지는 새벽이슬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고통스럽다고 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이 “아침에 있다가 쉽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사라지고 변질되는 그 사랑”을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랑이 고통스러울까 봐“, 사람들은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6장 3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알기 위해 전심전력하자. 그가 오시는 것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분명하다. 그는 마치 비처럼, 마치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호 6:3)
[여호와]는 새벽이 일정하게 오는 것처럼, 봄비가 일정하게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쉽게 없어지는 아침 이슬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새벽에 오는 비처럼 일정하시며,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변함없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처리하심으로,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에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까닭은 그 대상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며 사랑스럽지 않으면, 사랑이 사라져버리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 허물에 대하여 진노가 일어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매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살리는 것“은 이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 매일매일 새벽 비처럼 임하시는 이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십자가의 복음“이 임해야,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2)둘째로/ [헤세드의 사랑]은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가족 간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옳고 그름의 문제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차이]가 발견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모습]을 “나의 모습처럼 바꾸려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과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①우리 인간을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고, ②서로 다른 것을 기뻐하시고,
③서로 다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려고 합니다.
가족 간에 오래 살다 보면, “서로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먼저, 그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만약에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어려워집니다.
저와 제 아내도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①저는 공간이 잘 정돈된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아내는 정돈되지 않아도 불편하지가 않는 것 같아요.
②저는 차가 막히면, 느리게 가도 큰 길로 가는 걸 원하지만, 아내는 막히면 빨리, 좁은 길로 가는 걸 원하지요.
그래서 운전하다 보면, 실랑이가 벌어져요. 그것은 저는 좀 늦어도 큰 길로 계속 가길 원하고,
아내는 빨리 다른 길로 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③저는 마음이 힘들면, 말을 안 하고, 침묵을 오래 지속해야 되지만, 아내는 말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④제 아들의 방은 언제나 제 자리에 놓여 있는 법이 없어요.
외출한 뒤에 방에 가보면, 폭탄 맞은 분위기죠.
그러나 딸의 방은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고, 마치 새로 이사 온 집 같이 보입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할 때,
그게 바로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그 차이를 보며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것]에 불편해 하지만, 하나님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 이들이 모여 사는 “영적인 훈련장”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마음의 행복을 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①하나는/ [안정감]이고, ②또 다른 하나는 [중요함]이라고 합니다.
①먼저, [안정감]이란, 내가 사랑받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고,
②그 다음에 [중요함]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안에서“ 이 [안정감]과 [중요함]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이 두 가지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이 [안정감]과 [중요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통해서,
이 [헤세드의 사랑]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3)셋째로/ 이 [헤세드]는 ”언약에 신실하게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맺어진, 가장 심오한 언약 위에 세워진 조직입니다.
오직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언약을 맺을 수 있고, 언약을 지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부 간의 언약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할 때,
그것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때, 가장 자유로운 것이고, 그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 의한 [고메]를 다시 데려오고,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멜]이 신실하지 못했을지라도, [호세아]는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 때문에, “신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일방적으로 [헤세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2장 19절로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위해, 너와 영원히 혼약을 맺고, 내가 의로움과 정의로, 또 [인애]와 [긍휼]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진실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호2:19-20)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므로, 우리에게 헌신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배반하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죄의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행하지 못한, 인간의 모든 저주를 스스로 담당하심으로, 언약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혼약을 우리와 맺으셨습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고, 신실한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이 가정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가 [헨리 클라우드] 박사가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가장 좋은 곳을 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어요.
▶결국에,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보다, 다른 사람을 더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희생하고, 남에게 나눠주고, 내가 고통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랫동안 언약을 지키기 위해, 상처와 폭풍우를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런 [헤세드의 사랑]이 우리의 가정 속에 나타날 때, 가정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에게 빚진 인생 (롬1:8~15) 2022.05.22 (0) | 2022.05.22 |
---|---|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롬1:1~7) 2022.05.15 (0) | 2022.05.15 |
상처가 축복이 되는 가정 (룻4:9-17) 2022.04.30 (0) | 2022.05.01 |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시16:1-11) 2022.04.24 (0) | 2022.04.24 |
예수 부활, 우리의 소망 (벧전1:3~9) 2022.04.17 (0) | 2022.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