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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선포된 유대사람의 왕 (요19:14-22) 고난주간

다이나마이트2 2022. 4. 14. 13:41

십자가에서 선포된 유대사람의 왕 (요19:14-2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불법적으로 재판에 넘겨지시고, 또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시고, 십자가로 넘겨지셨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빌라도]의 고민을 보았고, 또 비겁함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세 번씩이나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세속적인 탐욕으로 그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자신의 양심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존귀함]과 그분의 [위엄]으로,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빌라도의 양심]이 깨어났고,
그 양심이 그를 괴롭혀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비겁함]”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그 빌라도의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를 압박한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도 있지만, 결국 이런 결정을 내린 결정권자가 빌라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록된 세계 역사를 보면, 결국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역사의 증인]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사람들의 죄악”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들의 죄악 속에서 “우리 자신의 죄악”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 마음속에 ①가룟 유다의 [탐욕]이 있다면, ②빌라도의 [비겁함]이 있다면, 
③로마 병정들의 그런 [저속함]이 있다면, 그것이 지금 예수님이 오셨어도,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지한 자들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십자가]는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나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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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넘겨지신 이후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까지의 과정은 고통의 과정이고,
조롱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실 [육신의 고통]도 어렵겠지만,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멸시와 조롱]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이고,
그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의 형]이 언도 된 이후부터, 십자가에 매달려 계셔서 돌아가시기까지,
수많은 인간들의 조롱이 퍼부어집니다.
 
그것은 ①대제사장을 비롯하여, ②그 백성들, ③그리고 로마 군병들 ④심지어는 함께 못 박힌 죄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롱이 예수님께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그 조롱들이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 [아이러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도하지 않고 한 말들인데, ”실제로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라는 사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성 밖에 매달아 놓은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리게 되고, 또 자신이 영광을 누리려고 왕복을 입고, 왕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받으려고
프로그램을 자신이 짜놨는데, ”그것을 [모르드개]가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조롱의 과정] 속에서, 이런 비극적인 사건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아이러니]”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아이러니]를 살펴보겠습니다.
(1)첫 번째 [아이러니]는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던 예수님은 “실제로 왕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도가 십자가에 넘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형을 받는 죄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원래 처형을 당하는 [죄수]는 비참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당당하고, 떳떳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명패]를 붙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유대 사람의 왕, 예수”라고 쓰여 진
[죄의 패]를 붙였습니다.
 
19절- 20절에, “빌라도는 명패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그 명패에는 [유대 사람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 예루살렘 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또 그 명패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각각 쓰였기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들이 이 명패를 읽었습니다.”(요 19-19-20)
 
이 [명패]는 “그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인데, 그 당시에 통용되는 언어가 세 가지이기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거기에 [빌라도]가 “유대 사람의 왕, 예수”라고 쓰도록 지시했는데, 대제사장이 항의하여,
“자칭,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써 달라.“고 요청했지만, [빌라도]가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이 정말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쓰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칭]이라고 써 달라”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자칭]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한 사람의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민족 전체가 수치를 받게 되는 것”을 노렸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왜, 거절했을까요? 
[빌라도]는 그 명패를 통하여, “유대민족 전체를 모욕하고 싶었던 것”이고, 더 큰 수치를 주려고 했던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민족 전체]가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는 민족으로 보여주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었고, 그분은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결국에 ”그분이 왕이셨다.“는 것이 이 세상 속에 [공인된 사건]이 되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아이러니]입니다. 
 
(2)두 번째 [아이러니]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유대 지도자들과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조롱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 27장 41절- 43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어디 한 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어주겠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말했습니다.”(마 27-41-43
 
여기서 두 번째 [아이러니]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받았던 내용입니다.
예수님 ”진정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었다.“는 겁니다.
 
▶왜, 이런 [조롱]이 있었습니까?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메시아가 어떻게 남을 구원할 수 있느냐?” 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그렇게 소리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들의 조롱은 [아이러니]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죽음”으로써, 모든 일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만약에 그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우리들 모두의 구원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없어서 내려오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서,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입니다.
 
(3)세 번째 [아이러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절교하셨던 예수님께서
“진정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엘리 엘리 라바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입니다.
 
사람들은 이 [절교하는 소리]를 “마치 엘리야를 부르는 줄 알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쩌면 이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까?”를 믿고, 기대했지만,
그러나 아무런 표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이 [고백]은 한탄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이런 [탄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동안 아버지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모든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될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지옥이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아이러니]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이런 [아이러니]를 만들어냈다면,
우리의 삶 속에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오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백하고, 다가가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믿는 이들을 향하여, 쏟아내는 모든 조롱이 결국은 아이러니로 드러날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굳게 믿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조롱과 멸시를 받더라도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