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권한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 (요19:1-1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 본문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심문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는
①예수님을 체포한 군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예수님을 끌고 가고,
②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넘겼으며,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모두 함께 공모했다.”는 증거입니다.
③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에 대해 깊은 조사나 어떤 신문도 없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바로 넘깁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어떤 판단이 내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사해 본 이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결정을 내려놓고,
“그 시나리오 대로, 끌고 다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넘겨졌을 때, 총독은 예수님의 재판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힘들게 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은 한 밤중에 시작하여 새벽에 이르기까지, 서둘러서 자신을 압박하는 걸 보면,
[빌라도의 눈]에도 “유대 지도자들이 무엇인가, 어두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서투른 정치로, 소유와 폭동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자신이 그런 재판에 빠져들면 안 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8장 31절에서, 빌라도는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너희들의 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말하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유대 지도자은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압박을 합니다.
그것은 ”유대 법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로마가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로마는 어느 나라와 민족을 지배하더라도, 철저한 로마법을 준수하도록 했기 때문에,
넓은 영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빌라도]는 이미 유대지도자들의 악한 음모를 미리 알았고,
또 ”예수님을 시기함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심문할 때에, 사실은 적절한 시간이 아니었고, 밤중에 이리저리 끌고 와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모습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 뒤에, 유월절 관례에 따라
유대 총독이 죄수 한 명을 사면해 주는 그런 관례가 있었는데, ”풀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러려면 차라리 [바나바]를 풀어주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어요.
이것은 빌라도의 [고육직책]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타협안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빌라도]는 채찍질 하였으니, ”이제는 놓아주자“고 무죄를 공언했습니다.
사실로, 예수님의 [죄]는 사형에 언도될 만한 [죄]는 아니니까, 그냥 채찍질이나 해서, 풀어주려고 생각한 겁니다.
19장 4절을 보면,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들었고, 증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빌라도]도 로마법에 의하면, ”죽일 만한 죄가 아니므로, 더욱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두려움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스스로 느낀 거죠.
빌라도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품위와 그 존엄“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으며,
빌라도는 ”예수님의 그 [평안함]“을 보면서, 당황했던 것입니다.
보통 그 정도의 채찍질을 당하게 되면, 누구나 두려워서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텐데,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서 [빌라도]는 두려움이 생겼을 것입니다
11절에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내가 나를 해칠 아무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내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요 19:11)
여기서 예수님은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한과 권위”를 강조하셨는데,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 당시에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이 분립되지 않아서, 그냥 총독이 마음대로 하는 시대였기에, 총독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빌라도]가 결정하고, 풀어 줘도 되는 상황입니다.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의 압력에 굴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겁함]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에 [빌라도]라는 사람은 ”사실 총독이라는 위치에 오를 만한 그런 인물“은 아닙니다.
그가 총독에 오른 것은 황제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인이 아니지만, ”황제의 친족이라“는 배경으로 총독에 올랐지만, 여러 실수가 있어서,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았으므로, 그것을 압력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양심과 정치적인 압력 앞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거예요.
평소에 양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라면, 바로 석방해도 되는데, [빌라도]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고민하게 된 이유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증거가 나타납니다.
18장 36-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대화를 하는 중에 의미 있는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유대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지금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요 18-36-37)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까, 로마 황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빌라도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왔고, 그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고 말하고,
자신은 ”진리를 전하는 왕”이라고, 설명합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너무나 극적으로 대조됩니다.
①먼저 [빌라도]총독은 비겁함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와 입지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고,
②[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진리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대조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오를 수 없는 위치에 올라와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내려오실 필요가 없는데, 스스로 내려오신 모습이 비교가 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는 최고의 지도자이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분과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결국에 [빌라도]의 ”비겁한 선택“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넘겨집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거는 아닌데“라고 생각이 드시면, ”그것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살아야 하고, 그것이 ”인생의 나침판“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도의 재판으로,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분은 죽임 당하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빌라도의 길]이 아니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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