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자를 전도자로 부르시다 (갈1:13~24) 말씀: 이재훈 목사님
복음은 사람에게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으로 이탈한 이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을 책망하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을 길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보이지만,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
또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순전한 복음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권위라는 것”을 설명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질타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확신은 “담대한 선언”이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타적이면 안 되지만, 진리는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수에도 1 + 1= 2 이지만, 그 이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왜 자꾸 흔들립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런 복음의 확신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자꾸 흔들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계 안에서도 복음을 왜곡시키고, 좌경화 된 신앙으로 복음을 섞으려는 무리들이 일부 있기에,
그런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서를 통하여,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연계시켜 알 수 있습니다.
▶ 바울은 이런 진리를 어디서 배웠을까요?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혹시나 “그 당시의 사상을 종합한 것은 아닌지?“, ”어떤 랍비에게서 배운 것은 아닌지?“를 사람들은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지혜도 아니고, 나의 경험도 아니고, 나의 사상도 아니라,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며,
바울은 그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복음 이외의 것을 전하는 이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바울이 받은 이 계시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에 대해 바울을 공격했지만,
“결국은 역사적으로 바울의 주장이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자신감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요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왜곡시키고, 동성애를 합법화 하고,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합리화 하기 위해,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그것은 확실히 다른 복음 입니다.
그런 것들은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확실히 ”바울이 인정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말씀에서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는,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황과
②둘째로, 바울 자신이 회심 할 때의 상황과
③셋째로, 자신이 회심 이후의 상황으로 나누어, 자서전을 쓰는 심정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그러면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황”은
자신이 유대교에 있을 때의 상황을 잘못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의 잘못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자신 있게 확실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안티 기독교의 원조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대 제사장에게 기획하고, 결재를 받아낸 사람이 바울, 자신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고,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결국에는 흩어졌지만, 흩어진 성도들을 잡기위해 다메쎅으로 가던 길에,
회심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지나친 열심히,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악한 모습인지?“를 자기 자신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교회에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택한 것은 그의 해박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른 것은 ”그가 완고한 복음의 박해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박해자도 ”복음에서는 선택하여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를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갈라디아서 1장 23-24절을 보면,
“다만 그들은 전에 우리를 핍박하던 사람이 지금은 전에 그가 파괴하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나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갈1:23~24)
이 말씀은 박해자를 전도자로 변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말씀입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기풍이라는 사람은 가난한 농민으로, 선교사를 향하여 돌을 던졌던 사람이지만,
어느 날 그에게 주님이 꿈에 나타나, “기풍아, 네가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움직이지 않다가,
그 후에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게 되어, 1907년에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사도바울이 되었습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할 때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3-16절에, “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한 행위에 관해, 여러분이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핍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내 안에 나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갈1:13~16)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부르셔서, 이미 ”내 안에 나타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다메쎅으로 가는 길에, 체험이후에 또 다른 체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날 때의 음성으로 바울이 꺼꾸러졌지만,
그 이후에 그가 홀로 예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바울 안에서 나타나, 깨닫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 안에 주님이 임재해서, 복음을 깨닫게 만들었고, ”이제는 복음을 전하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나타나서, “주님이 임재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바울 안에 거하면 거할수록”, 더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것과 같이, 초기에는 그가 박해자였지만,
후반부에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 중에 괴수”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놀랍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내가 잘 난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백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 바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임재로, “복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세 번째로, 바울은 회심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 이하에, ”회심 이후에 어느 곳에서 보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된 사람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고, 나는 곧장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뒤에나 게바(베드로)를 만났고, 그와 15일을 지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15일 이라”는 것은 “내가 베드로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내가 말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3년 동안에 조용히 칩거하면서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시간이고, ”복음을 전하는 준비기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혹시나 ”너무 쉽게 오염시키고 있지는 않은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가졌던 열정을 이해하고,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볼 때,
이런 것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바울처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고,
”스스로 다른 복음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진리로 받아들이고,
우리에게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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