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상처 준 가족을 용서하기 (창45:1~8) 2021.05.23

다이나마이트2 2021. 5. 23. 19:14

상처 준 가족을 용서하기 (창45: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 중에서 대부분은 ”가족 간에 일어난 상처“입니다.

행복해야 하는 가정에서 이런 끔찍한 일들이 경험하면, 아주 오래갑니다.

그런 상처는 대대로 자손에게 이어져서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오래전에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인데, 아들이 집을 나가서 아버지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문에, ”사랑하는 아들, 파코, 내일 정오에 신문사 앞에서 만나자.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광고를 냈는데, 그 다음 날 정오에 ”800명의 파코가 그 자리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파코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여 알아보았더니, 스페인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으로,

푸렌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부르는 애칭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아들이 “집을 나와 방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처를 가진 성경의 인물가운데 요셉이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요셉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예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형들의 악행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팔려가 감옥살이 까지 했는데, 그가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 대가는 너무도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홀로 이방 땅에서 살면서, 가진 고난을 겪었고, 최후에 총리가 되었지만,

그 상처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 안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이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는 너무도 큰 것이지만,

이제는 이집트 총리로 형제들이 양식을 얻으려고 자기 앞에 왔으니, 너무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이집트 총리가 된 것이 아니고, “형제들을 용서하는 사건”입니다.

 

요셉은 “히브리 노예의 성공 미담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복수가 아니고,

사랑으로 형들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을 보더라도 총리가 된 것은 몇 줄로 간단히 기록되었지만,

가족을 만나는 장면은 아주 길게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셉의 도전이 말해 주는 것은 그 대상이 자기에게 깊은 상처를 준 가족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용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용서를 배우고, 본을 받으며 치유를 받고, 회복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셉의 용서에서 ”용서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요셉이 용서한 능력“이 곧 복음입니다.

 

▶요셉의 용서에서 배우는 용서는 무엇입니까?

(1) 첫째로, 용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여행과 같아서, 상처가 깊을수록 더 여행도 길어집니다.

사소한 말다툼은 쉽게 해결되지만, 심각한 상처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용서를 손쉽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용서가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형들을 빼고, 아버지만 용서해 줄까?“도 고민했을 것이지만,

요셉을 그리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형들을 대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마자 알아 차렸지만, ”처음에는 모른 척“ 했습니다.

①처음에는 정탐꾼으로 몰아가면서, ”정탐꾼이 아니라면,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했어요.

그것은 또 다시 기근이 심해지니까, 다시 올수 밖에 없었고,

그 때에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 오려고 의도했던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형들을 도둑으로 몰아세우면서, 베냐민이 남아 있도록 요구합니다.

 

▶요셉은 왜, 이런 시험을 했을까요?

요셉은 자신을 시험하이기도 했겠지만, 형들의 마음을 떠 보고,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베냐민이 남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유다가 나서서 ”자기가 대신 남겠다.“고 제안하니,

이것은 ”내가 동생을 위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을 한 것입니다.

 

▶유다가 누구입니까?

구덩이에서 죽이지 말고, ”종으로 팔자”고 제안한 인물입니다.

 

이때 요셉은 그동안 고민하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셉은 바로 그때, “바로 이때가 용서의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것이 “은혜의 마중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강팎한 유다의 마음에 “빛을 비쳐준 것”입니다.

 

그것이 그나마 은혜의 샘물이 터지도록 마중물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한 선물”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용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지나치게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오래 기다려도 안 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분노가 자신을 사로잡아 그 자체가 굳어져서,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미움을 품는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미움 그 자체”가 됩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때는 하나님이 허락하는 때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 때는 누가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 때는 오직 상처를 입은 그 자신이 그 때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용서는 의무가 아니고, 선물”입니다.

요셉은 의무감에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형들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라고 지난 세월동안 왜, 분노가 없었을까요?

분노가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지만, 그 마음속의 분노를 자신이 새기면서, 결국은 자신이 해결한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받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용서한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나간 아들은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나갔어요.

아들이 따나가고, 아버지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할 수 밖에 없었고, ”아들을 용서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고,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아들을 용서할 수는 있기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아버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아들을 용서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몇 번을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용서해 주므로, 포로 된 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의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빚을 탕감하는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는 갚기 쉬운 돈이 아니지만,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을 받았는데도 왜, 갚을 수 있는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용서를 체험하는 길이 누군가를 용서해 주므로, 우리도 그것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향한 용서는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는 복음의 능력을 더 크게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악행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악행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복수할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 자신이 용서를 선택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께 복수의 권리를 맡기고,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45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요셉입니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 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창45:4~5)

 

요셉은 과거의 구덩이 사건을 원망하지 않고,“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건, 원망이나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게, 요셉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사건을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나님 사건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요셉을 훌륭하게 미래를 준비하게 만듭니다.

이게 요셉의 믿음입니다.

 

요셉이 바라 본 것은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족 간의 상처와 분노를 용서를 통해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교훈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고통을 잊어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상처를 오직 용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처를 준 가족에 대한 은혜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