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가스펠 프로젝트[11] 잃어버린 자에서 되찾은 자로 (눅19:1~10)

다이나마이트2 2020. 8. 16. 13:18

가스펠 프로젝트[11] 잃어버린 자에서 되찾은 자로 (눅19:1~1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들은 요즘 “가정이 교회다”라는 마음으로, [가정예배]를 정착시키고, 자녀들에게

“너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정이 교회가 될 때에 자녀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관찰하고,

그런 가정이 되기를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잘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늘 말씀인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잃어버린 상태”로 보고 있으며,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언제나 [허전한 공허]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많이 성취한 사람일지라도 본래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면,

“잃어버린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잃어버린 자“가 됩니다.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불법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가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고,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직업으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사람이고, 그런 세리중의 “우두머리”입니다.

 

[세리장]은 로마 제국에게 리베이트를 받치는 역할을 했으니, 사람들은 악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상대하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속된 말로 [세리]는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 받았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하다.”는 뜻인데, 그 이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말씀에 4-5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는 예수를 잘 보기 위해, 먼저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로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셨을 때, 위를 올려다보며,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묵어야겠다.’” (눅19:4~5)

 

그 당시에 [여리고]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중심지이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예수를 보기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중년남성으로, 사회적인 신분이 있는 높은 공직자로써,

“어린 아이처럼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상황이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는 “[갈망]이 있었기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를 나무에 올라가게 만들었을까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이 있었기에, 나무에 올라가기로 작정한 거예요.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않았고,

그는 오로지 예수님을 보려는 욕망에 집중했기에,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지요.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자신의 모습은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함]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에, 그를 나무위로 올라가게 만든 것입니다.

 

▶그 때에, [삭개오]의 심리 상태는 어땠을까요?

아마도 [삭개오]는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에는 위기상황이다”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은 허전하고 곤비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비난받는 것에 대한 [공허함]을 밤마다 느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는 체면을 불구하고,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자기를 바라보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라는 긴급한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삭개오]는 나무에 숨어서 예수님을 살짝 보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을 거예요.

 

5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깜짝 놀라는 얘기를 하십니다.

“예수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 위를 올려다보며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묵어야 겠다”(눅19:5)

 

[삭개오]는 “예수님을 찾는 자”[= 구도자]의 심정입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이 먼저 그를 찾아 주었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더 나아가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남의 집에서 머물지 않았으니까, 예수님이 놀라운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멀리서 그냥 보려고 하였지, [초청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에도, 언제나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너의 잃어버려진 인생을 다시 찾아 주기 위해, “내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 오셨어요.

 

우리들도 내가 선택하여 교회로 찾아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움직였기 때문에, 내가 교회로 오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말씀에서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죄를 묻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런 질책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방만하게 살았던 삭개오의 “탐욕적인 삶”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고,

오히려 “내가 너의 친구가 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삭개오야, 너의 잘못을 회개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용서하고,

너의 집에 머물 것이다.”라고 말하길 바라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일체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그런 비난받아 마땅한 [삭개오]를 일방적으로 품어주셨고,

“그와 친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상태]를 잘 알고 계셨으므로,

예수님의 “어서 내려오라”는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무슨 뜻이 있나요?

그 [부르심]은 “나무에서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세속에서 내려오라“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비난합니다.

 

7절 말씀을 보면, “그런데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습니다.”(눅19:7)

 

여기서 [친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아무 집에나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친구가 되어야 함께 머물지, 아무데서나 잠자리를 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친구가 된다.”고 비난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삭개오]에게, 오히려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모두 읽고 있었고,

그의 “영적인 위기감”과 그의 “가난한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어요.

 

그런 상황에서 8절 말씀에서 기적 같은 말을 [삭개오]가 하게 됩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삭개오는 서서 주께 말했습니다.

‘주여, 보십시오. 제 소유물의 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군가를 속여 얻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눅19:8)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회개하며, 자신의 삶을 단절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각오로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이런 고백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자기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전혀 강요하지 않았으나, 그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회개했어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추구하던 인생의 목표인 [돈]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부정한 관계를 부인하고,

스스로 회개하여, 자진해서 예수님에게 고백을 했어요.

 

▶여기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첫째로, 자신을 [죄인]으로 스스로 인정했고,

②둘째로, 자신의 우상인 “돈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고,

③셋째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시 소유물의 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고,

속여서 얻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구약에 [속건제]는 “관계회복의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가치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돈으로 치루는 제사 이니까, 그 [가치]가 중요해요.

 

[삭개오]는 원칙적으로 원금 + 20% [= 1/5]을 갚으면 되는데도,

자기가 법이 정한 1/5에서 더 갚아야 하는 것,

 

그 이상으로 “4배나 더 갚겠다.”고 고백을 하므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포기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는, 여리고 거리의 [늑대]에서, 여리고 [어린 양]으로 변한 거예요.

 

이것이 유대지방의 여리고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죄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 유대인의 눈으로는 변할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런 기적이 일어났으니,

현대를 사는 [삭개오]와 같은 나에게 나타나서, 그런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서, 다시 회개하게 만들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구원받는 영혼으로 되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늑대]가 [어린 양]으로 변화되는 기적이 나타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