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섭리하는 분이 우연히 찾아 오신다. (룻2:1~4, 스7:7~1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사이를 갈라놓고, 헛된 이론과 이념으로 혼란시킵니다.
그래서 사탄은 자꾸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나같이 사소해 보이는 나의 세세한 문제 까지도 살피시고,
일일이 간섭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질서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완벽하게 보존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온전한 진리]이기에, 우리의 모든 삶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부분에서는 적용이 되고, 또 어떤 부분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이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느 한쪽의 단면만을 보고,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념]입니다.
[창조신앙]과 [섭리신앙]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창조]는 믿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다면, 그것은 [가짜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십자가]는 믿는데,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나는 [부활]은 믿지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다면, 성경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육신]은 믿는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영역이든 [진리] 속에서는 서로 연결 되어야 하고, 모두 다 같아야 합니다.
어제 살펴 본 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법칙대로 움직이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타락한 질서의 이면에는 반드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있고,
그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를 [인간]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구원 없이 절대로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런 [섭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라고 하거나, [운이 좋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일이 잘 되면 [행운]이고, 일이 잘 안되면, [불운]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운]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운]이 ”우연히“ 발생했고, ”우연히 세상이 만들어 졌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의 이면에는 무수한 선택이 있었는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세상이 ”우연으로” 이루어졌다면, [인간의 선택]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역사가 발전하는 것인데,
그러나 좋은 선택을 망가뜨리는 세력이 [사탄]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 [영적인 전쟁]의 실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고,
승자가 되신 [하나님]안에서 선택할 때, 우리의 선택은 불완전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선택]을 하나의 [디딤돌]로 삼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다 알고, 행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연]처럼 보이고, [우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담겨있는 작은 감정의 문제도 하나님은 아시고, 역사하시고 [섭리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섭리에 대한 신앙]이 무너지면, 내가 받아드리기 어려워집니다.
나는 내가 처한 고난이 [불행]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런 불행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지 못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십자수]를 하면, 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아래에서 보면, 질서가 없지만, 뒷면에서는
“엉망진창의 [그림]”과 같지만, 어느 순간에 뒤집어서 보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도 [땅]에서 [하늘]을 보기 때문에, “하늘의 그림“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셉이 미움을 받아 팔려가는 것도 나중에 보면,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때서야 하나님이 도우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당장은 모르고, 뒤돌아보면, 그 때에 해석이 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연]인 경우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절대로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에게 베푸셨던 은혜입니다.
삶에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잘 살기 위해, 모압으로 이민을 가는데,
두 자부만 남습니다. 한 자부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다른 이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오는 여정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룻기]는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맞물려가는 역사를 나타냅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어요.
나오미는 남편과 자녀들을 잃고 빈털터리가 됐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았어요.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은혜]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은 “노력만으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성, 재력,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난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고, 풀 수 있는 문제보다,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더 많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모 잃어 버렸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지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때가 어쩌면 그때인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이방 여인인 모합 여인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보통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룻]을 보는 [보아스]가 [룻]을 주목하게 되면서,
[고엘]이라는 제도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고엘]제도
(그녀와 가문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제도) 때문에,
사랑과 아픔을 선택하는 [보아스]의 선택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녀는 ”이삭을 줍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내가 줍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어 갑니다. 그러니까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연히도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간 것이 그 사람을 꼭 만나기 위해 간 것이 아닌데, ”우연히“도 그를 만났어요.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간 곳이 ”보아스의 밭”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연]이 나오는데, 바로 그 때에 “보아스가 밭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게 서로 [우연]일까요?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 예요.
노사연의 [만남]같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보아스]의 태도를 보면, 아주 관대하고, 친절합니다.
[룻]의 겸손한 모습과 성실한 자세를 보면서 [보아스]가 감동하여 [룻]에게 아주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때부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그 [때와 장소]를 ”하나님이 [섭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계시지만, 스토리를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
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 있으면, [우연]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쓰임 받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지, [우연]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무지 때문에,
모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에 작동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연]을 탓하거나, 기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운]에 [운명]을 걸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운]이 아니고, [성실]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선택“을 할 때, 나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으로 선택을 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전의 드라마”를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에스더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 당할 때,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심정으로 선택을 하였고, 유대민족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자기의 안락을 선택하지 않고, [생명]을 내 던지는 심정으로 다가 갔기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에스더 6장 1-3절 말씀을 읽으면, 그날 밤에 왕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나이가 들어 불면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잠이 오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자신의 [통치기록]을 가져다가 읽었는데,
거기서 자기를 살려 준 모르드개의 기록을 보면서, 왕이 깨달은 것은 포상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모르드개를 축복하고, 상을 내려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의 ”반전 드라마“입니다. 우리도 잠이 오지 않으면, [성경]을 꺼내서 읽으십시오.
여기 왕은 [역대기]를 읽었지만, 우리는 [역대상하권]을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하만]이라는 신하에게 왕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물으니까,
[하만]은 악한 사람으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이상한 대답을 내 놓습니다.
▶그럼 [하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사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 시대에, 총리대신을 지낸 사람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므로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다.” 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심히 분노하여 모든 유대인들을 멸하려고 계획 했으나, 결국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높은 나무에 결국 자기 자신이 매달려 죽게 됩니다.
▶왜, [악인]은 멸망합니까?
[악인]은 지혜가 없어서 [속임수]를 씁니다. 그 속임수로 사람을 속이려고 합니다.
[악인]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진짜를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지혜]는 순결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거기 기록에 왕을 살려줬는데 포상이 없었어요.
왕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고, [모르드개]는 섭섭한 마음을 묻어두고 지나갔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하만]에게 폭탄이 되어 떨어지게 되었어요.
[악인]은 항상 착각을 하므로, [하만]은 [모르드개]가 말을 끌고 가면서 거리에서 외치게 합니다.
그런데 왕이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태우고, 너가 말을 끌라.”고 갑자기 명령을 내립니다.
이 얼마나 멋진 “반전의 드라마”입니까?
그러고 나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나무에 [하만]이 매달려 대신 죽게 됩니다.
이것은 [모르드개]의 우직한 선택과 에스더의 충성스런 선택으로 [반전]된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망하지만, [악]을 [선]으로 갚으면,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응대해 주십니다.
▶우리도 내가 남에게 복수할 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복수]나 [앙갚음]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나는 그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하도록 지나가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롬8:2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섭리]에 사용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운]을 기대하고 있지만,
선한 지혜를 선택함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룩할 수 있도록,
내가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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