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예수 40일 특새26 2020.01.09

다이나마이트2 2020. 1. 9. 23:10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작은 나를 아신다. (사40:25~31 시139: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과 내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삶을 일일이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뿐만 아니라, 한 나라와 민족을 섭리하시고, 한 가정의 문제나,

개개인의 지극히 작은 [] 까지도, 일일이 섭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아주 작은 나를 아신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아신다.“는 것은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정보로써의 앎]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는 한 문장 속에는 우리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만물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통치][돌보심]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섭리]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교리적으로 체계화 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명확히 나타나는데,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사람이며, 하나님이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 시간이 수백 년이나 걸렸지만,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주제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과 그 이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에 대하여,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섭리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입니다.

 

섭리하는 하나님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상][이신론](=자연신론)인데,

이들은 자연은 자연적인 질서대로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또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상이 [범신론]인데, 모든 우상 숭배의 기원이 [범신론]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큰 나무에 절하고, 바다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범신론]에서 시작합니다.

이들은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서 인간이 자연 자체를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이런 [이신론][범신론]은 세상의 흐름 속에 살면서 과학과 공존하는 것을 감안하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나타냅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언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예언의 역사 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직후의 일]도 예언하지만, 장차 일어나는 [미래의 일]도 예언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예언]을 말하지만, 우리가 예언 하는 것은 나의 계획이고, “”나의 일에 국한하는 것이고,

내가 죽은 이후에 관해서는 전혀 예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분이기 때문에, [미래의 일]도 예언하십니다.

 

성경에서 [출애굽]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언]을 통해,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인간의 []로 말미암아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깊이 관여하시고,

하나님은 다 아시고,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잘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도 설교를 들으며 [띤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혹시 하나님은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어떻게 그걸 아느냐?”라고 의심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건 본인의 착각입니다.

 

[하나님]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우주를 탐구하지만, 만물의 이치와 질서를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그런 가운데서 []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실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를 바라보십시오. []1초에 ”30만 키로를 간다.”고 합니다.

한 줄기 []지구를 7번을 돈다.“고 하니까, 그 빛의 속도로 태양까지 간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먼 거리인데, 가장 빠른 제트기로 갈 때, ”17년 동안 24시간을 쉬지 않고 가도, 다 갈수 없다는 거리라고 합니다.

또 태양의 온도는 엄청나게 높은 온도인데, 우리에게는 그저 따뜻하게 느껴지니,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이런 일과 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고 고백하니,

이 또한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얀 A4 용지에 새까만 []을 하나를 그리고, 그 종이를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을 때,

여러분은 뭐가 보이십니까?“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새까만 점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 새까만 []만 보이십니까?”라고 다시 물으면, 여러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그것은 전체(= 커다란 흰 종이)는 보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인 작은 []만 보는 게 우리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전체]는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며, “그것이 옳다고 우기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리의 어리석음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종이]는 보지 못하고, [작은 점]만 보는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이게, 우리 인생의 [시각]입니다. 크고 많은 [전체]는 보지 못하고,

아주 적은 [일부]만을 보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마틴 루터]의 인생 가운데서도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 개혁에 앞장서서 일하다가 어려워서 탈진했을 때, 아내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어요.

그래서 누가 죽었느냐?“고 물으니까, ”당신의 하나님이 죽었어요.‘라고 대답했어요.

루터가 깜짝 놀라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냐?”고 물으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이 좌절하고 누워 있을 수 없지 않느냐?”라고 대답하니까,

루터가 벌떡 일어나서 강력한 소명 앞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가장 낙심할 때 일수록,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까울 때입니다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후에, 루터는 아내와 함께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나의 삶의 문제를 잘 모르고 지냅니다.

나를 돌보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하고 지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 계시기에, “언제나 나를 돌보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나를 언제나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25-26절 말씀에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와 견주겠는가? 누가 나와 같겠느냐? 거룩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눈을 높이 들어 위를 쳐다보라.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했느냐?

그분은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것들을 각각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의 능력은 크시고, 힘은 강하시니, 하나도 빠지지 않고 부르신다.“(40:25~26)

 

하나님은 수많은 별들을 다 각각의 이름대로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내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나의 모든 삶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니까,

결국은 나를 주관한다.“는 뜻입니다.

 

[인류학]에서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도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며 삽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고 보면 [범신론]에 빠지게 되지만, 수많은 별들을 이름대로 부르시는 분이

어찌 우리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이사야 402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야곱아, 네가 왜 이렇게 말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져 있고, 내 공의는 하나님이 무시하신다.’하느냐?”(40:27)

 

[이사야]는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깨우쳐줍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두 번 부릅니다.


왜 이렇게 똑 같은 사람을 두 번씩 이름을 부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대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상처와

오해가 있는 것을 본 [이사야] 선지자의 애절하고 가슴 아픈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굉장히 그럴듯한 말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입을 다물 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도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그런 심판이 온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형편까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신론자]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작은 부분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고 보면 [범신론]에 빠지게 되지만,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이름대로 부르시는 분이 어찌 우리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리 스몰린] 교수는 다음 같이 주장합니다.

별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 속의 서로 다른 힘들 사이에서 몇 가지 정밀한 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밀한 균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힘들이 얼마만큼 강하게 작용할지 제어하는 변수들이

정교하게 조율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다이얼이 다른 방향으로 조금만 돌아가도 별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우주는 붕괴될 것입니다.”- lee Smolin -

 

▶왜, 우리에게 [힘]이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믿음]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그런 [믿음] 속에서 우리는 []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의 새로운 []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새 힘]을 얻는 것을 창공으로 올라가는 [독수리]로 비유했습니다.

[독수리]는 폭풍 속에서도 기회를 삼고, “더 높이 [비상]한다고 이미 설명했어요.

 

그렇게 높이 나는 [독수리][]과 싸우지 않습니다.

[]독수리 발을 쪼아도 독수리는 까딱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크고 위대한 독수리이기에, 닭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체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독수리가 창공을 올라갈 수 있습니까?

묵직한 두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독수리와 같이, []을 얻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음소리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을 눈을 떠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묵상]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려고 하면 더 안 됩니다. 그냥 느껴지지도 않고, 졸리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마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생기면 []이 많아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면,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서 [맥박]이 뛰고, [흥분]이 일어납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이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걸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왜 이제껏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 [관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만든 예수, 내가 생각하는 예수를 [예수님]“라고 잘못 생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만 보지 말고, 넓은 [종이][전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의 상처도 아시고, 미래를 예측하시는 분이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