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새 일을 행하리라 (시43:16-21) 말씀: 이상준 목사님
2019년 한 해 동안 많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3편 16-17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거센 물결 가운데 길을 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병거와 말과 군대와 용사를 모두 이끌어 내어, 그곳에서 쓰러뜨리셔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불이 꺼진 심지처럼 사그라지게 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사 43:16-17)
[능력]은 [관계]가 성립된 다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결을 갈라놓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머물기 위해, 40일 새벽기도회를 갖고 모입니다.
세상에 어느 다른 신이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에, 어떤 아이가 ”아저씨 이 과자를 사 주세요.“ 라고 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누구나 ”너의 엄마는 어디 계시니?“라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이 무엇을 요구한다면, 무리한 요구이고, 대부분 거절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전능하심을 보여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와 [관계]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지만, 그
러나 그것보다 “당신은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먼저 묻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서로간의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날에는 [능력위주]의 사회이지만, 그 사람과 ”어떤 관계인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가 있으니까” 그분이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이는 사랑으로 연결된 ”헌신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 하는 것은 그가 [전능자]이기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1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사 43:18)
여기서 하나님은 “지난 일들들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나 간 일들을 ”왜,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희망적인 메시지“이지만,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출애굽]과 같이, ”중요한 사건을 잊으라.”고 하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 여러 가지 사건이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출애굽]사건입니다.
종살이 하던 백성들을 국가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사건이기에,
너무도 중요한 사건인데, 그것을 “지나간 일“이라고 ”잊어버리라.“는 것은 틀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사]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기 이전에, ”이미 베풀어준 은혜“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십니다. [과거]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시고, [미래]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분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임마누엘]이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에벤에셀] = [임마누엘] = [여호와 이레]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이상한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생각]에는 너희가 [출애굽]의 기억이 사라졌으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 은혜의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전능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겠다.‘는 의지적인 표현 입니다.
19절 말씀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막 솟아나고 있는데, 너희는 느끼지 못하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들고 있다.”(사 43:19)
이 구절도 [시제]가 불분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과거시제]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현재시제]입니다.
이렇게 번역자 마다 다르니까, 일관성이 없어요. 혹시 착각을 했나요?
이미 시작하였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원성]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낡은 것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새 일]을 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변함없지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 일]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완성할 일을 [지금] 진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새 일]을 행한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상 숭배하는 그들에게, “새롭게 느끼는 [새 일]을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20-30년 전에 우리가 보았던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요
즘 현실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로써, 사람을 태우고 날아가는 택시나, 드론택시도 앞으로 나올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지요.
[씨스템]을 바꾼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모두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사 만사]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 시키고, 낡아진 마음을 새롭게 바꿔주기 위해,
”[군살]을 제거하고, [새살]이 돋아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니까, 극약처방으로, “[새 일]을 행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흠이 없으신 분인데, 죄인이 전능자에게 싫증내는 모습이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66장인데, 처음부터 39장까지는 “심판의 이야기”이고,
나머지 27장은 소망의 이야기 입니다. 특히 43장은 굉장히 중요한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 43장 22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는 네게 싫증을 냈다.”(사 43:22)
하나님은 “나는 너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데, ”너는 나에게 싫증을 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딴 짓]을 하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키기 위해, ”[새 일]을 행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변심한 여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내가 예전보다 더 잘해 줄게”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고백]도 더 충격적인 것은 이사야 시대이니까,
너무 타락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포로로 끌려갔는데, “사막에 길을 내겠다.‘고 하니,
하나님만 신바람이 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100년 후에나 벌어질 일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까요?“ 하나님도 너무나 대단한 분입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정말로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21절 날씀을 읽으십시오,
“이 백성은 나를 찬양하게 하려고, 내가 손수 만든 사람들이다.”(사 43:21)
이 구절은 [예배와 찬양]을 강의할 때,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만 찬양하라”는 것은 문맥을 통해, 해석해야 해요.
너희가 나에게 싫증을 내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못하니까, 너희가 고통을 당할 때,
나는 길을 내고, 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찬양]이라는 단어는 “칭찬한다.”는 뜻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게 [칭찬]이고,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하는 거은 칭송이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게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하나님도 칭찬하게” 만들어요.
이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해요.
요즘 말로, [볼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이니까, 더욱 기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관계]에도 ”당신이 나에게 싫증나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관계]는 변절되는 것이 두렵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녀관계]는 너무나 힘들지만, 제가 청년부 사역을 할 때에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둘이 함께 오지 않고, 혼자 와서, ”제가 만나는 여성이 헤어지자고 하는데,
목사님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합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정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니 네가 결정하라.“고 대답합니다.
더하여 ”사랑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거야,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의 분량 때문에 헤어지는 거야,“라고 대답해 줍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분량, 만큼만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 만큼 사랑하면 사랑은 거기서 멈춰 아무리 처지가 어려워도, 성격차이가 있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분량]이 넘으면, 그냥 헤어지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때문이 아니고,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 입니다.
연인 사이의 [인간관계]는 어느 한 쪽에서 충만하면, 절대로 헤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한 쪽에서 붙잡으면, 그 [사랑]은 유지되고, 들 중에 한 사람 만 적극적이면,
[관계]는 지속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예요.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어도,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품어 주십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분량만큼“ 사랑해 주는 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애송하는 시편 23편 1-3절을 암송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1-3)
2020년, 새해에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가셔서, 성령 충만하게 지내십시오.
[양]은 목자를 따라갈 뿐, [목자]는 음침한 골짜기를 피하고,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약속을 남발합니다.
사랑하니까, 좋은 약속을 하게 되고, 자주 약속을 남발하게 됩니다.
▶사랑만 받고,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럴 때는 “자기 영혼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가볍고, 누추한 존재가 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언약서]가 된 것은 왜, 그런가요?
하나님, 그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그 분이 “헌신의 하나님“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순애보]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18세기에 신대륙을 돌아다니며 전도하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죠지 뮐러]를 소개합니다.
”그는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야외 집회에서 노새를 타고,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에 6번씩 설교를 하다가,
마지막 설교를 하고 나서 진이 빠져서,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일]은 어렵고 고통스럽고 피곤해도,
[하나님의 일]로 싫증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이런
[마음의
고백]을
마음에 품고,
2020년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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