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소식 (왕하7:3-11) 말씀: 이재훈 목사님
2020년, 올 해는 앞뒤의 숫자가 겹치고,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해가 되었습니다.
정확히 100년 만에 돌아오는 해이니까, 깊은 의미가 있는 한해가 되기 바랍니다.
100년 전에, 1919년에는 역사적인 [3.1 운동]이 일어났던 해 입니다.
2020년은 영적인 자유가 찾아오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뉴스에는 어떤 [뉴스]가 있을까요? 우리가 듣게 되는 뉴스에도 3가지 [뉴스]가 있습니다.
① 첫째로, 듣고 전하는 뉴스, 이것은 일반적인 뉴스로, 누구에게나 알리는 평범한 뉴스입니다.
② 둘째로, 자신이 듣고 전할 수 밖에 없는 뉴스, 이것은 반드시 전해야 하는 뉴스입니다.
③ 셋째로, 그것보다도 더 깊은 차원 높은 뉴스로,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는 뉴스입니다.
만약에 전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책임이 주어지고, 벌까지 받는 중대한 뉴스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전하지 않아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생명을 잃었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좋은 뉴스”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꼭 전해야 하는 뉴스이고,
전하지 않으면 마치 벌을 받을 수 있는 중대하고, [좋은 소식]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전할 수 밖에 없는 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20)
베드로와 요한도 [복음]을 듣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기서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한 것은 내게는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행9:16)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베드로나 요한보다도, 한 차원 더 높고 깊은 발언을 합니다.
[신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의 [서신서]에서 복음의 체계적인 비밀스런 [계시]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기 위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더 깊이 느꼈기 때문에, 자기가 전하지 않으면, ”본인에게 화가 미칠 것 같이 느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그렇게 절박하게 느껴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먼저 깨닫고, 그걸 느낀 다음에, 자기가 깨달은 체험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자신은 “본인이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어떻게 증거 되었을까요?
[복음]을 알고 나면, [복음]은 ”다른 사람에게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가운데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람이 됐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살전1:5)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전해졌나요?
① [복음]이 ”충격적으로 들려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② [복음]이 ”능력과 성령, 그리고 확신으로 전해 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확신]이라는 단어는 물이 컵에 부을 때,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① 먼저 자기 자신에게 흘러 넘쳐야 하고,
② 그런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 말씀에도,
“주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시작되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살전1:8)
[복음]이 확성기가 되어 온 유럽 대륙의 전역에 “전달되었다.”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해졌는데,
그 소식이 “나라가 광복 되었다.”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하루] 만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그 다음 날인, 8월 16일 아침에는 일제히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고 외치면서
각양 각색으로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은 어떤 소식입니까?
[복음]은 물론, 기쁜 소식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은 아주 주요한 뉴스입니다.
[마케팅의 방법] 중에서, [네트워크 마케팅]이 있는데,
“스스로 소비자로 전해지게 만드는 판매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전도방법에 적용하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스스로 소개하고 다니고,
스스로 전하다 보니까,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우리가 믿어 보니까, 진짜 좋으니까 누구나 말하게 되지요. 그러니 진짜 좋으니까, 말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게 [복음]입니다.
만약에 교회 앞에 ”맛있고, 건강에 좋은 식당이 있다”고 할 때, 그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목사님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정보를 자신만 알고 있다면, 그건 아니지요.
▶우리가 깨달은 [복음]은 나에게 어떤 소식입니까?
① 그냥 일반적으로 전하는 뉴스입니까?
② 반드시 의무적으로 전해야 하는 뉴스입니까?
③ 꼭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뉴스입니까?
--- 오늘 이 시간에,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십시오.
오늘 말씀은 죄로 인해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메시지이고,
죄로 인해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고, 승리하게 만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한 아람군대는 강한 군대입니다.
이를 이스라엘 병력으로는 대적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약체의 군대가, 강한 군대를 물리치게 함으로써,
[불신앙]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힘이 강한 아람 군대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잘 훈련된 군사에게 [환청]을 듣게 하시고,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하며,
병기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가 도망을 갔습니다.
6-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람 사람들이 전차소리, 말소리가 거대한 군대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이에 아람 군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보라 이스라엘 왕이 헷의 왕들과 이집트 사람들의 왕들을 고용해
우리를 공격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질 무렵에 일어나 자기 천막과 말들과 나귀와 진영을 그대로 두고 도망쳤습니다. 목숨만 건지려고 도망친 것입니다. (왕하7:6-7)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하나님이 움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어려운 환경이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면,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아람 군대가 도망갈 때, 이스라엘 군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소식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나병환자를 통해서, 왕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소식은 가장 약한 자를 통하여, 전달된다. “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권위와 능력은 “소식 전하는 자의 능력과 상관없다“ 것입니다.
[구약]에서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완전히 포기하고 있을 때,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고사되어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성 문 밖에 있는 나병환자들입니다. 그들은 성 안에서 보내주는 물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 때, 성문 앞에 있던 나병환자 3 사람이 ”여기 이렇게 있지 말고, 성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려고, 성안으로 들어갔더니, 성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이 애굽의 군대의 병거 움직이는 소리와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려주어서,
그들은”겁을 먹고, 다 도망갔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을 읽어보면,
“그러다가 나병환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자코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 까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바로 가서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자.“(왕하7:9)
나병 환자들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다.“고 서로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왕에게 전달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 [뉴스]를 자신들만 일고 있으면, ”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나병 환자들의 생각은 ”올바른 생각”입니다.
제가 새해 첫 주일에 너무 과격한 얘기를 드려서 죄송한데, 이런 상황에서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나병 환자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온누리교회의 목회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 새해 첫 주일이 [선교주일]이고,
[선교헌금]을 작정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이 나만 알고 지내며, 나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전할 수 밖에 없는 [좋은 소식]이기에, 이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성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같으니,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서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들은 [구원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다른 방법도 없으니, 그들이 죽기 전에 살려야 합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복음]을 전해 주는 방법 뿐”입니다. 그게 [선교]입니다.
나병환자들이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뻐하듯이,
그 사람들에게도 기뻐 할 수 있도록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깨달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벌 받을 것” 같은 [양심]이 깨어나게 하듯이, [성령님의 깨달음]으로
우리도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고, ”양심에 의한 깨달음”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놀라운 소식이니, 우리도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성이 살게 되었다“고 전한 사람은 [나병 환자]입니다.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은 왕도 아니고, 전쟁에 참여한 병사도 아니고, 나병환자입니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비천한 사람인데, 그 [뉴스]를 전함으로, 나병환자는 가장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도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베들레헴의 들판에 있던 목동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에게 먼저 전해집니다.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전하라.“고 단순히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구원하라.“고 어렵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우리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오직 ”가서, 전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가서,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을 구원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같이 큰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는 단순히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9절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아,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말고, 힘껏 외쳐라. 유다의 성읍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 ”(사 40:9)
이런 [선교의 사명]을 온누리교회가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심정으로,
우리는
그런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선교사역]을
끊임없이 주도해 나가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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