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무엇을 보셨나요? (눅5:27-32)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에게서
“미래의 잠재적인 가능성”(Potential=포텐셜)을 보았던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 “너희들, 장래의 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과거에 우리 아이들은 “과학자나, 운동선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입에서는 직종에 상관없이, [건물주]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뜻에서, ”돈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뮤지컬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도 없는 [레위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십니까?
2천 년 전에 그런 인물이 있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의 이름은 이름도 없이,
[레위인]이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곧 마태복음의 저자인 세리, [마태]라고 밝혀졌습니다.
2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이 일 후에, 예수께서는 밖으로 나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눅5:27)
▶“이 일 후”라는 말은 어떤 일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 다음에, 주님이 가신 곳이 세관의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에,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사람이 돈으로 보이는 가장 악랄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그런 [세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일반 사람들은 [세관]이라는 곳을 피하려고 하고, [세관원]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로,
서로 마주치면 피하려고 하거나, ”격멸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세리]가 세관에 앉자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은 앞 뒤 설명도 없이,
그 [세관원]을 보자마자, 갑자기,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세리도 놀랐을 것이지만, 28절에서, 그 [세리]가 즉시 반응합니다.
”그러자 [레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눅5:28)
이 장면이 저는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세리]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오히려 더 웃기는 상황이 될 것인데, 말입니다.
▶또 예수님은 [세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거룩한 삶을 산 사람도 아닌데,
그를 보면서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깊은 목마름“을 보았을 거예요.
가물어 바짝 마른 땅은 ”간절히 물을 달라.”고 갈망하듯이, 가장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그는 자기 발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레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이 너무도 다급한 응급상황인 것을 간파하고, 그에게 먼저 손을 내 밀었던 것인데,
그 [세리]는 “언젠가 나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반응한 것입니다.
저는 이 [세리]를 보면서, 한 가지 노래가 떠올랐어요.
목사가 [찬송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가요]가 먼저 생각났어요.
그것은 인순이의 “거위의 꿈“입니다.
거위는 늘 땅에서 걸어 다니는데,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는 거예요.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거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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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보면서, 무엇을 보았나요?
①첫째로, 돈에 미친 세관원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깊은 갈망은 ”언젠가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미래의 속마음을 보았어요.
②둘째로, [세리]에게 숨어있는 “잠재적인 가능성”(= Potential)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이 모든 상황을 알았기에, 지체 없이 그에게 제안하였고,
예수님의 제안을 받고, 그는 즉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세리]였던 [레위]는 예수님이 부르자,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안정된 현실을 포기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자신을 내던지는 결단>입니다.
우리 인생도 멈춰있는 자리에서 그 이상으로 많은 꿈들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꿈들을 예수님 안에서, 펼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는 나를 위해 따르겠니?>라는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이런 <결단과 헌신>이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highest calling>입니다.
이것은 [콜 링]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제가 예측하기를 [사도 바울]이 ”빚진 자“로 살아가듯이,
세리인 [마태]에게서는 ”빚을 독촉하는 사람“으로 살아갔을 거예요.
그래서 [마태]에게서 신약 27권 중에서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남기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마태]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행해서, 구약의 메시아에 관련된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신약인 ”마태복음이라는 전도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태]에게서 ”집요한 복음 증거자의 기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레위는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눅5:29)
사람들은 [세리]가 무엇을 했기에, ”잔치를 벌렸느냐?”고 의아해 하지만,
[마태]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미 [마태]는 세리 일을 접은 사람이기에,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잔치를 버린 것이고, 이 잔치는 예수님과의 “송별회“가 아니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환영회“와 같은 자리입니다.
30-32절에서,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거요.”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얘기 했습니다. (눅30-32)
세상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비방을 했어요.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나는 섬기러 왔다”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고 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했어요.
---- 이것이 예수님이 [비전]이고, <꿈>입니다.
▶여러분은 "잃어버린 영혼의 친구"를 데려와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께로 가야하는데, 그 사람은 혼자서 갈 힘이 없어요.
그 분은 당신이 데려와야 합니다.
이제는 그 분은 당신에게 달려 있으므로, 당신이 그 "잃어버린 영혼"을 예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지, 바리새인같이 종교적인 규칙을 통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위치와 자리(= 포지션 = Position)만을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앞날을 내다보고, 미래의 잠재적인 가능성(= 포텐셜= Potential)을 보고 계십니다.
[시몬]에게 ”열정“을 보았듯이,
[디모데]에게는 ”섬세함“을 보았고,
[누가]에게는 ”치밀함“을 보았고,
[마태]에게는 ”집요함“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위치와 자리“( = 포지션) 만을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가능성“( = 포텐셜)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저, 이상준 목사를 부르신 이유가 뭘까요?
저는 소심한 사람이지만, 어릴 적에 딱지치기를 하면, 하루 종일 치듯이,
”끈질기게 집요한 열정“이 있었기에, 저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는 늘 세관에 앉자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의 가능성”과 “잠재적 가능성”( 포텐셜 = 비전)을 보았기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는 비록 사람들이 싫어하는 “세리”였지만,
그는 신약의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복음 사역자“로 보였기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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