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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낙화암 방문 (2019.10)

다이나마이트2 2019. 10. 22. 22:59

야간에 부여의 낙화암에 들러보러 잠시 들렀다. 낙화암에는 처음으로 들러 본다.

부여는 삼국시대 백제의 세 번째 수도로 옛 이름은 사비성이다.

백제의 첫 번째 수도는 위례성(서울 암사동지역)이었으며 두 번째 수도는 웅진(현 공주)이였다.

백제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가 주몽의 첫째부인 사이에서 난 친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태자가 되자 자기 아들들이 왕을 계승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비루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와서 비루는 인천지방에, 온조는 서울지방에서 각각

나라를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비루는 나라를 세울 땅이 적합하지 못하여 병으로 죽고. 온조는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백제를 세운 후에 21대 왕인 개로왕 까지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영토를 넓히면서 강성 국가 된다.

그러나 서기 475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413~491)이 이끄는 3만 대군이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을 공격하여 백제 21대 개로왕(455~475)을 죽인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475~477)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웅진성(현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백제 26대 성왕(523~554)이 백제의 부흥운동을 펼치면서 웅진성을 버리고 538년 (성왕 16년)에

사비성(현 부여)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비운의 왕인 의자왕(641~660) 까지 123년간 백제의 도읍이 되었다.

부여에서 우연히 들어간 집이 였는데 정말 맛집이였다. 혼자여서 한우 계백탕을 먹었습니다.

계백관, 부여군 부여읍 함월로 3번지. 내가 다음에 부여에 가게된다면 꼭 이집을 찾아 갈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저녁을 먹고 출발을 하자. 한우 계백탕 10,000원 정말 맛있었습니다.

관북리유적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왕궁터이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시대의 대형전각건물지, 연못, 목곽저장고, 석곽저장고, 공방시설, 도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수부首府명 기와, 5부部명 기와등이 출토되었다.
수부명 기와는 부여 관북리유적이 사비시대의 왕궁 및 주요기관의 핵심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5호. 삼국시대 백제의 도성(都城)이다.

둘레 2,200m, 면적 약 102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부소산성 입장료가 있다.

낙화암에 가볼 욕심이 였는데 1.3.Km나 가야 한다고 한다. 왕복이면 2.6Km이다.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안내 표지판을 따라서 나서본다.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낙화암까지 왕복 부지런히 걸어서 대략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백제의 역사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 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해발 106m 고도를 가진 부여의 진산이다.

평지에 돌출하였으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았다.

부소산의 산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이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백제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부소산 내에는 군창지,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고란사 등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으며,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그중 낙화암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사비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의 궁녀와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부여 관아 중심건물인 객사이다.

객사는 왕명으로 받들고 내려오는 관리가 머물수 있는 숙소이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예를 올리는 곳이다.

부여 객사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가운데에 정당을, 양쪽에 좌.우익실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건물이다.

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변형되었으나 기본구조는 남아 있다.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 또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정당(正堂). 앞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청 처마에는 봉황머리와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실제 부여를 방문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익실(翼室).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온돌방 1칸과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간판의 안내를 따라서 아주 평범한 산책을 하듯이 슬슬 길을 나셨는데

2.6Km 부소산성을 올라갔다가 내려 와야 하는 지는 이 때까지는 몰랐다.

낮 시간이였으면 주변의 아름다운 소나무와 여러가지 활엽수가 아름답게 보였을 것 같다.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야간에 낙화암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고맙게도 이동 경로에 전기불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악화암이 20m 남았다. 참 반가운 간판이다.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고 한다.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멀리 백마대교의 불 빛이 아름답다.

금강(錦江)은 전라북도 장수에서 시작해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부여에 이르러 비로소 백마강(白馬江 16km-호암리 천정대부터 세도 반조원리까지)으로 불리운다.

강을 따라 천정대, 낙화암, 왕흥사지, 구드래, 수북정, 자온대 등으로 이어진다.

백마강(白馬江)의 백(白)자는 나라 이름, 마(馬)는 크다는 뜻으로 백제의 큰 강 이란 뜻을 담고 있다.

백마강에는 3개소의 선착장(구드래, 고란사, 수북정)에서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고 한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 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야간에 보아도 백화정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앞에 있는 현판의 글씨와 뒤에 있는 현판의 글씨가 다른분이 쓰신 것 같다.

낮에 보았으면 더 아름답게 보였을지도 모르는데.......

야간에 혼자 돌아보는 백화정은 나라망한 백제인의 한이 느껴진다.

낙화암을 돌아보고 다시 부소산성을 올라오는 길이다.

야간이긴 하지만 전등 불빛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비추어 주어서 혼자 걸어 오르기도 힘들지 않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사자루에 이런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부여회고 (扶餘懷古)

백제도성총고 (百濟都城摠古) 백제 도성이 모두 옛 언덕이 되었구나,

구상전벽해사 (丘桑田碧海使) 상전이 벽해가 되었으니 사람을 슬프게하네.

인수천정무형 (人愁天政無形) 천정은 형체도 없으나 산 모양만 뚜렸하고,

산역역군창여 (山歷曆軍倉如) 군창터는 꿈같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르네

몽수유유화락 (夢水悠悠花落) 낙화암 높은 바위은 천년동안 눈물짓고,

고암천재루용 (高巖千載淚龍) 용이 백마를 삼키니 하루아침에 스러졌구나

탄백마일조추 (呑白馬一朝秋) 문득 백마강에 다투어 건너던 배가 생각나네

삼충의백금래 (三忠義魄今來)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넋을 오늘 와서 

조홀억라강경 (吊忽憶羅江競) 조문하니 문득 백마강을 다투어 건너던 배 생각나는구나.

도주 (渡舟)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거인(潘南居人) 금운 정순규(錦雲 鄭淳圭)

半千基業作荒丘 (반천기업작황구) 5백년 터전이 황량한 언덕이 되니

滿木山河摠是愁 (만목산하총시수) 눈에 가득한 산하가 모두 근심이네,

落花孤巖春寂寂 (낙화고암춘적적) 낙화암 외로운 바위는 봄날에도 적적하니

龍亡大洋水悠悠 (용망대양수유유) 용은 죽고 큰물만 유유히 흐르네.

管絃當日繁華地 (관현당일번화지) 그때는 풍류가 번화하던 땅이었으나

漁逐斜陽慘憺秋 (어축사양참담추) 해 질 무렵 어부가 고기 잡는 참담한 가을날.

白髮那堪今古淚 (백발나감금고루) 백발이 된 지금 눈물 견디기 어려워

滄浪一曲更回舟 (창랑일곡경회주) 창랑가 한 곡조 부르며 배를 다시 돌리네.

송용재 〈사자루〉 판상시

내려오는 길 삼걸이에 쉼터도 있고 백제의 상징적인 문양을 나타내는 가로들이 아름답게 비추어 준다.

1호 석곽창고(1號 石槨倉庫)

이 창고는 직사각형의 구덩이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규모는 남북길이가 5.2m, 동서길이가 1.8m이다.

내부에 발견된 8개의 기둥자리는 지붕구조를 떠받드는 기능과 내부를 3칸으로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2호 석곽창고 (2號 石槨倉庫)

이 창고는 남북길이 4.6m, 동서길이 1.6m, 최대깊이 2.2m 규모의 석축창고이다.
그 내부에는 나무기둥 흔적과 함께 많은 양의 토기편과 참외씨앗 등이 발견되었다.

4호 목곽창고 (4號 木槨倉庫)

이 창고는 남북길이 4.4m, 동서길이 2.4m 규모의 목곽창고이다.
바닥면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뒤편에 긴 판자를 잇대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창고 내부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공(功)자가 찍힌 기와와 호자(虎子)가 출토되었다.

부여관북리백제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부여에서 지나오는 길에 공주 공산성에도 들렀다.

이곳도 세계문화유산 백제유적지구 공상성으로 지정이 되었다는 표지석이 있다.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은 웅진성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에 걸쳐 있는 약 20만㎡ 규모의 거대한 산성이다.

금서루는 공산성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문입니다.

공산성에는 사대문(四大門)이 있는데 동문인 영동루(迎東樓), 서문인 금서루(錦西樓),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그리고 북문인 공북루(拱北樓)가 그것입니다. 문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동서남북(東西南北)이므로 알기 쉽습니다.

대부분 관광객은 서문인 이 금서루를 통하여 공산성에 오릅니다. 동문은 이곳에서 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동문을 가려면 남문인 진남루를 거치거나 북문인 공북루를 지나야 합니다.

금서루에서 성곽길을 따라 다른 문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공산성은 산봉우리를 연결하고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이다.

성체 총길이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 공산성은 토성구간과 석성구간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이 석성구간인데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면서 석성으로 변화되었다.

토성은 동쪽 구역의 내 외성으로 구분된 범위에 위치한다.

이 중에서 외성 구간은 백제시대에 쌓았던 토성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공산성은 거의 석성으로 남아 있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백제시대에 쌓았던 석성의 흔적도 발견된다.

성곽의 현황을 통해 최초 백제시대에 토성으로 쌓았고 부분적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공산성 금서루(錦西樓)라고 보인다. 서쪽에 있다는 문이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공주 시내에서 보면 정문과 같이 보이는 문이다. 달이 참 밝게 빛나 보인다.

부여 낙화암에 처음으로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