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고난주간1 유다는 불의한 사람 (눅22:1-13) 2019.4.15

다이나마이트2 2019. 4. 25. 17:08

유다는 불의한 사람 (눅22:1-13)             말씀: 이재훈 목사님

 

[고난주간]은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주간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동정하게 되면, 우리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의 동정을 받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고난이 너희 자신의 죄와

너희 자녀를 위해, 세상 죄를 위해서, 슬퍼하면, 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나타내는 “죄악의 무서움”을 보게 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죄악의 “교활함과 사악함”을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던 제자들 까지도, “순전함”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제자들도 그 죄악의 모습이 나타났으니까요.

 

[고난주간]에 그런 죄악의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 나의 모습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오니, 그런 체험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악한 인물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또 "돈에 대한 탐욕"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니, [악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빌라도의 지시에 따랐고, 거기에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함께 합세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유월절 명절에,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죄악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합세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 몰았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게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하는데, 적당한 트집 꺼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무나 인기가 있어서,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밀리에 백성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죄인으로 만들어, 몰래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럴 때에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 측근에서 “배신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가룟 유다]가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배신자]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역사에서는 그를 변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2006년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유다 복음]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예수님이 유다를 불러서 누군가 배신해야 하는데, "네가 배신하도록 하기 위해,

네가 배신하라고 부탁하였다"는 "고대 문서가 나왔다"는 보도입니다.

 

공신력이 있는 세계적인 잡지인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발표했기에, 그 파장이 대단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단적인 [고대 문서]가 "위조된 문서" 이기에 다행이지만,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위조된 문서”이기에,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또 유명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에서도 [가룟 유다]가 원치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하게 되는 것처럼, 꾸민 것은 명백한 [죄악]을 [악역]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악명 높은 이름이 됩니다.

원래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하다.”라는 뜻이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그러나 사람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개의 이름도 [유다]라고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왕국”으로 세우고, 그 때까지 대부분 돌아온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단어로,

[유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는 그 당시에도 사랑받는 이름인데,

로마 황제가 [유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부터

오늘 날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 앞에 [가룟]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지역을 말하는 단어" 이니까,

[가룟 유다]라는 말은 “가룟 지역 출신의 유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의 출신 배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제자훈련을 받으며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던 사람인데,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는 점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들은 유다의 배신을 [합리화] 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배신도 [합리화] 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배신을 [정당화] 시킴으로, 자기 [죄]도 정당화 하려는 의도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시도 입니다.

이런 흐름에는 반대하면서도, 자신의 안에 있는 배신을 [합리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유다 혼자 배신자인가?”이지만,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과연 [가룟 유다]의 배신이 혼자만 배신자입니까?

혹시 “내안에 있는 유다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나는 유다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라고 다짐 하지만, 과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유다]의 배신을 변명 할 수 없습니까?

①첫째, [유다]는 “하나님의 예정된 희생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다를 예수를 판 사람이 아니다는 확신으로 ,“유다는 배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메시아가 친구의 배신으로, 배신당하는 구절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유다]는 예정된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건,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유다]는 “예정된 희생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다] 자신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눅22:4)

 

여기서 대제사장을 찾아간 사람은 [유다], 자신입니다.

대제사장이 [유다]를 먼저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유다가 먼저 찾아가서, 어떻게 넘겨줄지를 상의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유다의 [결단]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결단]으로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이고, 유다의 ”의지적 선택”입니다.

6절을 보면, “유다도 이에 동의하고,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눅22:6)

 

그러니까 [유다]가 “자유 의지”로 선택했고,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②둘째로, [유다]는 사탄의 희생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사탄이 12명 중에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눅22:3)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사탄에 사로 잡혀서 ”죄를 졌다.”고 하지만,

저는 그 사이에 “아무 저항 없이”라는 말을 집어넣고 싶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사탄이 들어오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유다]는 사탄을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사탄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에게 “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사탄]에게는 저항하면, [사탄]은 도망갑니다.

[유다]는 사탄의 희생자가 아니라, [유다]가 사탄에 말려들어간 것입니다.

 

[사탄]이 “들어갔다.”고 [유다]의 얼굴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겉으로 [뿔]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탄]은 오히려 말없이 “악한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만 들어가서 역사를 합니다.

 

③세 번째로, 유다의 배신이 변명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왜 배신했을까요?

성경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다]는 자기가 꿈꾸던 하나님 나라의 꿈이 깨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유다가 돈 때문에 배신"했거나, "정치적 신념을 이루기 위해 배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다]는 원치 않는 “악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원해서, “악한 행동”을 [감행함]으로 “악인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유다]는 그의 속까지 “악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유월절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

겉으로는 [유월절]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 여러 번 경고를 했고,“그 길을 피하라“고 말 했으나, 그는 그걸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유다]의 죄를 합리화 할 수 없으니, 우리 안에 있는 배신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유다]의 배신을 합리화 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내안에 있는 유다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①첫째로, 우리는 일대일 제자훈련을 받았으니까,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다]도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인데, 예수님을 배반했으니까, 우리들도 쉽게 그런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우리를 변하지 않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②둘째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도 탐욕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고, 그런 죄가 내 안에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③셋째로, 자신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유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다의 탐욕]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모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구약에 예정된 그대로“, 행동했어요.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기 위해, 하나씩 준비하고, 묵묵히, 주저함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3절 말씀에,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눅22:13)

 

1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루어 졌습니다.

유다의 배신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배신의 영]을 회개하고,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내 안에 [배신의 영]이 있사오니, [유다의 영]이 나타나지 않고, [순종의 영]으로 덮어 주시고,

내 안에 그런 [배신의 영]이 떠나가고, [순종의 영]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제가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주님의 영]을 가린 적은 없습니까?

저의 [악독함]을 회개하고, 나를 성결하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 모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저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오니,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겸손히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바로 세워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정리 : 천영무 장로님  사진 김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