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4일 금요일
21. 성령의 인도하심/ 행 16:6-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말씀드립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겸손합니다.
모세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듯이, 그들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 혹시 교만한 사람과 대화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그런 사람에게도 말씀하시지만, 그에게는 그런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과 정서“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감정에 우선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정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합니다.
[내 느낌]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감정인데,
그 ”감정“은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고 있으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다면,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인 요소가 삶을 변화 시키지는 못합니다.
“고든 스미스“는 ”예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정서에 접촉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정서적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두려움, 절망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는 기쁨 속에서, 성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쁨과 평화는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주는 참된 시금석이 됩니다.
왜냐하면, 기쁨 안에서 행동할 때에만, 믿음 안에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고든 스미스 -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감정 속에서 말씀하시는데,
자신이 왜 분노하는지, ”자신의 기쁨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성령님이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그나타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충동적이고, 선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육신의 감정에 의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말,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감정을 보면, 충동적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 속에 기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 누구를 비난하거나, 상처가 있으면, 그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가?”를 알려면,
“내 정서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분노가 있으면, 그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닙니다.
내 안에 평안이 없다면, 그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닙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다면, 그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내 안에 평안이 있다면, 그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 감정에도, 거짓 감정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포장된 감정“에는 문제가 따를 수 있습니다.
말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감정“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 감정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① 위안의 감정( =긍정적인 감정)과
② 황폐한 감정(= 부정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이런 황폐한 감정에서 결정하면, 평안을 주지 못해요.
그러니까 성령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나?”를 점검하여,
“아니다” 싶으면, 결정하지 말고,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가장 명확한 것은 성령님은 뚜렷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걸 착각하거나, 잘못 들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로써, 마리아에게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리아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면, 그 말씀을 제대로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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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인, 사도행전 16장 6-7절을 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아시아 지방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기 때문에, 바울과 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무시아 지방 가까이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 하지 않으셨습니다.”(행16:6-7)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고자 하는 ’비두니아’라는 곳은 ‘아시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소아시아, 즉 터키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영이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이를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 말씀에도 그랬듯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성령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은 1차에서 다녀온 지역을 점검하고,
복음 전한 곳이 ”잘 진행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인데, 그걸 성령님이 막았어요.
▶ 왜, 성령님이, 아시아를 싫어했나요? 그게 아니지요.
아시아 지역은 또 다른 사람이 책임질 것이니까,
”너희들은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가지 않은 지역, 타 문화권에 투입하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 각 나라와 족속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흩어져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어요.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 성령님께서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은 이유가 뭘까요?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신 것은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우리 가까운 이웃만 생각하지 말고,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9-10절을 읽으십시오.
“한 밤중에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나님께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드렸습니다.”(행 16:9-10)
바울은 아시아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유럽으로, 더 넓은 곳으로 지경을 넓혀 주셨습니다.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지경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고향이나 아시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로마,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해, 복음은 유럽으로 건너간 뒤,
미국으로 전해졌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온 복음은 북한, 중국을 거쳐,
이슬람권역과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에도 전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느끼고,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초자연적인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 왜 그럴까요?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지역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런 환상을 보여주며, 그런 환상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알렉산더가 빌립보에서 세계정복을 시작했듯이,
빌립보는 유럽에서도 중요한 도시인데, 강가에 있는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루디아를 통해,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놀랍게도 눈물이 앞을 가려도, 한 참을 울다보면, 앞이 보입니다.
한 참을 울다보면, 평안이 오고, 그 가운데서도 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게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의 감정 속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모두 다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기쁘지 않은데, 기쁜 척하면, 안 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기도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하지 말게 하시고, 성령의 음성”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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