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일 수요일
20. 성령의 보내심/ 행13: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 저는 2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
이것은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②내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성령의 음성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과연 “성령의 음성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가 ”내 소리인지, 사탄의 소리인지, 성령의 음성인지?“를 구별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만일 그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자신의 소리를 착각하거나,
사탄의 음성에 속아서, 내 삶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므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음성을 들을 줄 모르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자동적으로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온전한 사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 져서,
성령에 이끌려서, 모든 일을 행한 행동입니다.
만일 그분의 신성으로 능력을 베풀었다면, 우리와 연결점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의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성육신하신 인성으로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리“는 아버지와 교제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행하심대로, 행하셨기에,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배운 ”진리의 성령“에서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다시 보면, “진리의 성령,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들은 것만 말씀하시며,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요16:13)
▶성령님은 누구로부터, 들은 것을 말씀하나요?
네, 그분은 “아버지”에게 들은 것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것만 말씀하셨어요.
▶ 우리가 듣는 음성은 누구의 음성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인가? 예수님의 음성인가? 성령님의 음성인가요?
그 대답은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속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 “성령님”이니까요.
물론,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니까,
예수님도 맞는 말이지만, 어찌 불러도 다 맞는 말입니다.
그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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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첫 째로 “성령님의 보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안디옥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습니다.”(행13:1)
하나님의 역사는 “금식”과 “기도”로 이뤄집니다.
안디옥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나바와 그 밖에 사람들에게
“맡긴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게 ”성령님의 보내심“, ”파송”입니다.
2절을 읽으십시오.
“그들이 주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2)
▶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성도들은 바울의 설교를 계속 듣고 싶었고, 바나바와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떠나 보냅니다.
안디옥 성도들의 기도를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까지 말씀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은 언제입니까?
그들은 “예배드리는 도중”에, 금식한 상황에서 들었어요.
이 말씀은 “그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했다”는 말입니다.
“참된 예배”가운데에, 성령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상황입니다.
가장 듣기에 좋은 자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 어떤 자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기 좋은 자리일까요?
① 올바로, ”즉각 반응하는 자리”라야 들을 수 있어요.
② 그 자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나의 반응도 있어야 합니다.
----이게 올바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 성령님은 언제, 반응하나요?
① 성령님은 “온전한 예배자”로 임할 때, 성령님이 반응합니다.
② “하나님의 임재“에 올바로 반응할 때, 성령님이 반응합니다.
▶ 성령님은 언제, 반응하지 않나요?
① ”죄의 문제”가 있을 때, 반응하지 않아요.
---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으므로, 반응이 없습니다.
② “상처”가 있을 때, 반응하지 않아요.
--- 사탄은 그 상처를 이용하여 듣지 못하게 합니다.
③ 영적 분별력이 없을 때, 반응하지 않습니다.
④ 겸손하지 않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외면합니다.
⑤ 순종하지 않을 때, 모른 척합니다..
⑥ “정직함”이 없을 때, 듣지 않으십니다.
⑦ 성령님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 오직 1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들어야 합니다.
⑧ 신비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2) 두 번째로, “성령의 음성“은 [공동체]를 통하여, 들려주십니다.
2절에, ”그들에게 함께 말씀하셨다”는 것은 동시에 들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말했는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동시에 말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계시록 3장 22절에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계3:22)라고 말씀했듯이,
여기서 “교회들“이라고 하신 것은 ”공동체에게 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교제 권“ 내에 있는, 같은 공동체에게, 함께 듣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 우리가 교회에서 회의 할 때, 어떻게 시작하나요?
교회에서의 회의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므로,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의 회의”가 인간적인 토론이 되면, 안됩니다.
“사회의 회의”와 “교회의 회의”가 다른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회의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성도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성도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번 특새 시작할 때, “표어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얘기가 있었어요.
결국에 ”성령의 바람, 불게 하소서“라고 정하니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올해 표어를 정할 때도, 한 달 이상 기도하며, 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 고립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고, ”공동체와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 지려면, 행복한 사람들의 곁으로 가거나,
행복한 사람과 같이, 공동체를 구성해, 같이 생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안디옥교회에 말씀했다“는 것은 교회 전체에,
”공동체에 말씀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있는 지도자들과 리더십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고, 공동체 전체에게 같이 말한 것이니까,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그들 모두가 “성령의 음성을 함께 들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다 성령 안에 있었기에,
모두 다 함께 들었고, 이제부터 “선교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가 ”다 같이 기도하면서 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 혹시 나에게 “성령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았으니까, 듣지 못한 것입니다.
▶ 여기서 “겸손한 상태“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거룩한 무관심“의 원리에 따라,
진리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판단하면, 겸손한 상태가 아니지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다보면,
가난 할 수도 있고, 우리가 병에 걸릴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성령의 이끄심”을 모른다면, 그건 ”거룩한 무관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나바를 따로 보내라”했을 때,
인간적인 교만이 있었다면,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순종하고, “키푸로스”로 선교를 떠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복음이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공동으로 받아 드렸듯이,
우리 온누리교회도 같이 기도하면서,
공동체 전체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을 ”거룩한 무관심”으로 극복하고,
공동체가 함께,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만한 가운데 있으므로, “진리에 무관심” 할 때가 많사오니,
우리를 “거룩한 불”로 태우시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안디옥교회와 같이, 오직 “거룩한 무관심”이 나타나게,
나 자신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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