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5일 토요일
22. 성령님의 강권하심/ 행 20:17-24, 말씀: 이재훈 목사님
믿는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운명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유의지”에 따라,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끄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불순종으로 축복된 삶이 아닌, 어렵게 사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의 사명을 다 하기 까지,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는 “사도행전”의 움직임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생각과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을 함께 읽으십시오.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행20:22)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성령의 강권하심"이란 말씀을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사역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계획 보다, 그것을 뛰어 넘어,
”성령에 매이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성령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성령에 사로잡혀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죽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나쁜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하면서도,
그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짜 교인이라면, 이런 "심령의 매임"에 움직여야 합니다.
▶ 바울의 이런 생각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매임"을 받아야, 나옵니다.
그것이 ”성령의 강권하심”입니다.
▶ “성령의 강권하심“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고난이 있지만, 나는 꼭 그 일을 해야 해“
나는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해."라고 마음에 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슨 일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하도록 사명을 주는 것,
성령에 매이게 하는 것, 성령에 붙잡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강권하심” 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지식이 많은 사람도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신 분입니다.
그는 “나는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런 “신앙의 염원”으로,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항상 성령에 이끌려, ”성령에 매여 사는 분“입니다.
때로는 “내 계획”을 뛰어 넘는 일을 요구 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에 그 “성령님의 요구”를 따라야 합니다.
“내 감정”보다, “성령의 강권하심”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강권하심”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자유의지“로 결정을 하지만,
내가 매여 있으므로,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받아 드려야 합니다.
“내 육신“이 원하는 곳과, 성령님이 원하는 곳을 알고,
사도 바울의 ”순종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선하다“고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어려운 가운데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 때, 나쁜 짓을 안 하고,
비난 받지 않는 것이 ”성령 충만“한 게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것과 원수가 없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 바울 같이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렇게 살려면, ①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 ”겸손“이고,
② 두 번째로, 떠나가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를 원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명을 품었고,
그 사명을 위해, 전도여행을 통해 체험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사도바울은 3차 여행을 마치고,
이별하는 모습에서,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강권하는 모습”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들과 같이 지내고 싶지만,
성령님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럴 때, 예루살렘을 피하고, 에베소에 가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도 고민했을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성령에 매여 있는 바울은
“성령에 이끌림”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르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겸손과 눈물“로 순종합니다.
19절을 보면,. ”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행 20:19)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행적은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어요.
악한 영이 떠나갔지만, 그런 기적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한 마디로 바울은 ”겸손과 눈물“을 생각하면서 순종했어요.
이 말씀을 생각하며, 저에게 떠오르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방지일 “목사님입니다.
90을 넘긴, 그렇게 고령이신데, 맨 앞에서 강의를 듣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도 가끔 피곤하여, 강의를 빼먹곤 하는데,
그 분은 꼼짝하지 않고, 열심히 참여 합니다.
▶그 분께 ”건강한 비결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비결은 따로 없어요. 운동이 있다면, 심장운동을 해요.
심장운동은 다른 게 아니고, 감동으로 눈물이 날 때,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는 게 심장운동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참 경제적인 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영혼 구원에 감사와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깃들여 있는 겸손과 눈물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강권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않은 어려움을 감수한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 보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 보다,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은 영원하고,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더 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것 보다 더 귀한 것이 ”복음 전달의 사명”으로 여겼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기 바라며,
그런 “복음 전달의 사명”을 우리들도 모두 품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 자녀가 “선교사로 헌신한다.“고 할 때,
”꼭 네가 가야 하니?“라고 말하지 말고,
”그래, 잘 생각했다. 너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된다.“고
격려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성령에 매여 있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심령의 매임 바 되어” 어려운 곳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성령의 강권하심“을 알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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