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당진 심훈 기념관 방문 (2018. 8. 3)

다이나마이트2 2018. 8. 4. 13:59

2018년 8월 충남 서산시 삼길포항에 잠시 드렀다.

여전히 많은 선상 횟집인 배들이 있었고 항구는 복잡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까운 물회집에 들어가서 시원한 물회를 한 그릇했다.

날씨가 워낙 더워서 올려 주신 얼음이 사진 찍는 사이에 녹아 내린다.

삼길포 독살 체험 축제가 열리는 모양이다.

항구에 일정 부분을 막아서 물을 넣고 고기를 넣어서 맨손으로 잡게하는 체험인것 같은데

아직도 준비 중이다. 물반 고기반이라도 맨 손으로 잡기 매우 어려울 만큼 큼직한 장소이다.

삼길포 우럭축제가 8월 3일부터 5일까지 2박 3일간 삼길포 항에서 개회되는 모양이다.

축제하면 뭐니뭐니해도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니 여러가지 음식들이 준비되고 있다.

바닥에 물을 뿌려 놓았고 그늘 막은 처놓았지만 날씨가 너무 덥고 습도도 높아서 머물기가 힘들다

전에 못 보던 현대식 삼길포 수산물 직매장이 있었다.

날씨가 더우니 저곳은 시원 할까 싶어 한번 방문해 본다.

활어집이 가득있었는데 손님들 보다 상인들이 더 많이 계신 것 같다.

수족관에 싱싱한 활어들이 많이 있다.

여유로우신 분들은 낚시배를 빌려서 고기 잡으러 출항 하시는 것 같다.

썰물 때여서 고기가 잡힐려나 모르겠는데 많이 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섬길포항에서 건너편 도비도 항으로 왔다. 도비도항에는 주차를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할수 없이 도비도항 조금 옆의 주차 공간이 있는 농어촌 휴양단지로 왔더니 한반도 모형의 바위에

대호간척 친환경농업 시범지구라고 농어촌진흥공사에서 탑을 세워 놓았다.

도비도 항에서 건너 편에 바라보는 삼길포항의 모습.

삼길포항에서 대호방조제를 지나서 한참을 와야 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바다 건너이다.

도비도 농어촌 휴양단지에서 바라보는 배들의 모습 참 여유롭게 보인다.

당진 전력문화홍보관에 잠시 들렀다.

전망대에 올라가 본다. 석문각이라고 현판에 적혀 있다. 서해 낙조를 보기에 최고 명소 가운데 하나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석문각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 소난지도 난지도가 건너편에 보인다.

해가 질 때 낙조를 저 방향에서 볼수가 있는데.....

전기생활박물관이라고 해서 잠시라도 들러 보려고 했더니.......공사중이란다.

그래도 거미줄이 잔뜩 걸려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관광현실이 이런가 싶기도 하다.

당진 기후변화 체험관 내부이다.

우리 고장의 날씨와 기후는 어떻게 변했을까?

가운데 노란색이 현재이고 아래 파란색이 30년 전인 모양인데 현재의 기온 습도 풍속은 표시가 안되고

30년 전에는 기온은 24℃, 습도는 81%. 풍속은 1.4m/s로 표시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예날부터 각 시대를 지배했던 동물들의 생김새와 모습을

빛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만나 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있다.

빨강색 빛을 비추면 빨강색 동물은 안보이고 파란색 빛을 비추면 파란색 동물이 안 보이게 된다.

 

그림자에도 색깔리 있는지 처음 알았다.

세가지 색의 빛이 어우러지면 그림자의 색은?

물감과는 다르게 빛은 색을 썩으면 점점 더 밝아 진다.

당진전력문화홍보관이다.

동서발전 당진발전소라고 멋있게 적어 놓았다.

해가 뜨기도 하고 해가 지기도하는 마을로 유명한 왜목 마을에도 잠시 들러 본다.

마을안 해수욕장 입구에는 견우 직녀가 만나는 당진 왜목마을이라고 홍보하고 계셨다.

왜목마을의 해변에 파라솔은 많이 처 놓으셨는데 날씨가 너무 더우니 해변이 한산하다.

마침 썰물 때라 저 멀리 갯벌에 꼬막들을 잡으시는 것 같다.

왜목마을에서 장고항을 바라본 모습이다. 장고항에도 한번 들러 보려고 했는데

길을 잘 못 들어서 장고항에는 못 둘러 보고 돌아 왔다. 해가 장고항 방향에서 돋는다.

심훈 기념관에 들렀다. 경기도 시흥에서 (현재는 동작구 흑석동)출생 한 것으로 아는데

충남 당진에 심훈 기념관이 있다.

심훈 (본명: 심대섭) 농촌계몽운동가, 작가, 시인, 영화감독, 방송국 프로듀서(아나운서), 저널리스트

1901년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검은돌(흑석동)에서 출생하셔서 1936년 장티푸스로 36세에 사망하셨다.

항일 저항 문학의 최고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그날이 오면"

1930년 3월 1일 "그날이 오면"을 집필하셨다고 한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일제 시대에 발행되던 우리의 잡지들이다.

1945, 1955년 새벽 잡지, 1906년 장지연이 편찬한 동국역사 권1, 고금의현기관 권3, 권1,

백제고도 부여 고적명승 안내기(1934년), 청춘 1917년 (최남선창간 1914년) 한문 대한지지 (漢文 大韓地志. 1907년),

경성의 지리역사 (1933년) 이런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심훈의 대표적 장편소설 상록수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 했던 것 같다.

상록수가 여러번 발행 되었어나 보다, 같은 제목으로 6권의 책이 전시되어 있다.

상록수는 남녀 주인공인 박동혁과 채영선을 통하여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작장편이다.

심훈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며 동아일보가 창간 15주년 기업사업으로 마련한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당선한 작품이다. 전작장편은 주제의식이 전편에 걸쳐 일관되는 장점도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란 점에서 이전 작품에서

보여지는 이념적 성향이 완곡해져 생경한 이념의 나열이나 주장 대신에 인물의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즉, 상록수가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피력하고 홍보하는 차원으로 전락하지 않고 동시대인의 문학적 정서 내지는 농촌계몽 운동의 전형성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상록수의 줄거리는 농촌계몽의 귀환보고 대회에서 박동혁과 채영신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된다. 이후 백현경의 농촌문제 세미나에서 만나며 여기에서 두 사람은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천명한다.

박동혁은 한곡리로 귀향하며 채영신은 기독교 청년연합회 특파원으로 청석골로 들어간다.

박동혁은 규합해 농우회를 조직하고 공동답을 경작한다. 뿐만 아니라 애향가를 지어 부르며 농우회 회관을 건립한다.

즉 박동혁은 집단의 조직, 경제적 기반 마련, 사상계몽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실천적 행동가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적대자에 대한 실질적 대립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식민지 시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적대자와의 대립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추론은 어렵지 않다.

반면에 채영신의 농촌계몽운동은 문맹퇴치로 집약된다. 예배당을 빌려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글강습을 하며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원을 짓기 위해 기부금을 마련해 우여곡절 끝에 낙성식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발병과 박동혁의 수감으로 이야기는 비극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즉, 채영신은 약혼자 박동혁의 부재 속에서 임종한다. 박동혁은 약혼녀의 임종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무덤가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며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이 못다 하고 간일까지 두 몫을 하리라 하며

농촌계몽사업을 계속 하겠다고 맹세한다.

박동혁은 졸업해서 개인적인 성공을 향해 매진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귀향하며, 채영신은 안락하고

편안한 여생이 보장되는 김정근과의 약혼을 파기하고 농촌계몽운동에 헌신적으로 봉사를 실헌한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실천적 희생은 기독교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며 농촌계몽이라는 시대적 당위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강기천이나 한낭청 등의 추악한 이기주의자들의 비인간성과 대립하거나

그들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면서 두 인물은 각각 사상계몽을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종교적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청년층에서 전염병처럼 번져갔던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써 사회주의를 오로지 박동혁에게 형상화시킬 수 없었던 점은 작가의 역량 부족에 기인한다기 보다 식민지 아래 검열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으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박동혁을 사상적 실천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채영신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실천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두 인물의 모델은 각각 함경남도 원산의 루씨여고를 졸업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샘골로 들어가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과로로 숨진 최용신과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개량과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던

작가의 조카인 심재영인데 당시의 이상적 인물을 제시하였다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심재영이 최용신의 무덤을 찾았다는 에피소드는 작품의 대중적 호소력을 증명한다.

창작과정에서 식민지라는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었으나 계몽운동의 실천방법과 궁극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과 방해세력 또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막연한 이상으로써의 농촌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현실에 입각한 농촌계몽 문학의 패러다임을 확립 하였다

[출처] 농촌계몽운동의 배경을 여실히 보여주는 심훈작가의 상록수 줄거리 요약 작성자 핵꿀잼

상록수 실재 주인공들의 사진과 설명도 있다.

옛날 어른들이 오히려 어려운 책들을 많이 읽으셨나 보다. 요증 대학생들도 이런 책 읽으라면

아마 몇 장 못 넘기고 수면제인줄 알고 졸것 같은 책 제목들이다.

왼쪽부터 現代思想各論(1924년), 最新思潮展望(1933년), 唯物史觀 經濟學(자본주의 이전)

中間 階級の 社會學(1932년) 일제시대에도 우리 조상들은 책을 즐겨 읽으셨나보다.

이 외에도 日本論, 印度の 革命, 朝鮮留記, 보헤미얀의 노래, 滿蒙論, 독립정신 이런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심훈 선생님의 집필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심훈 기념관 필경사 외부 전경 모습니다.

당진 필경사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

필경사(筆耕舍)는 심훈 선생(1901~1936)이  1932년 서울에서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34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필경"은 심훈 선생의 1930년 7월 작품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을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집을 필경사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필경사는 대지 661㎡ 에 건평 60㎡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며 한일자형의 초기지붕에

목조 기둥으로 세워져 있으면 벽체는 황토를 짓이겨 바른 농촌의 전형적인 가옥이다.

필경사 내부에는 심훈 선생이 읽던 책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으며 등불과 옷가지 부컥과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으로 재연되어져 있다.

심훈 선생은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심훈 성생님이 거주하신 필경사가 전통적인 한국식 초가 가옥인데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신 경험으로 인해서 있지

만주식 집 같기도 하고 일본식 집 같기도 한 건축물이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농촌 계몽 운동을 상징하는 듯하기도 하고 상로수의 실제 주인공 같기도 한

조형물들이 있었다.

책을 일고 있는 참 평화로운 조형물도 있다.

항일 저항 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하는 "그날이 오면" 시 비도 있다.

심훈 기념관을 돌아 보고 나오는 길에 심재영 선생의 생가 간판이 있길래 그냥 한번 들러 보았다. 

상록수가 가득한 가운데 아름다운 기와집이 깔끔하게 있었다.

심재영 고택

소설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 심재영 선생께서 1930년에 지으시고 1995년 소천하실 때까지

평생 사신 한옥이라고 하신다. (이 고택에서 심재영 선생께서 청년시절 농촌 계몽 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1932년 심훈 선생께서 이 고택으로 낙향하시어 1934년 이주하실 때까지 "직녀성" "영원의 미소"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셨다고 한다. 현재는 심훈가 후손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교회 이름이 특이해서 내려 보았더니 상록수교회라고 한다.

심훈 선생의 형 심명섭 목사가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게 납북을 당한 후 향리에 내려 온

부인 권유희 권사와 심훈 가족 중심으로 소수의 피난민과 지역 주민이 참여하여 1951년 9월

필경사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21년간 필경사를 교회당으로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린 후 2차 교회 당을 거처

2001년 4월 16일 현재의 자리에 제3차 교회 당의 신축 봉헌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심훈 선생의 이모 윤병영 전도사가 초대와 제8대 담임교역자로 사역을 했고

부곡교회로 설립이 되었다가 2007년 심훈 선생의 농촌 계몽운동을 신앙적 계몽운동으로

이어가자는 뜻을 담아 당진 상록수교회로 개명을 했다고 한다.

참 아담하고 좋은 교회처럼 보였다.  

저녁에는 돌아와서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좋은 분들과 맛 있는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 정말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