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이천선교팀(담당 김도균목사)에서 2018년 7월 7일(토) ~ 8일(주일) 1박2일 일정으로 부산, 경남 지역으로 제4차로 선교 역사 여행을 다녀 왔다. 우리 민족을 바꾸고 열방의 나라를 바꾸실 선교의 주역들이시다. 아멘.
토요일 아침 6시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준비된 버스로 출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자 ~~~~
흔들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송영봉집사님의 기타반주와 인간 보면대 위성계 형제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고후5:13)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달리는 버스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쳐 보신다고 하신다. 존귀 오 존귀하신주 ~~~, 기뻐하라 나의 영혼아~~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두 손들고 찬양합니다. 이런 많은 찬양을 했다.
김도균 목사님의 생명의 삶 말씀 나눔도 있었다. (행13:13~42)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초량교회이다. 선교사가 설립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 중 하나 라고 한다.
초량교회는 1892년 11월 7일 베어드(Willam M. Baird) 선교사가 부산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고 영선현교회로 출발하여 영주동교회 초량3.1교회 초량교회로 그 명칭이 변해 왔다고 한다.
도착감사예배
감사기도 : 김종호 장로
하나님 아버지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배우고 싶습니다. 성령님 가르쳐 주옵소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현장 잘 배우고 싶습니다.
말씀 : 김도균 목사 (행9장)
사울이 다메섹으로 주의 제자들을 잡기 위하여 가는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춰 3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어제 강남B공동체 선교사 중보기도 모임에 오신 목사님의 간증을 대신 전해 주셨다. 폭행을 당해서 눈에서 피가 나고 빛 없는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빛을 보면 눈이 아프게 될 때 빛은 좋은 것이지만 아프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임을 알았다. 빛을 빛으로 볼 수 없었던 이 어둠의 땀에 어둠 가운데 있었던 조선 땅에 임한 하나님의 빛, 순교와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복음이 확산 되었는지 부산에 임한 하나님의 빛을 우리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량교회 자체가 한국기독교역사 사적지 제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초량교회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첫 목회지이기도 한 곳이라고 한다.
초량교회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3.1독립 운동의 영남지역 거점교회로 부산의 어머니 교회로 지금도 지역 교회를 섬기는데 앞장 서고 있다고 하신다. 6.25 전쟁으로 국가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초량교회에서 통회구국 기도운동을 전개했는데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이
바로 이 통회구국기도회의 기적적인 열매라고 믿는다는 귀한 소식을 들었다.
초량교회 옆 골목길 자체가 관광지로 안내가 되고 있었다.
옛날에는 부산역과 초량교회 두 건물이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하셨다.
초량교회 내에 작지만 초량교회 역사관이 있었다.
1891년 3월 25일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의 베어드 선교사(Willam M. Baird, 배위량)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경남 뿐만아니라 대구 경북 지역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신다.
울릉도에도 직접 성경을 들고 방문해서 현재 복음화율이 90% 정도나 되는 섬이 되었다고 하신다.
대구의 첫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시고 1897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면서
1897년 10월 한국 최초의 숭실대학을 세우시고 평양신학교와 한국장로교단을 만든데 큰 공헌을 하셨다.
초량교회 김인준 행정목사님께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잘 안내해 주셨다.
베어드 선교사(배위량)부부에게 1892년 7월 딸 낸시가 태어났지만 3살때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하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딸 잃은 슬픔과 경상도 지방 선교 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찬송가 "멀리머리 갔더니"를 창작하셨다고 한다. 그 후에 베어드 여사는 한국 찬송가의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한국 찬송가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남아있다.
찬송가 440장 (새찬송 387장) 멀리멀리 갔더니
1.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 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2. 예수 예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 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3.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떠나 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주기철 목사님이 직접 사용하신 강대상이라고 하신다.
이곳에서 손 바닥으로 오른쪽으로 3번 돌리면 설교를 잘 하신다고 한다. ㅋㅋㅋㅋㅋ
김도균 목사님이 앞으로 설교를 분명히 더 잘하실 것 같다.
초량교회 설립당시(1892년) 부산항의 모습이다. 마치 가마솥 모양과 같은 곳이라고釜(가마솥부)山(뫼산)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진 한장이 참 많은 것을 웅변해 주는 것 같다.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이어주는 관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항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상살 할 수없는 지금의 부산항이 된다. 믿음의 눈은 정말 대단하다.
미국북장로회 부산선교기지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카메라도 귀했을뿐 아니라 디지탈 시대가 아니라 이런 귀한 역사적 자료들을 초기에 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을 자료를 정말 귀하게 여기시고 사료로 남기신 것 같다. 글로 남기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영상으로 사료를 남기는 것도 너무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부지런히 잘 기록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초량교회 바로 옆 골목길인데 인젠 관광지로 변모해 있는 모습이 너무 좋다.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라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만 한 일이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않다.
한국 교회도 역사를 소홀히하고 소중히 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이제라도 이런 역사적인 현장들이 잘 발굴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스토리텔링화 되어 관광자원으로 뿐만이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배울 수 있게 되길 소망해 본다.
초량교회에서 단체 사진을 한장 남겼다. 사진 찍어 주신분께 감사한다.
전체 44분이 이번 선교역사 여행에 동참해 주셨다.(저녁에 도착하신분들 포함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유산들을 함께 보고 함께 나누는 양재 이천 선교회의 동지들 자랑스럽습니다.
점심시간이다. 초량교회 앞에 동해 낙지 집으로 갔다.
교회 바로 앞에 큰 음식점이 있어서 감사한데 맛도 있었다.
낙지탕에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서울에서 먹던 맛과는 말로 설명은 안되어도 혀가 아는 약간 다른 맛이다.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하는 식사 음식도 맛있고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고 이래저래 참 행복한 식사시간이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맛집으로 소개해 주신 강승구 팀장님 감사합니다.
부산진교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부산역 참 많이 변해있었다.
내 기억에는 참 넓은 광장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공사를 하느라 가려저셔 그런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왔던 기억도 있는데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이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차이나타운 거리 안내 조형물. 언제 세워졌는지 몰라도 버스에서 바라보는
조형물인데 참 큼직하게 2곳이나 세워 두었다.
두번째 방문하는 부산진교회, 또 하나의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라고 한다.
베어드 선교사는 미국 공사 헤어드(A. Heard)의 조력으로 부산진에 약80평의 대지에 한옥을 지어 공관에서 일하는 미국인 가족과 한국인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부산교회(후에 부산진교회로 개칭) 의 시작이라도 한다.
1894년 4월 22일 호주 여선교사의 어학 선생님인 심상현이 베어드 목사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1895년 11월 3일 심상현의 가족이 아담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1919년 부산진 일신여학교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8명의 여학생이 부산진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학생이고, 박신연교사는 부산진 교회학교 교사이고 진주와 통영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청년도 부산진교회 교인이라고 하신다.
부산진교회 앞 거리도 부산시에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스톨리텔링이 되도록 역사를 잘 가꾸고 있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역사의 현장이고 우리 신앙의 위대한 유산이 잘 보존되고 정확하게 알려지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인 일이다.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진교회에서 교회 설명의 자리를 허락해 주신 것 감사한다.
함께 사역하시는 역사적 증인들이신 부산진교회 역사 위원분들이신 장로님 권사님을 소개해 주셨다.
개교회 역사 위원회가 구성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귀한 일이다. 너무 귀하신 분들이시다.
6대째 믿음을 유지하시고 계신 자랑스런 장로님도 계셨다. 나는 너무 부럽다.
스토리텔링 "부산진 교회 역사" 부산진교회 역사 위원회 문두호 장로님 준비 됐나요?
유치원 아이들에게 인사 하듯이 장로님께서 직접 만드신 소품으로 인사해 주셨다.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구한말 1900년 전후에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35세 안팎이나 그 이하라고 추정한다고 하신다. 내 생각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어서 그런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1990년 달러가치로 우리나라 GNP는 455로 필리핀(913$), 인도네시아(836$)보다 훨씬 낮았다. 염병(장티브스), 천연두(두창), 홍역 이런 질병으로 많은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선에 선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왔을까? 지금 우리는 동북아나 동남아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무엇 때문에 나가고 있을까?
부산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분이 데이비스 선교사님이시다.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님은 인도에서 1년이상 선교사로 사역하셨고 멜번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누나 매리 데이비스와 1889년 10월 3일 부산에 도착했고, 제물포를 거쳐 10월 5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5개월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하고 서상륜과 함께 근처 마을도 열심히 방문했다. 1890년 3월 14일 ~ 4월 4일까지 서울에서 부산으로 20여일에 걸친 선교 답사 겸 도보 선교여행으로 여행중에 얻은 천연두와 폐렴으로 부산에 도착한 그 다음날 4월 5일 부활절날에 부산에서 소천하셨다.
유해를 호주로 모셔가지 않으시고 부산항이 내려다 보이는 매복산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1910년내 부산의 첫 순교자이신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제수씨와 조카분이 데이비스 묘지를 방문하셨다고 하나 가운데 보이는 이 비석은 현재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부산진교회 앞 마당에 있는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비석은 나중에 다시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한다. 전쟁과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지나면서 귀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잃어 버릴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 교회사의 보물 부산진교회 당회록 제1권 (1904)
새문안 교회의 당회록 보다 더 빠른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당회록 이라고 하신다.
"장로공의회와 경상도 목사들이 심취명을 부산교회의 장로로 택하고 경상도 위원들이 심취명의 교회법과 요리문답 아는 것을 족하다 한 후에 장로의 직분을 세우기로 허락하였으니 부산교회 주장하는 왕길 목사가 주강성일 1904년 5월 27일에 심취명을 교회법대로 장로로 삼았더라" 이런 내용이 당회록 1권 에 기록되어 있다.
부산지교회 문두호 장로님께서 상의를 잘 들었는지 졸았는지 테스트 해 보시기 위해
강의 마지막에 퀴즈를 내셨다.
문제: 부산에서 처음 순교한 선교사는 누구입니까?
정답을 맞추신 분에게 비타500 음료수를 시상 하시고 계신다.
부산진교회 문두호 장로님
은퇴장로님이라고 소개 하셨는데 카리스마가 빛나신 장로님이시다. 목소리도 까랑까랑하시고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니라"(눅12:24)
열변을 토해 주셨다. 귀한 설명해 주신 장로님 감사합니다. 성령충만하시고 강건하세요.
또 다른 장로님께서 부산진 교회 마당에 있는 묘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왼쪽에 있는 묘비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순교하신 헨리 데이비스(호주선교사)의 비석이고
오른쪽의 비석은 부산진 일신여학교 초대교장이셨던 Menzies(멘지부인)과 Moore(모부인)의
선교 40주년 공로기념비(1931)이다.
부산진 교회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한장 남겨 왔다.
한국 선교 역사의 한 페이지씩을 써내려 갈 하나님의 군사들이시다. 아멘,
부산진 일신여학교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5호)
호주장로선교회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초대교장은 선교사인 Menzies(1895~1902)이었다.
1919년 3.1운동과 부산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곳이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이였다.
근대 여성교육과 부산지역 3.1.운동의 발원지로 민족 의식 강화의 역활등 역사적 의의 큰 학교이다.
1905년 4월 15일 현재의 교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부산일신 여학교 학생들이 되어서........
왕길지 기념관 사진 한장이 역사가 되는 현장이다.
맥켄지 목사님은 1910년부터 1938년 일제에 의해서 강제추방 될 때까지
조선의 나환자 치료와 갱신에 헌신했다.
처음에는 나환자 40명을 돌봤는데 1938년에는 6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1930년 전국 나환자가 2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1/3정도인 6~7천명이 경남에 거주했다고 한다.
맥캔지 목사님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수 애양원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등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가족이 있다. ‘한국 나환자의 친구’라고 불리는 멕켄지 목사(James NobleMackenzie, 한국명 매견시)님의 가문이다. 조선에 오셔서 순교하신 선교사님들도 많고,
유진벨 가문처럼 대를 이어서 조선을 위해서 선교하신 가문이 여럿 있는데 맥켄지 목사님의 가문도 그렇다.
이 비석은 나환자들이 모금을 해서 직접 제작한 비석이라고 한다.
브네스코 기념물로 등재가 되어 있는 아주 의미있는 비석이라고 해서 단체 사진도 한장 남겨 보았다.
맥켄시 목사님의 부인 매리 메켄지(Mary Jane Kelly)는 ‘미감아의 집’을 설립해서 한센병 환자들이 버린 아이들을 양육했다고 한다. 1952년 멕켄시 목사님의 두 딸 헬렌(매혜란) 캐서린(매혜영)이 간호사가 되어 그들이 태어난 부산으로 다시 왔다. 일신 부인병원을 설립할 때 이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병원은 무료진료가 60%였으며 현재도 소외된 자들을 위해 50%이상을 무료로 진료를 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약 30만 명의 아기를 받아 단일 병원으로는 국내 최고의 산부인과로 성장했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병원이다. 의료계의 CGN-TV라고도 한단다.
이번 선교 여행에서 가장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가족이 있다.
‘한국 나환자의 친구’라고 불리는 멕켄지 목사(James NobleMackenzie, 한국명 매견시)님의 가문이다.
조선에 오셔서 순교하신 선교사님들도 많고, 유진벨 가문처럼 대를 이어서 조선을 위해서 선교하신 가문이
여럿 있는데 맥켄지 목사님의 가문도 그렇다.
맥캔지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신기독병원 역사설명과 멕켄지 기념관 역사설명 (이정화 전도사님)
1889년부터 호주장로교회에서 한국 선교를 시작 했다고 하신다.
부산에서 최초로 순교한 선교사가 바로 조셉 핸리 데이비스 선교사님이시다.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순교 이후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듯이
1891년 빅토리아 장로교회 청년연합회와 여선교 연합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해 주셨고,
그 이후에도 정말 훌륭한 선교사님들이 부산을 찾아 주셨다고 한다.
1895년 최초의 일신여학교가 설립되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여자들이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에
선교사님들 덕분에 교육을 받게 되어진 것 정말 감사하다.
맥켄시 목사님의 부인 매리 메켄지(Mary Jane Kelly)와
아래 맥켄시 목사님의 두 딸 매혜란(왼쪽), 매혜영(오른쪽)
부산에서 태어난 두 자매는 간호사가 되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서 일신기독병원의 초대원장을 지냈다.
호주로 귀국한 이후에도 전국을 돌며 약 100억이 넘는 기부금을 마련서 병원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로하는 선교는 없고 행동으로 하는 선교를 하신 분들이다.
선교는 군림이 아니고 섬김, 희생, 헌신으로 이루어 집니다.
보잘것 없는 의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더 작은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수 많은 환자들의 감사에 대해 그리고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살 필 수 있었던 은총에 대해 감사합니다.
일신병원의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 부요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바라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수 정신으로 환자가 부자이든 돈 없는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귀한 책을 선물로 주셨다.
민족의 어려운 시기에 이 악기로 얼마나 많은 노래와 찬양이 불러 졌었을까 감히 짐작이 안된다.
오실 때 가져오셨던 가방 하나가 틈 사이로 보인다.
병원에서 급여도 한푼 받지 않으시고 헌신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도 모든 것을 한국에 병원에
두시고 빈 몸으로 돌아 가셨다고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재정으로 운영하는 병원이 아니라 주님의 비전으로 운영하는 병원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잃어 버리지 않는 병원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병원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교하는 병원으로 축복하여 주옵소서.
매혜영, 매혜란 선교사님을 귀하게 사용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일신병원이 계속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병원되게 하옵소서,
귀한 섬김이 계속이어 지게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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