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호남 선교 역사 여행 광주편 (2015.5.1)

다이나마이트2 2015. 5. 3. 22:42

2015년 5월 1일 양재 2,000 선교팀에서 호남 선교 역사 여행을 1박 2일로 했다.

지난해 12월 25일 성탄절에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여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라는 표어를 정한 2015년 새해 첫 주일 설교에서 이재훈 담임목사님은 복음에 빚진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자 입니다.

복음은 반듯이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라고 외치면서 초기 한국 선교 중 조선 땅에 와서 헌신적인 희생을 하신 대표적인 선교사 5분의 사역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셨다.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 기간 중 에서도 손동희 권사님을 통하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신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과 여수 애양원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을 듣게 하셨다.

이런 일련의 선교 역사에 대한 반복적인 말씀을 듣고 양재 2,000 선교팀에서는 한국 선교 초기 조선에 오신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선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보고자 선교 역사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다.

또 얼마 전 CGN TV를 통하여 블랙 마운틴이라는 좋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하여 호남 선교의 7인의 선발대 이야기를 상영한 것도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감동으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아침 7시 45분 양재 세븐일레븐 앞에서 출발을 했다. 임훈 대표 장로님께서 주님과 동행하는 선교역사 여행이 되도록 안전 운전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고 서빙고에서 참석하셨고 해외선교분과 위원장인 정대서 장로님을 소개하시고 불어 예배에서 참석하신 장 마르뗑 베레 목사님 장 다비드 전도사님등 참가자들을 소개해 주셨다.

연휴 첫날이라 고속도로가 많이 막혔다.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하실 예정인 호남선교 역사 강의를 고속도로에서 해 주셨다. 호남에 복음이 들어오게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셨다.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하신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뉴욕에 돌아가셔서 '서울, 평양, 부산에는 몇 사람의 선교사가 있지만 호남에는 단 한명의 선교사도 없습니다"하는 보고를 듣고 '7인의 선발대'가 전주에 들어온 것이 호남 선교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테이트 선교사님에 의해서 전주에 서문교회가 세워지고 김제 익산으로 복음이 확산되었다.

유진벨 선교님에 의해서 나주에서 실패하고 목포에서 영흥학교 정명학교등을 시작했고 광주로 옮긴 이후에 지금 이곳 양림동 일대에서 숭일학교, 수피아여고, 광주기독병원등 사역을 활발히 했다.

많은 내용을 들었지만 아래의 선교사 묘지에서 목사님께 들은 내용들을 선교사별로 다시 정리하겠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첫번째 목적지인 호남 신학대학교에 도착했다.

 1955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 의해 호남지역의 농어촌 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해 광주권에 개설된 호남성경학교는 농촌 교역자를 위한 고등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1961년 호남성경학교, 광주 야간 신학교, 그리고 순천 매산 신학교 등 세 학교가 통합되어 호남신학원으로 발전되었다.

그 후 1963년 호남신학교로 개칭되고, 1984년 상급학교 입학에 있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자와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가 되었다. 1988년에는 교회음악과를 증설하고 1990년에는 4년제 대학, 1992년에는 대학교가 되었으며, 1995년에는 신학대학원 인가, 1996년과 1997년에는 대학원 증과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전국 신학대학 가운데 밥 맛이 가장 좋다는 호남신학대학교 구내 식당에서 특별식으로 식사를 했다.

배가 고픈 것도 있었지만 정말 식사 맛있었다. 참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 탐방지 호남신학대학교 양림동산에 있는 선교사 묘역을 올라갔다.

사진에 22분의 선교사 묘역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선교사님 7명, 선교사 부인 5명, 자녀 7명, 후원자 3명 합계 22명이다.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면류관이 있는 곳은 어린 자녀들인 모양이다.

풍토병으로 인해서 유난히 어린 자녀의 희생이 많았던 것이 안타깝다.

한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의 주된 사망원인은 한국의 풍토병으로 설사와 말라리아(학질)이다.

고온다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대처하기 위해서 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에 수양관을 지었다고 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흔적만 남았다고 하는데 하루 빨리 복원 되길 기도한다.

이 노고단 수양관에서 휴양시설로만 사용 한 것이 아니라 성경번역과 지리산 식물도감(크레인 선교사 부인, 1931년)등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양림동산 선교사 묘역 전경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 쬐는 아담한 장소이다.

초기 조선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영면하시고 계시는 곳이다. 머리가 자연 스럽게 숙여진다. 

100여년전 이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수고가 없었다면 오늘 한국이 존재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분들에게 복음에 빚진자이다. 빚은 반듯이 갚아야 하는 것이다.

유진벨(bell, eugene, 배유지),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오기원),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서서평), 포싸이트(forsythe, w. h., 보위렴), 윌슨(wilson, r. m., 우월순)... 낯선 이역의 땅에서 부르심이라는 소명을 안고 찾아와서 100년을 넘게 이국의 땅에 묻혀있는 이름들을 하나 둘씩 불러보게 한다.

이곳에 오신 선교사님들은 모두가 엘리트 중에 엘리트분들이시다.

유명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분들이다. 장래가 촉망되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안락한 생활과 삶을 포기하고 지금 세계 어느 나라 선교지 보다도 더 열악한 조선 땅에 오셔서 소중한 생명을 바쳤을까요? 영웅심 때문이였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빚진자요. 복음에 빚진자입니다. 아멘.

맨 앞에 광주 최초의 순교자 오웬 목사님의 비가 보인다

광주 외국인선교사 묘지는 남구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학대학 교내 언덕에 위치하여 있다.

여기에는 1909년 광주에서 최초로 순직한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모두 22기의 외국인 선교사 또는 그 가족들의 묘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동료 선교사 니스벳(Nisbet, Anabel M.)은 오웬 선교사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의 시작에 대하여 “그의 목포선교는 오웬이 미국 북장로희 의료선교사로 제일 경험이 많고 유능한 화이팅과 1900년 결혼함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의사이면서 목사로 지칠 줄 모르는 순회설교자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에도 13개 군의 선교지역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면서 한 달 이상을 집을 떠나 전도여행을 계속했 .”라고 하였다. 그는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가 별세하기 몇 일전 그의 어린 딸은 아빠는 왜? 우리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오웬은 1909년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격렬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우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신음했다. 가마꾼들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광주까지 이송하는 기간이 3일이나 걸려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의 치료와,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에게 전보(電報)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가 도착하기 전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Preston, 邊約翰)목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Georgiana W.)은 네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양림동 67-1번지에는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있는 오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그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예배당 및 집회실 형태로 1914년 지은 건물이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광주 숭일학교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기독간호대학 강당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자료출처-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오웬 선교사님 바로 뒤 쪽이 유진벨 선교사님의 묘지이다.

유진벨 선교사님은 1895년 맨 처음 나주로 부임을 왔으나 유림들의 반대로 목포로 쫓겨나시기도 하셨다.

아내 로티 선교사님을 교통사고로 잃으시기도 한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숭일학교. 수피아 여고, 한남대학교등을 세우신 선교사님이시다.

100년이 넘은 현재에도 유진벨 재단을 통하여 이 분들의 후손이 북한에 결핵 퇴치 사업등을 활발히 행하시고 계시다.

가장 가슴 아픈 선교사 자녀의 묘지이다.

1909년생과 1911년생 두 자녀인데 1913년 4월 26일, 4월 27일 하루 차이로 두 자녀가 죽은 것이다.

이질에 걸린 식사 담당 하인이 우유를 짜서 자녀들에게 먹였기 때문에 두 자녀가 풍토병인 이질에 걸려서 하루 차이로 두명의 자녀 모두를 잃었다고 설명을 들었는데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다.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님 묘역이다. 한국 이름이 서서핑이다.

서서핑 선교사님은 독일인으로 이 땅에 와서 대한 간호학회를 만드시고 처녀의 몸으로 14명의 자녀를 입양해 키우시기도 하셨다. 이일성경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도 크게 이바지 하신 분이시다. 선교비의 대부분을 헌금하여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게 하셨다. 남은 담요 1장도 절반으로 나누어 걸인에게 주고 반만으로 쓰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내가 가진 많은 것에 부끄러웠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시신은 해부학 교제로 쓰도록 하셨다는 선교사님이시다.

다른 분들의 묘지석은 다 다듬은 돌이였는데 유일하게 자연석에 이름만 적어 놓으신 분의 묘지가 있다.

순교를 하시면서까지 주님은 선한 목자시라고 고백하신다.

윌슨 하우스 이다.

윌슨(Robert M. Wilson : 우월순) 은 1908년 광주에 와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한국식으로 지은 집이 1920년에 화재로 소각 됨으로 새롭게 지었다고 한다.

이 집에서 윌슨은 어린이 전도협회, 보이스카웃을 조직하였고 축음기를 방문자들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다.

이 집은 일본인 유지들도 자주 들러 영어를 배우고 차도 나누었다고 한다.

우월순이 1927년에 여수 애향원으로 이동하여 광주 기독병원 원장이 대대로 기거하였다.

선교사 축출기간(1942-1945)에는 일본인이 거주하였으며  한국 전쟁 기간에는 북한군 사령관이 기거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윌슨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윌슨 기념관 앞에서.....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수령이 400년은 되었다고 한다. 400년 수령치고는 참 작은 나무인 것 같다.

 

유진벨 선교사님이 세우신 수피아 여고이다.

대강당 옆에 3.1 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양림동은 살아있는 선교 유적지였다. 보존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옛날 그길 그데로 발전이 참 안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넓은 도로보다는 한적하고 운치있는 도로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양림교회의 모습이다. 근대 민족사의 격변기를 격으면서 한 동네에 기장, 통합, 합동측의 교파가 다른 3개 교회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서로 일치와 협력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오웬기념관이다. 향린교회와 광주기독간호대학교와 이웃에 바로 붙어있다.

당시에는 광주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한다. 붉은색 X표가 보이는 코너가 강대상이어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하는 모양이다.

향린 교회에 있는 종이다. 이 종소리가 양림동의 잠자던 영혼들을 깨웠을 것 같다.

어비슨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조그마코 커피숍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시러 가보지는 않았다.

양림동 문화 지도가 거리에 붙어 있다.

맨 위 가운데가 호남신학대학이고 왼쪽 위에가 수피아 여고이다.

향린교회도 그려지긴 했지만 역사성 보다는 상업적인 관점에서 그린 것 같다. 

그레이스 서점이다. 오웬 선교사님 사진이 붙어 있는 서점인데 사업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선교기념비

이곳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1904년 12월 25일 미국 남 장로교회 배유지목사가

처음으로 예배 드린 장소로 그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석을 세워 놓았다고 적혀 있다.

양림동 자체가 근대 역사 거리로 조성을 해 놓았다.

정부에서 호남 선교의 역사 현장등에 대해서 잘 보존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김현승 시인이 광주 분이신 줄 처음으로 알았다. 여러 분들의 작품들이 근대 역사 거리에

전시 되어 있어서 역시 광주는 애향의 고장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호남신학대학교 교내에 있는 양림동 선교사 묘역과 윌슨 선교사 사택 오웬기념관등을 돌아 보고

오후 4시경에 순천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