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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선교 역사 여행 여수 애양원 (2015.5.2)

다이나마이트2 2015. 5. 6. 23:40

호남 선교 역사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전남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면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살아생전 마지막 설교 제목이 바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였다고 한다.

지난 밤 순천에서 여수로 들어와서 숙박을 했던 토플하우스 이다.

"블렉 마운틴" 영상에 나오는 선교사님 중에 한국말로 인터뷰 하시던 선교사님이시다.

토플선교사는 1961년부터 1980년까지 20년동안 애양원 원장으로 섬겼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날때 '이제 너희 나라에 크리스찬 의사들이 많으니 나는 떠난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애양원과 같은 의료 선교를 합니다.

지금도 매주 화요일에는 한국과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애양원 세미나실에서 한센선교 강의 특강과 선교 실행 위원 리트릿이 있었다.

먼저 찬양으로 시작했다. 즉석에서 준비한 찬양이지만 Why Mission? 팀에서 찬양인도 하셨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찬양했다.

할렐루야. 왕이신 나의 하나님. 모두가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 했다.

정대서 장로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밤에 애양원으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어떠한 모습으로 섬길 수 있었는지 생각하는 이밤 되게 하옵소서.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유산이 있는 이곳 애양원에서 하나님을 바라 보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마음을 드리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선교 역사를 듣고 배울 때 기억하게 하옵시고 우리들 마음에 뜨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이 밤이 은혜의 밤 감사의 밤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한센 선교 강의 이종훈 목사님

이종훈 목사님은 Why Mission?에 유명 강사 이신 모양인데 나는 처음 뵙는 것 같다.

내가 Why Mission? 강의를 받을 때는 다른 강사님이 하신 것 같다. 

2015년 온누리교회의 표어가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으로 인데 벌써 120여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선교사님들과 또 한센병자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안으신 이분들은 이미 삶으로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를 실천 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에 빚진자 되어 더 낮은 곳에서 더 많은 희생과 더 많은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던 믿음의 선진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들을때 내 마음에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너는 진짜가 아니구나 가짜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안에는 그런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낮아짐이 없고 그런 사랑이 없다.

목마른 내 영혼 마른 막대기 같은 내 마음 돌 같이 굳어져 버린 내 생각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포사이트 선교사는 1909년 4월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조랑말을 타고 갔다.

도중 포사이트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한센병환자였다.

포사이트는 조랑말에 여인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갔다.

광주에 도착했을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죽었다.

포사이트는 자신이 태우고 온 여인을 치료하기 위해 광주 동남쪽 벽돌 가마터에 임시 거처를 하고 치료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 치료소의 시작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센병 환자들은 과우로 모여 들었고 광주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윌슨 선교사는 한센병을 치료하는 병원 시설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광주시민들의 반대로 한센병 치료시설을 광주를 떠나야만 했다. 2년여에 걸쳐 이주하여 옮긴곳이 지금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이고 이때부터 애양원이라 불르게 되었다.

율촌교회 장로들이 이곳으로 오라고 요청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선교 실행 위원 리트릿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는냐?.....크크크 어설프긴 해도 한 3-40년 만에 해 보니 즐겁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역시 안마가 최고여....... 

밤이 늦었으므로 강승구 홍보 팀장님으로부터 일정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각자 숙소로 향했다. 꼬막 정식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런지 컵 라면이 남은 것 같다.

아침에 애양병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백반으로 식사를 했다.

남도 식사는 어는 집을 가도 식사가 참 맛있다.

특별히 간장 게장에 큰 꼬막으로 우리팀에 잘 섬겨주신 열린 식당 주인님께 감사드린다.

식당 사진을 한장 찍어서 홍보를 해 드렸어야 했는데 실수로 사진 한장을 못찍었다. 

오른쪽길은 애양원교회가 있고 순교유적지가 있는 곳이고 왼쪽 길을 따라가면 도성마을로 간다.

아침 식사 이후에 애양원 순교 유적지 탐방에 나셨다.

위 사진의 왼쪽 아래 성산교회에서 진입광장, 명상의 길을 따라 중앙광장을 지나서 오른쪽 동그라미로 보이는 이벤트 광장을 지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적혀 있는 순교자 기념관을 돌아 보고 삼부자 묘지를 돌아 보고 성산교회로 되돌아 왔다. 새롭게 단장하고 개관한 역사관에서 애양원에 대한 역사기록들을 보면서 많은 설명을 들었다.

오른쪽 위쪽에 보이는 마을은 도성마을이고 하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곳이다.

소록도와 애양원이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소록도는 일제시대에 한센인을 격리하기 위해서 강제로 이주시켜 한이 서린 곳이지만 애양원은 같은 한센인이어도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돌보던 민간 의료 시설이였다.

초기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님들의 사랑이 지금도 많은 영혼의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성산교회 예배당을 배경으로 정대서 장로님과 김장렬 장로님 기념 사진을 찍으셨다.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탑이다.

손 목사님의 순교정신을 널리 알리고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사랑의 열매탑을 만들어 놓았고 손 목사와 두 아들의 순교정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의 씨앗과 줄기, 열매를 형상화 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크게 적혀 있다.

1918년 일본은 신사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웠다.

당시에는 신사참ㅂ는 자유의지였으나 1930년에 들어오면서 점차 강제적으로 바뀌었다.

일제 말기의 신사 참배 강요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신앙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 전체와 기독계열 학교 모두가 당하는 수난의 시기였다.

신사참배 반대는 교회와 학교의 폐쇄로 이어져 신앙과 교육의 기회마저도 앗아갔다.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된 후 여전히 거부하는 신앙인들은 더욱 심한 핍박을 받았다.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교회에 부임한지 1년이 조금지난 1940년 9월 25일 박용희 목사등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인근 지역 목사들이 일제히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감옥에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본을 피판했던 손양원 목사는 해방이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손양원 목사 순교 전시관은 손양원목사 순교 신앙 계승 및 순교 자료 보존과 국내외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1990년에 기획하고 1993년 4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지하 1층에 3개 전시관 지하1층에 4개 전시관으로 되어 있었다.

1층 1전시관은 애양원을 향한 사랑 유물 전시, 신사참배 거부와 옥중 감사

2전시실은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 신사참배와 교회의 수난, 나의 9가지 감사

3전시실은 복음 실천 사건, 용서와 화해의 장으로 구성 되어져 있다.

지하1층 4전시실은 성산초, 중학교, 한성신학교(현재 토플하우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교회들

5전시실은 사랑의 원자탄 연속 상영 영상실, 6전시실은 기도실

7전시실은 손양원 목사 관련 도서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순 사건 당시 손목사의 장남 손동인군은 순천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기독학생회 회장을 하면서 좌익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복음전파를 통해서 학원의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기독학생 활동을 통한 좌익과의 대립등이 원인이 되어 여순사건때 좌익 학생들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중 복음을 전파하다가 동인 동신 형제가 1948년10월21일 순교했다. 손목사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중 1948년 10월25일 동인,동신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고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다.그 기도의 내용은 동신 동신을 죽인 원수를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동인 동신은 죽어서 천국갔는데,동인 동신을 죽인 원수는 지금 죽으면 지옥갈것이 분명함으로 그 원수를 살려내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목사는 기도한데로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아 동인 동신 대신해서 그들의 못다한 일을 다하라고 이름을 손인신이라 지어주었다.손목사는 두아들의 순교와 그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게 된 것을 분에 넘치는 복이라고 했다.

그는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답사를 통해서 그 분에 넘치는 감사를 9가지로 고백했다.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할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 앞에서 기념사진.

하나님 아버지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이 순교자의 신앙을 따라 믿음을 지키고 계승하며 발전하게 하옵소서.

주님 입술로는 주님이라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멀지감치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고 복음의 빚진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옵시고 그 빚 갚으며 살게 하옵소서.

이 민족 가운데 귀한 믿음의 순교자를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순교자의 신앙 본 받아 살아가는 내 삶 되게 하옵소서.

한국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게 하옵시고

진실과 거짓 가운데 물질, 권력과 주님 가운데 선택할 것을 올바로 선택하고 결단하게 하시고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칭찬 받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신앙의 본이 되고 모델이 되신 손양원 목사님을 이 땅에 허락해 주심을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 믿음 본받아 결단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손양원 목사님 삼부자 묘소 앞에 왔다.

아버지 내 신앙은 가짜입니다. 진짜 앞에 서보니 내가 가짜임을 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진짜의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믿음을 더해 주시고 아버지의 그 사랑을 부어 주옵소서. 

손양원 목사 삼부자 묘  (한국기독교사적 제6-1호 '손양원목사 삼부자 묘'의 사적지 지정)

삼부자가 순교한 일은 물론 순교자의 가족이 한 곳에 안장된 것은 드문 일이다.

현재 이 묘역에는 1948년 10월 21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의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의 묘 2기가 앞에 있고, 뒤에는 1950년 9월 28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와 1977년 11월 26일 사망한 정양순사모와의 합장 묘 1기가 있다. 손양원목사는 두 아들을 앞서 보내며 "내가 죽거든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애양원 설명 성산교회 임미숙 권사님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과 유적공원을 돌아보고 성산교회로 돌아와서 애양원의 설립 역사를 들었다.

한센병자들은 말초신경에 감각이 없기 때문에 손이나 팔에 불씨등이 있어 살이 익어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문지르거나 하면 살이 다 벗어져버린다고 하신다. 이 분들과 삶을 함께하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상황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게 되었다. 청각이 살아있고 두뇌로 생각을 할 수 있고 눈을 깜빡깜빡 할 수 있는 것 자체 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먼지등이 들어가서 실명하신 분들은 성경을 통째로 다 암송을 하셨다는 간증도 듣게 되었다. 몸이 불편해서 예배에 못 나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도성마을 각 집에 스피커를 설치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다. 영의 양식을 먹지 않는 자에게는 육의 양식도 필요 없다고 새벽 기도에 나오지 않으면 3끼 밥을 주지 않았다는 말씀에 찔림도 받았다. 말씀과 기도를 겸비하라고 권면해 주셨다.

믿음의 선배들은 나도 나병이 걸려서 너와 함께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사랑했다고 할 때 내게 사랑이 없음을 보고 울었다. 순교의 정신으로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을 보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안기까지 너무나 먼 거리처럼 느껴지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 자장면 값 한끼면 최소 4,000원인데 아끼고 절약해서 복음 전하는 통로로 사셨던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는 귀한 여행 이였다.

애양병원 역사관

1926년 광주로부터 옮겨온 Wilson (우월순) 선교사는 이 언덕에 한센병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명심대"라고 하였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후 2000년 6월 병원의 발전과 선교사들의 사역을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개축하였으며 2014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원들의 도움으로 한센병의 역사와 변천을 알 수 있는 역사 자료관을 건축하였다.

애양원의 가장 모태가 되었던 토굴이다.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하여 광주로 가다가 길가에 버려진 한센병 여인을 조랑말에 태우고 광주의료원에 와서 치료를 하려고 했는데 의료원에서 일반 환자들의 반대가 심해 병원 옆에 조그마한 토굴에서 한센병 여인을 돌보았다고 하는 바로 그 토굴이다.

이 토굴에서 시작된 한센병 치료가 지금의 여수 애양원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오른쪽에서 3번째 앉아 계신분이 도성래 선교사님이신 것 같다.

20년 동안 한센병자를 치료하시면서 맨 마지막 애양원 외국인 원장으로 남아 계셨던 분이다.

우리의 숙소였던 토플 하우스가 바로 이 도성래 선교사님의 이름이다.

안미령 의사선생님은 도성래 선교사님의 아내로 노르웨이 선교회에서 파송한 의사셨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날때 '이제 너희 나라에 크리스찬 의사들이 많으니 나는 떠난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애양원과 같은 의료 선교를 했다고 한다.

"블랙 마운틴" 영상에 한국어로 인터뷰 하시는 분이신데 지금도 매주 화요일에는

한국과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도성래 선교사님은 미국 남장로회 파송이셨다.

과게에는 한센인들이 거주하던 집이였는데 지금은 여수시에서 예산을 들여서

치유의 숲 이라고 하는 잘 조성 된 공간에 팬션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설도 매우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여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율촌에 계시는 박해한 집사님 병원에 방문해서 함께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 말씀 하시는 하나님

여수 순천 지역에 연로하시 어른들이 이 병원을 많이 찾으실 텐데

육신의 질병을 잘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병도 치유하게 하시며

무엇보다 영혼의 질병도 잘 치유하는 병원 되게 하옵소서.

박해한 원장님을 만나시는 어르신들마다 또 이 병원을 찾으시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와 축복들이 있게 하옵소서.

함께 섬기시는 간호사 선생님들과 직원분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사

감사와 사랑으로 내원자들을 대할 때 이 병원을 찾는 모든 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박해한 원장님과 다함께 기념 사진을 한장 남겨 왔다.

벌써 이곳에서 8년 동안 어른들을 섬기셨다고 하셨는데 순천의 슈바이처로 기억되게 하옵소서.

박해한 온누리의원 원장님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셨다.

주문진 갈치 정식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해요.

갈치정식에 간장 게장까지 플러스하고 또 꼬막까지 맛있었고 감사했습니다.  

순천만 자연생태 공원 앞에서

불어예배를 담당하시는 장 마르뗑 베뢰 목사님과 한장의 사진을 남겼다.

마음은 같이 사진도 많이 찍고 싶었는데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어서 찍히는 것 보다는

찍는 것에 집중하다가 보니 많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사진 찍어 주신분께 감사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순천에 들러서 순천만 생태공원을 구경하고 왔다.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장을 찾았다가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순천만 생태 공원은 또 다른 곳이였다. 순천만이 세계5대 연안습지라고 한다.

넓게 펼쳐져 있는 갯벌과 나지막한 산이 함께 하는경관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갯벌이다.

2006년 람사르습지로 등록,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41호로 지정,

2013년 대한민국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순천만 생태공원에서 마지막 단체 사진을 한장 남겼다.

카메라 밧데리를 준비를 못해서 더 많은 사진을 못찍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비 앞에서 한장을 사진을 남겨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니라"(요한복음 12:24) 아멘.

*** 나의 부흥시 먼저 읽을 것 ***

1. 하나님의 지능을 의뢰하고 나의 지식을 믿지 말 것

2.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나타낼까 삼가 조심 할 것

3. 성경 원리를 잘 모르고 내 지식되로 거짓말 하지않게 할 것

4. 간증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 되지 않게 할 것

5. 내 한마디 말에 청중 생명의 생사 좌우 관계 있음을 깊이 알고 말에 조심도 열심도 충성도 다할 것

6. 음식과 물질에도 크게 주의 할 것이니 

1) 주님 대신 받는 대접이니 받을 자격 있는가 살피라

2) 배 위하여 입맛에 취해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으라

3) 물질 선물에는 하등의 관심을 두지 말라.

오 주여!!

이 시간 주 앞에서 범죄자 되지 말게 해 주시고 사람앞에 비 없는 구름같이

은혜끼치지 못하고 돌아갈까 주의하게 하소서.

또 내 유일한 참고서는 성경 66권 되게하시고 내 가르침의 지능은 오직 기도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