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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건릉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2014. 7)

다이나마이트2 2014. 7. 22. 23:09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 사적 제206호)

경기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안녕동)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고 한다.

헌경의황후는 1735년(영조 11) 6월 18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사저에서 영의정 홍봉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 1월 9일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진 해인

1762년(영조 38) 5월 21일 혜빈으로 추서되었다. 그리고 1776년(정조 즉위) 궁호가 혜경궁이 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죽기 넉 달 전인 1775년(영조 51) 11월에 이른바 ‘삼불필지설’을 내세워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씨는 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남편을 비명횡사 속에 보낸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던 1795년(정조 19) 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사도세자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출전: 문화재청

입구에 수령140년(2008년 기준)향나무가 아름답게 있다.

나무 속살에서 강한 향기가 나기 때문에 향나무라고 하는데 측백과에 속한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융건릉의 솦쪽 방향으로는 가지가 고사를 해 버렸고 오히려 도로쪽 가지만 잎이 무성하다.

이 향나무도 사도세자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통안내 *지하철 : 1호선 병점역에서 하차후 시내버스로 환승
* 버 스 : 팔달문,수원역 - 24번, 46번 병점역 - 24번,34번,34-1번,35번,35-1번,50번 관람 안내
*입장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7:30 (관람 09:00~18:30)
                 동절기(11월~2월) 09:00~16:30 (관람 09:00~17:30)
*정기 휴일 : 매주 월요일
 * 입장료 : 1,000원/ 성인 1인., 주차료 : 2,000원/ 소형 1일.

오른쪽이 융릉이고 왼쪽이 건릉이다.

화성 융릉(華城 隆陵)은 합장릉으로 병풍석을 세우고 봉분의 인석 위에는 만개하지 않은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한껏 피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는 듯한 모습으로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 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고 참도도 매우 넓으며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화려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장조(莊祖 1735, 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生父)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 3)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재실에서 표를 판매하고 있다.

입장료는 1,000원/성인 1명

융릉 건능에 대한 역사 문화관이 있다.

적지만 소박한 내용들이 안내되어 있었다. 나 처럼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이곳을 잠시 들러서 간단하게라도 공부를 하고 릉을 돌아보면 더 많은 도움이 된다.

세계유산 융릉과 건능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능이고

건능은 조선 22대왕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융릉은 건릉의 아버지 묘인 셈이다. 

사적 제206호. 장조(莊祖)와 그의 비 경의왕후(敬懿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조(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시의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어느 원보다도 후하고 창의적인 상설(象設)을 하였다.

능상설은 병석(屛石)을 두르고 인석(引石)은 화뢰형(花蕾形)으로 하고 문무석인을 세웠다.

장명등은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 영조 연간에 등장한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석인도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등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다. 능의 뒤에는 곡장(曲牆)을 돌렸다.

19세기 이후의 능석물 양식(陵石物樣式)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과 같이 묘(墓)라고 한다.

건릉은 조선 제22대왕 정조와 그 부인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라는 설명이 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64기이다.

40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의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적 사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출전: 안내책자)

화성 융릉(華城 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무덤이다.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광무 3)에 장종으로 추존되어 융릉으로 높였고 제향일은 매년 4월 둘째 일요일(양력)이다.

수령 100년된 또 다른 향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자 말자 잘 정비되어진 도로가 보인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고

융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합장능이다. 아무래도 아들의 건릉보다 아버지의 릉을 먼저 봄이

예의이지 않을까 싶어서 오른쪽 융릉으로 먼저 발길을 옮겨 본다.

사진으로 보니 거리도 더 가깝기도 하구나.

융릉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포장이 되어있지 않는 흙길이지만 잘 정비되어 있고

길 양쪽으로 울창한 소나무들이 참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르는 다리라고도 소개를 하고 있다.

교각에는 원대황교(元大皇橋)라고 적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융릉이다.

요단강을 건너 참 안식을 얻으러 본향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융릉에는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으며

이 연못은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 남서방향은 융릉의 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 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종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원형 연못도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융릉주변에 조성된 원형 연못 곤신지(坤申池)는 융릉이 천장(遷葬)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으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 장헌세자(추존 장조)의 왕이 되지못한 한을 풀어드리고자

융릉 풍수반룡농주형국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왕릉 가운데 이런 연못이 있는 경우도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한다. 나는 처음 본다.

융릉 홍살문

홍살문은 붉은색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박았다.

능(陵)원(園)묘(廟)궁전 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문은 담장과 문짝이 없어 길 위에 홀로 서 있다.

담장과 문짝이 없으므로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은 아니다. 

홍살문이 있는 곳에서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문이다.

그래서 홍살문은 서원, 향교, 묘 등 예를 갖추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는 장소에 세워진다.

홍살문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전날 밤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표시 했을 때 모든 장자가 죽음을 면하는 유월절(Passover)이 연상이 된다.

융릉 수라간

아마 이곳에서 제수를 준비하는 모양인데 부엌과 방 한칸의 단란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제실에는 단청이 안되어 있지만 수라간은 작은 건물이어도 단청이 되어 있다. 

융릉의 정자각

한문으로 丁 자 모양의 건물이다. 조선왕릉에는 필수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정자각 내부에 있는 제구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무덤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조 광무제는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고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겼다.

<출전: 문화재청>

융릉의 비각이다. 비각 내부에 아래 사진의 예술같은 해서체 비문이 적혀 있다. 

비각에 해서체 글씨도 예술이다. 마치 컴퓨터로 조각한 것 처럼 잘 조각되어 있다.

왼쪽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헌릉원"이라고 적혀있고

오른쪽에는 "대한 장조의 황제융릉 현경의황후부좌" 이렇게 적혀있다.

융릉은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출전: 문화재청

융건릉에서 건릉으로 가는 산책길이다.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 놓았는데 운치가 있고

마치 시골의 한적한 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침 구름이 잔뜩 끼어서 너무 덥지도 않고

좌우에 소나무 숲들도 있고 해서 고즈넉히 홀로 걷는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소나무 숲길이다. 청살모도 한가로이 노닐고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는 솔밭길

어릴적 별이 빛나는 밤에 아버지 등에 엎혀서 라디오를 들으며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 생각난다.

건릉에 도착했다. 홍살문이 있고 정자각이 있고 그 뒤로 능침이 있다.

신도(神道)와 어도(御道)

가운데 보이는 두길을 참도(參道)라고 하는데 왼쪽에 좀더 높은 길이 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에 좀더 낮은 길이 살아있는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이다. 함부로 가운데 길로 걸어 갈 것이 아니다.

좌우에 박석이 깔려 있는데 관광객은 바로 이 박석이 깔린길로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능에 비해서 신도와 어도가 매우 넓게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건릉 정자각의 내부의 모습이다.

제사를 지낼 때 진설하는 방법에 대한 그림과 실제 제사를 지낼 때의 사진들이 정자각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다.

건릉에도 융릉과 동일한 모양의 비각이 있었고 비각의 내부에 이런 비석이 서 있다. 

"대한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 라고 해서체로 예술처럼 적혀 있다.

능침 가까이에 가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능침 가까이에는 갈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멀리에서 랜즈에 보이는데로 한장 찍어 보았다.

정자각 뒤로 릉이 보인다. 능에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막아 놓아서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건릉의 모습

조선 22대왕인 정조(正祖)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서 비참하게 뒤주속에 갇혀서 죽었고,

자신 역시 정적(政敵)들에게 둘러싸여 언제 세손의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다가 겨우 왕위에 올랐다.

지존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고,

그 와중에도 조선의 마지막 중흥을 이끌었다.

그에 반해 정조의 정비正妃인 효의왕후는 정조의 총애를 그다지 받지도 못했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도 못했으니 참으로 대비되는 한쌍이라고 하겠다.

건릉 정자각의 모습이다. 역시 丁자 모양의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재실 (齋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종9품)등이 이곳에 상주하며 능역을 돌본다. 주요 시설로 재실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등이 있다.

융,건릉의 수라간에도 단청을 하지만 제실에는 단청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제실 앞 마당에 쳔연기념물 504호인 개비자나무가 있다.

개비자나무는 개비자나무과의 나무로 한반도 특산종이다. 한반도 중부 이남 산골짜기의 습기 많은 곳에서 자라는 상록침엽수로 높이가 3m 정도이다. 잎은 선형으로 30-40㎜이고 양쪽이 뾰족하며 앞뒷면이 백색이다. 꽃은 단성화로 4월에 핀다. 수꽃은 길이 5㎜ 정도로 10여 개의 포(苞)에 싸여 한 꽃대에 20-30개씩 달린다. 암꽃은 한군데 2개씩 달리고 10여 개의 뾰족한 녹색 포에 싸인다. 밑씨는 한꽃에 8-10개씩 있다. 열매는 다음해 8-9월에 붉게 익는데 식용하며, 주로 경기 충북 이남에 분포한다. 개화기는 3-4월이며, 결실기는 10-1월이다.

출전: 위키백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라고 한다.

주변 맛집 한국인의 밥상 한정식집

융건릉 바로 정문 앞에 있다. 가격은 생각보다 저렴하다.

"밥상 정식과 게장 정식"의 달랑 두가지 메뉴만 있으며 밥상정식은 1인분에 만원이다.

게장정식은 20,000원이라고 한다. 추가메뉴도 있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