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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속리산 법주사 여행 (2014.7)

다이나마이트2 2014. 7. 17. 00:58

하늘이 빚은 천혜의 자연, 맑고 푸른 아름다운 보은 참 오랫만에 국립공원 속리산을 들렀다.

속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맞아 주는 것은 역시 정이품송이다.

참 멋찐 소나무 였는데 폭설에 가지가 꺽이고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고 지난 세월 만큼이나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본다.

정이품 소나무. 학생 때 보았을 때는 그렇게 멋 있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나무도 참 많이 변해 버렸다.

정이품송 (正二品松)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에 있는 소나무이며,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하는 중 소나무 가지가 처져 있어 걸리게 되는 것을 나무가 저절로 들어서

지나가게 했었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고 해서 정이품송이라 불린다.

솔잎혹파리등의 해충들로 인한 병충해 때문에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출전 : 위키 백과사전>

먼저 문화재 입장료는 내라고 하신다. 4,000원

한30년 전에 내가 대학생 때에는 입장료가 정확히는 몰라도 약1,000원 정도 한 것 같았는데

그 때 입장료를 아낀다고 단체로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갔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30년 정도 지나면 잊어 버렸을 것 같은데 입장료 낼려고 하니 그 생각이 먼저 난다.

그 때 함께 울타리 넘어갔었던 친구들 아들 딸 낳고 다들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고 적혀 있다. 가람이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호서란 충청도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충청도에서 제일가는 사찰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현판도 세월 만큼 낡았구나.

속리산 법주사의 전체 조감도 이다. 법주사란? 부처님의 법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 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출전 : 브리테니커 사전>

입구에서 한참을 혼자 걸어 들어가는데 운동하고 계시는 80이 넘으신 고스님을 만났다.

법주사에서만 56년간 수행을 하시고 계신다고 하셨다. 일반인들이 출입이 금지 된 곳인데

스님께서 초대해 주셔서 향기 좋은 차를 대접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하다.

스님들의 일상생활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서재에 있는 책들을 봐도

그렇고 한 30분 이상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보아도 그렇게 불심이 깊으신 분 같지는 않았다.

화엄경 불경이 하나 있고 순 중국 소설 수호지, 삼국지같은 소설 책과 약초와 잡초등에 대한

책들이 눈에 띄게 들어 왔다.  현재 이곳에 스님들이 400여분 계신다고 하셨다. (암자포함)

보은군 문화관광 해설사 김예응 님이시다.

이분에게도 한 30분 이상 법주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3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고 배운 것 보다 더 많이 알려 주셨고

또 이 분이 불교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 고등학교 때에 불경에 대해서 배우고 시험 보던

문제들이 새롭게 하나 둘 생각이 났다.

불교문화에 대해서 또 법주사에 대해서는 대학교 교수님급이셨다. 참 귀하신 분이 이곳에서

사명감을 가지시고 일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문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박식한

분이셨지만 예수님도 이렇게 잘 믿으시면 더 없이 좋겠는데.....

법주사 금강문(金剛門)

사찰에 따라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금강문이 천왕문 밖에 세워진다.

금강문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翼工式)이나 다포식(多包式)을 사용했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惡鬼)가 제거되어

가람(伽藍)의 내부는 청정도량(靑淨道場)이 된다는 것이다.(출전 : 브리테니커 사전)

법주사 천왕문(天王門)

봉황문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출전 : 브리테니커 사전>

보은 법주사 석연지(石蓮池) (국보제64호)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출전: 문화재청>

금동미륵대불

내부에 가슴 있는 곳 까지 108개 계단이 되어 있다고 한다.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높이 8m에 이르는 화강석 가단위에 높이 약 25m의 이 거대한 청동대불은 국내 최대이며 소요된 청동이 약 160톤에 이릅니다, 조성당시 불신을  13등분하고 다시 등분한 것을 4조각으로 나누어 총 52조각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 올라가는 어려운 공법으로 조성했습니다.

제작비 38억여 원을 들여 1986년 10월에 착공, 90년 4월에 완공되었으며 조성공사후 점안의식 과정에서 세차례에 걸쳐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오색 서광이 하늘을 수 놓고 흰광선이 미륵불로부터 치솟았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불제자들이 전합니다

금동미륵대불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님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습니다,그후 이 금동미륵대불에 대한 개금불사가 불기 2546년 6월에 회향되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국보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2)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3)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5)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7) 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내용의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1층과 2층은 앞 옆면 5칸, 3,4층은 앞 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출전 : 문화재청>

쌍사자 석등 (국보제5호)

남대문이라고 불리는 숭례문이 국보제1호인데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국보제5호이다.

팔각기둥을 대신한 두마리의 사자는 서로 가슴을 대고 머리를 젖힌 채 마주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 상대석을 치켜 들고 있습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으며 하대석을 딛고 선 뒷발이 사뭇 탄탄해 보입니다.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시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전 : 문화재청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報恩 法住寺 四天王 石燈)  (보물 제15호)

높이 3.9m.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서편에 위치한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8각의 하대(下臺)와 8각의 간주석(竿柱石), 그리고 4개의 화창(火窓)이 뚫린 8각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과 옥개석(屋蓋石) 등을 구비하고 있다.

4매로 결구(結構)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매석을 별도로 구성한 하대석(下臺石)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의 하단석(下端石)은 일부 손상이 있으나, 8각의 측면마다 안상(眼象)이 낮게 부조(浮彫)되었다.

그 위로 2단의 팔각층급(八角層級)을 두어 규모를 줄여나가다 복련(覆蓮)의 8연판(八蓮瓣)을 조각하였다. 상부 역시 규모를 줄여나간 3단팔각층급을 두어 간주석 받침을 만들었다. 8각간주석 위에 놓인 상련대(上蓮帶) 역시 앙련(仰蓮)의 8연판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밑면에는 3단팔각층급을 두고 상부면에는 2단의 팔각층급으로 화사석받침을 만들었다. 위에 얹은 화사석에는 8면 모두 화창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교대로 조각하였다.

특히,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마치 문틀의 모양과 같이 조각된 1단의 층급을 만들고, 그 측면 일부에 창호(窓戶)를 고정시키기 위한 작은 구멍을 2개 뚫었다.

고부조(高浮彫)로 표현된 사천왕상의 조각수법은 매우 사실적이고, 그 역동감 있는 자세 등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화사석 위에 놓인 8각의 옥개석은 밑면에 3단의 층급을 두었고, 전각(轉角)을 살짝 반전(反轉)시켰다. 처마가 두껍지 않아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 상부에 2단의 원형 보주(寶珠)받침을 만들었다. 그 위에 놓인 보주는 뒤에 새로운 돌로 대치한 것 같다.

이 석등은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보다는 그 조성시기가 조금 이른 형식으로서, 특히 석련지(石蓮池)와 공양상(供養像)이 좌우에 함께 배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것은 불교의 법공양(法供養) 중 으뜸인 향(香)·등(燈)·차(茶)의 공양을 한꺼번에 배치한 이례적인 예로서 더욱 중요하다.

이 석등은 그 형태면에서 불국사석등이나, 화사석에 보살상이 배치된 부석사석등보다는 조금 진전된 양식을 보인다. 사천왕상의 생동감 있는 표현과 연판 위에 첨가된 꽃모양 장식 등에서 보다 장식적인 맛을 더해 주고 있다.

제작시기는 8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화사석등에 일부 균열이 보이나 보존상태가 좋으며 그 크기가 장중한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주사 대웅보전 (法住寺大雄寶殿) (보물 915)

법주사 대웅보전은 부여 무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인 중층(重層) 전각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170평, 높이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며,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따로 외짝문을 달았다.

대웅보전의 양식은 내외 2출목으로 공포를 짜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1층은 내외 2출목이고 2층은 내외 3출목인데, 1층 살미는 수서형, 2층 살미는 앙서형이어서 변화를 보인다. 공간포는 전체적으로 매 칸마다 1구씩 배치되었다. 1층 살미의 수서형은 좀 독특해서 한 번 둔각으로 꺾었으나 윗면은 사선으로 깎았다. 제3살미는 끝에 솟은 연봉이나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쪽의 보머리는 주심포 상부에서 4모를 죽인 8각형이고, 간포 상부에는 당초무늬가 초각된 형태이다. 창방머리의 연화당초각(蓮花唐草刻)도 주목된다.

2층의 살미는 제1, 제2살미가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길게 뻗어 살짝 올린 완만한 곡선형 앙서이고, 제3살미는 끝을 화살 모양으로 뾰족하게 하고 밑면은 둥글게 한 형태의 초각인데, 이 위에 주심포 위에는 끝을 마름모꼴로 마무리한 보머리를 놓았고, 간포 위에는 제3살미와 겹판을 이루면서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한 보머리를 얹었는데 1층에서와 같은 초각은 베풀지 않았다. 한편 공포 위에 3겹 퇴보를 얹고 나서, 퇴보 사이에 낮은 벽(상벽)을 쌓아서 층급을 이룬 다음 벽면을 짧은 동자기둥으로 분할하고 거기에 나한도를 그렸다. 이 상벽 위로 넓은 빗천장을 가설하기 위해 밑면에 연화두식(蓮花頭飾)을 초각한 십자형 받침을 설치하였다. 빗천장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그려 넣었다. 이러한 구조는 2층 빗천장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내부에는 고주를 놓고, 이 퇴보 위에 2층의 평주를 놓아 금산사의 3층 전각인 미륵전과 같은 수법으로 되어 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주사소조삼불좌상 (法住寺塑造三佛坐像) (보물제1360호)

대웅보전 건물 내부에는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내부에 모셔진 이 삼신불은 벽암이 중건할 때 조성된 것이다. 삼신불이란 석가모니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하여,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보신, 報身)과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 석가모니의 진여(眞如)의 몸(법신, 法身),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몸(화신, 化身)을 가리킨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원통보전 [圓通寶殿]  (보물제916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성관음(聖觀音)·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 불공견삭관음의 칠관음이 대표적이다.
이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모셔진다. 협시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에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상은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있다. 불상 뒤에는 대부분 관음탱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제916호로 지정된 법주사원통보전과 낙산사원통보전이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출전 : 문화재청>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제1361호)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腹甲)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중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출전 : 문화재청>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물제14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출전 : 문화재청>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내부 모습

500여 나한상의 모양이 전부다 다르다고 한다.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물제216호)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출전 문화재청>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柱)란 무엇일까요? 당간(幢竿)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파되면서 사찰 앞에 돌이나 쇠로 만들어 높이 세운 기둥으로 찰간(刹竿)이라고도 합니다. 찰간에 깃발을 달아 종파, 문파를 알렸는데, 행사와 불사 때 행사를 알리고 그 주변지역에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알리는 동시에 사원에 모든 액을 물리치려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幢)이란 사찰의 문 앞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용두의 모양을 만든 다음 깃발을 달아서 부처님과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과시하는 장엄구로서 모든 번뇌를 파괴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번(幢幡)은 항상 달아두지 않고 기도나 법회가 있을 때 불전이나 불당 앞에 세우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생을 지휘하고 마군(魔軍)을 굴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 말하는 것은 절에 당간 즉 찰(刹)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 국가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 이곳 철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주사 철학(보물 제1413호)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데 사용 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높이1,2m지름2,7m둘레10,8m, 두께만 10Cm)의 무쇠 솥인 철학은

통일신라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무게만 20톤이라고 한다.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참 희얀한 나무이다.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와야 하는 특이한 상황이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물푸레 나무가 자라고 있다. 문화관광 해설사님은 14년간 자란 나무라고 설명해 주셨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슬리는 상황이다.

자기 몸에서 나온 가지가 원 줄기로 다시 들어가 버린 아주 특이한 상황이다.

법주사 입구에 있는 나무이다.

불교의 초보적인 교리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의 자내증(自內證)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면, 사제설은 이 인연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설을 고안하였다. 그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苦諦)이다. 고제는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苦)는 구체적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8고로 하고 있다.

 

이 중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고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자기 중심적인 애증(愛憎)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뇌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구부득고는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앞의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들이다. 오온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것으로, 오온(五蘊 : 一切法)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둘째는 집제(集諦)이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그러나 갈애는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무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자기 중심적인 욕구이며, 천국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무유애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무유애라 하는데, 무유애 또한 자기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갈애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멸제(滅諦)이다.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넷째는 도제(道諦)이다.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으로서 원시불교의 근본교의를 이루고 있다. 사제 중의 고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이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집·멸·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