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QT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1~10)

다이나마이트2 2008. 12. 9. 23:25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고린도후서 5:1~10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계속해서 대조적인 비유를 사용함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신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의 직분과 새 언약의 직분

질그릇과 보배

겉 사람과 속 사람

잠깐 보이는 것과 영원한 것 등등등이다.

 

오늘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의 대조가 보인다.(1)

세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아멘.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인간의 육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육체는 이 땅위에 호흡하고 있는 동안만 필요한 임시 거처이다.

장막집은 영원히 거하는 하늘에 영원한 집이 아니다.

 

그럼 영원한 집은 무엇인가?

이 땅에 있는 집이 아니다.

아파트 평수가 얼마인가? 전세인가 월세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소개한다.(1) 아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체의 모습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 믿는 자들이 입게 될 부활의 몸이다. 아멘.

 

그러므로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2)

나도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자. 아멘.

 

또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하신다.(3)

벗은 자란? 구원받지 못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지 못한 사람을 가르킨다.

벌거 벗은 자로 이 땅에 남으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바울이 그랬듯이 벗은 자로 남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이는 것을 위해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자. 아멘.

이 땅의 육신에 관심보다 장차 영생의 몸으로 덧입혀지기를 소망하자. 아멘.

 

그렇다고 바울은 염세적 사상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오직 덧 입고자 함이다(4) 라고 하신다.

죽을 것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생명에게 삼킴바 되기를 바란다(4)라고 하신다.

생명에게 삼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마도 바울은 살이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

영생의 몸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이것이 믿는 모든자들 참 소망이 아닐까?

나도 이런 소망을 가져본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5)

또 확실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5) 할렐루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이루시겠다고 하신 것은 확실히 이루어 질 것이다. 아멘.

바로 그 증거가 성령님이라 하신다. 아멘.

 

바울은 분명히 영원한 하늘의 집에 대한 애타는 소망이 있었지만

결코 그것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엉망으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아멘.

 

바울은 고백한다.

내가 장막의 집에 거하든지 떠나서 영원한 집에 이르든지(9)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9) 아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누구든지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10)에 설 것인데

이 땅에서 충성한 자는 상급과 잘했다 칭찬받는 자리가 될 것이요

주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돌려 드리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아멘.

주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기쁘게

이런 삶을 살자.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을 떠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옮기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벗은자로 발견되기 이전에 생명에게 삼킨바 되길 소망합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길 원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잠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