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가장 높은 왕 (눅2:1~6) 2025.03.18

다이나마이트2 2025. 3. 18. 17:21
2025 40일 특새[9]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가장 높은 왕 (눅2:1~6)  말씀: 정재욱 목사
 
오늘 아침에, 눈까지 내리니까 진짜 곧 성탄절이 올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너무나 익숙한 성탄절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이어서 김종호 목사님이 “[목자]에 대한 말씀”을 나눠주실 예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의 직계 혈통이었던 [요셉]은 약혼자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예루살렘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에, 해산할 때가 됐는데, “방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호텔을 예약할 수 있는 어플도 없었고, 호적 등록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몰렸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방을 구하지 못했고,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으며, 그 아기를 [구유]에 눕히게 됩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하지만, 인류를 구원할 그 아기의 출생이 “마굿간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황제까지 움직이셔서, 호적 등록을 하게 하셨고,
만삭인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이끌어 오셨기 때문이죠.
 
이것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게 하심을 통해,
아기 예수를 그 구유 위에 눕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렇게 철저하게 낮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신기한데, 왕궁이나 호텔도 아닌, 마구간이라니, 
이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숨겨진 [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부터 이렇게 낮은 곳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뭘까요?
(1)첫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예수님께서 이 땅의 영광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예수님은 늘 겸손하셨고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2)두 번째로/ 예수님은 ”낮은 자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아져 있었고, 교만해져 있었기에, 낮은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낮은 자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부르며, 늘 주님 곁에 있었어요.
100여 년 전에, 미개한 땅인 조선 땅에, 선교사님들이 오셨는데, 그분은 의사였고, 간호사였고,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살아갔다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셨어요.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자신의 기득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열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이런 ”섬김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낮아지려고“ 하기 때문이죠.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선포하는 [제 자신]은 ”낮아지고 있는가?“를 되물으면서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낮아지기 보다는 ”높아지기를 추구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작은 예수 40일 설교자”로서, 제 마음속에는 ①더 잘하고 싶은 마음, ②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높아지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높아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기독교]를 “역설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할 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주께서 낮추시고, 
우리가 낮아질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기 때문이죠.
 
또 [은혜]로 우리가 높임 받은 것조차도, [주님]은 우리가 낮은 자를 위해 그 자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이재훈 위임 목사님의 위임을 받고, 이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겉으로는 [높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더 많은 분들을 섬겨야 하는 직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분수]와 [폭포]의 차이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①[분수]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수]는 자기 힘을 다해서, 위로 물을 뿜어내지만, 그러나 이런 [분수]는 인위적인 힘을 통해 올라가지만,
올라갔던 물들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②반대로/ [폭포]는 인위적인 힘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폭포]는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떨어질수록, 그 힘은 더 강력해지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강력한 것. 그것은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신 ”[폭포수]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낮아짐]의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분수처럼, ”인위적인 힘”을 통해 스스로 높아지려는 삶이 아니라,
[폭포수]와 같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낮아짐]의 삶을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따라,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더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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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 오신, 가장 높은 왕 (눅2:1~6)  말씀: 김종호 목사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위대한 소식]이 먼저 전해진 것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목동“들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식]이 비중 있게 전해지려면, ”누구를 통해 알려질 것인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해집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목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정한 자“로 인식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
 
[세리]처럼 신뢰받지 못했으며, [목자]는 낮은 계층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이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도 놀랐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나?, 왕궁으로 가야 하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목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기꺼이 한 밤중에, 들판에 있던 목자에게 하나님이 오신 소식을 전합니다.
이 [위대한 소식]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알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반응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일부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계시]를 듣지 않았고, 외면하고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천사들의 소식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입니다.
 
16절에,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과연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습니다.”(눅 02:16)
 
이 말씀처럼, 그들이 서둘러 가서, 천사들이 말한 표적을 확인한 것입니다.
[마구간]은 어지럽고 분주한 장소입니다. 동물들의 시끄러운 소리와, 불쾌한 악취가 가득 차 있는 곳이 마구간입니다.
 
고위 관료나 귀족층이라면, 이미 근처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자]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마구간이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20절의 말씀에,
“목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듣고 본 모든 일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눅2:20)
 
▶목자들이 이렇게 믿음으로 반응하게 된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가장 높으신 왕“이 ”가장 낮은 곳“으로 직접 내려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삶]은 소외되었고, 가난했으며 ,누구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과 외로움 때문에, ”낮은 곳으로 오신 왕“이 더 반갑고, 감사하며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들의 마음에는 의심과 불신이란 전혀 없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같습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가난한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낮추기도 하고, 우리의 삶에 [영적 가난]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이 때로는 힘겹고 어렵지만,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비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은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축복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 주님으로 인하여, 
①우리가 약할 때 강하여질 수 있고, 
②가난할 때 부유하게 되는 은혜를 더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자리]까지 순종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의 이 본문의 말씀은 이 시대의 흐름과는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시대는 높은 곳을 향해 가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세상]은 “누가 이길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잇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나 중심적으로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머리로는 알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우리가 묵상하며, 어린 양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가장 높으신 왕“, 이것은 [엄청난 역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역설]이 있어요. 
그것은 ”높은 곳만 바라보는 이 세상“에서, ”낮은 곳에 계시는 어린 양“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경배하는 삶이 또한 엄청난 역설입니다.
 
이런 [역설의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우리의 마음”을 부하게 하시려고,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을 높으신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