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풍성한 생명 (요10:7-10) 2023.01.18

다이나마이트2 2023. 1. 18. 09:19

2023 새벽기도[38일차] 풍성한 생명 (요10:7-1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풍성한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중에 “나는 [양의 문]이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 “양의 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데, 목자들은 [풍성한 양식]을 얻으려고 목초지를 찾아서,
이동하며 떠나기도 합니다. 그때, 양들을 지킬 [우리](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목자 자신이 [우리의 문]이 되어야 합니다.
 
[목동]은 자신이 그 [출입 문]에 누워서 잠을 자고, 양들이 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기에,
“[양의 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럴 때, 양과 목동은 ”아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게 되어,
[선한 목자]는 어떤 표식으로 구별하지 않고, ”양의 이름을 불러서 찾아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를 인식하고 따르는 모습은 “생명의 풍성한 관계”를 잘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풍성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이지만, 결핍과 기근에 억눌려 있으면 [풍성함]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이고,
광야에서의 생활이 어려운 여건과 부족함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채워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풍성함]이 있다.”는 설명입니
 
9-10절의 말씀에,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6:9-10)
 
여기서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의 문]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구원의 문]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과 가까이 동행하며, ”그분과 연합하는 삶 속에서, [꼴]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너무 배타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이지만, 진짜로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9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누구든지”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 14절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해 그곳을 찾는 사람은 적다.“(마7:13-14)
 
여기에도 [구원의 문]이 있는데, ”그 [문]은 “[좁은 문]이라“는 거예요. 
그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아주 좁은 문이라”고 했어요.
 
▶왜, [좁은 문]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좁은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간은 죄악에 사로잡혀서, ①자신의 노력과 ②자신의 공로와 ③자신의 의를 끊임없이 내 세우고,
주장하기 때문에,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구원의 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에 읽은 오늘의 본문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6:9-10)
 
그러니까 예수님은 ①구원의 문이고, ②그 문은 열려 있지만, [좁은 문]인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분을 믿을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이고, 
그리고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풍성함]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그것은 1차적으로는 우리에게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며,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고,
어려운 가운데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많은 것이 있어야만 [풍성함]이 아니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풍성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싹이 트지 않고,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수확이 없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라는 고백이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 안에 양떼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풍성함]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아는 [본 헤퍼]라는 독일의 젊은 신학자가 있는데,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는데,
더 신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합니다. 
 
그때가 1930년 정도이니까, 거기서 뉴욕의 [풍성함]을 경험하니까, 자유주의 신학을 경험하게 되고,
“유일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점점 잃어버릴 상황인데도,
그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미국의 [풍성함]을 보면서,
조국인 독일은 나치 정권에 의해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음만 먹으면 고국의 그 아픔을 외면하고, 미국의 [풍요함]에 젖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는 “나의 인생에 풍성함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뉴욕의 풍요로운 생활을 내려놓고,
다시 독일로 들어가서, 그때부터 그의 삶은 고난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많은 독일 교회의 목회자들이 나치에 충성을 서약하고 있었을 때, 
그는 저항을 결심하게 되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세상의 이념과 정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나치 정권에 저항하여, 그는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남겨놨던 정신이 “바로 [풍성함]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한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풍성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대의 잘못된 사상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풍성함]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이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일이 [풍성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사가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풍성함]이고, [풍성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것으로만 가득 채우는 삶이 아니라, 흘러 보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가지고, 남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흘러 보낼 수 있는 것이 [풍성함]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그래서 [구원의 문]이 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생명을 얻게 되고, 더 풍성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를 채우는 정도의 [풍성함]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과 우상의 흐름에 기쁘게 저항하는
그것이 바로 [풍성함]인 것입니다.
 
우리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에도 이런 [풍성한 생명]이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