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롬11:1~24) 2022.12.04

다이나마이트2 2022. 11. 27. 19:43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롬11:1~24) 이재훈 목사

로마서 91011장 이 세 장의 내용은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이스라엘의 두 신앙의 모습을 보며 사도 바울은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언정 감당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이 왜 이런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현실은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91011장에 걸쳐서 여러 의문을 던지며 대답해 가고 있습니다.

9장에서 던진 질문은 하나님의 약속은 파괴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파괴된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혈통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난 혈통적인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똑같은 혈통이라도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반응한 이들과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에 따라서 그 백성이 구성되었습니다.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택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하였다.

하나님이 약속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울라고 지금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전부를 구원하시지 않고 일부분을 택하여 구원하시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 구원이 증거되도록 하시는 것은 불리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구원받아 마땅한 이들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 받아 마땅한 일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구원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하나님이 일부만을 먼저 택하여 구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이 심판과 열망을 받아 마땅한 상황인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주권으로 택하여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또 다른 이들에게 그 구원이 증거되도록 하신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로우신 것이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이라는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이 그 시안 가운데 처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완악함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으며 거룩한 분을 찾으시기를 기다리십니다그리고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그 구원의 손을 우리에게 내밀고 계십니다. 그 구원의 손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약속을 주셨고, 믿어야 하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셨고, 또 믿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다 마련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그러므로 누군가 구원을 받는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누군가 도움 받은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전적인 자기 자신의 책임 때문입니다지난주 하나님의 구원의 내 미신 손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가 물에 빠질 허우적거리며 스스로의 힘으로 그 빠진 물에서 나올 수 없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그 빠진 물에서 나올 수 있는 그 구원의 손이 온다면 마땅히 잡아야 하고 잡을 수 있다면 잡아야 합니다.

스스로 그것을 잡지 않았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서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그 손으로 저 멀리 하늘에서 내 손을 잡아봐라. 노력해 봐라 .스스로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이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해봐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잡을 수 있고 잡아야 하는 그런 위치에까지 그 구원의 손을 내밀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손으로 그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함에도 왜 그 손을 붙잡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의 타락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죄의 믿음은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믿음은 자신을 부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의 구원자를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손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저렇게 연약한 이들도 하나님이 변화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다 거부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연약한 이들을 그 마음을 가르치기 위해 고난도 주시고, 재난도 주시고, 그들이 스스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자기 우리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상황을 통해, 개인의 관계를 통해, 때로는 육신의 아픔을 통해서,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계시는데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 팬데믹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구원의 손의 한 형태입니다.

전 세계적인 이 재난을 하나님께서 이들을 낮추시고 끊임없이 높아지고 높아진 무엇인가 새로운 기술이 발전되고 무엇인가 개발이 되고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해 나가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하나님을 계속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2의 바벨탑 사건과처럼 코로나 팬데믹 등을 통해 멈추게 하시고, 낮추게 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구원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하시는 코로나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믿는 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서빙고에서 제가 설교했지만 태국 CGN-TV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수백 명씩 자발적 방송만 듣고도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방송국에 찾아와서 방송국 직원들이 복음을 다시 전하고 결심을 시키고, 기초 양육을 해야 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이 완고하고, 완악한 이 견고한 죄악의 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1장에 이르러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불편을 보고 또 다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첫 번째 질문 1절에 나옵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스라엘은 왜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 자신의 교만과 어두움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69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가미가 된다”969:22)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밥상이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이 풍성한 은혜의 상징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주신 풍성한 은혜가 도리어 그들에게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된다고 합니다발목을 잡는 덫이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가 되게 된다는 것,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밥상, 풍성한 은혜의 밥상을 보면서 자기 의를 내세우고, 다 자신을 의로 여기는 그러한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밥상 앞에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내가 얼마나 능력이 많은지, 내가 얼마나 잘나고, 똑똑하고, 위대한지를 생각하게 했는데, 그 밥상을 보며 덫이 되고 올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을 향해 심령의 말씀을 통해 모세를 통해 여러번 경고하셨습니다너희가 장차 그 땅에 들어가게 되면 기름진 땅에서 그 과실과 아름다운 것을 먹데 되리라 약속하시고 너희 하나님을 기억하라 수없이 말씀 하셨습니다하나님을 믿지 말라 광야의 지적에 들게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약속의 땅에서 너희가 심지 않음을 못 주게 하시고 너희가 심은 곳에 더 넘치도록 풍성한 밥상을 너희에게 주실 때 믿지마 그렇게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그 풍성한 밥상이 그들에게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 잘못 된 분입니까? 아니죠그 은혜를 은혜로 올려드리지 못하고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신의 의를 세우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 밥상이 덫이 되고 올가미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가 아닙니다. 풍성한 밥상의 문제가 아닙니다자기의 의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밥상을 덫과 올가미가 되게 하는 것은 조국의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소득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질수록 하나님께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하고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들이 어느덧 밥상이 풍성해질수록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는 모습,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들의 노력으로 그러한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잘나서 큰 민족을 이룬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의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더 겸손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이 자가 의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 그 인간 안에 숨어 있는 무서운 죄악이고 아픔입니다. 밥상이 덫과 올가미가 되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악함에 처해 있는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두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사람이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이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셔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셨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를 듭니다. 구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 살했던 엘리아 선지자입니다. 엘리아 선지자는 당시 약한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그 부인 이세벨 시대에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바알신을 섬기던 그 시대에 갈멘산에서 850명의 바알 제사장들과 영적 대결을 벌였습니다. 누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지? 불을 내지는 자가 진짜 신이다라는 그 상황 속에서 바알의의 제사장들은 온 몸부림을 치며 불을 내려 달라고 바알신에게 요청했지만 불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고 분명한 엘리아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경험을 했다면 아합과 이세벨은 회개를 해야 될 텐데 그들은 회개는커녕 엘리야를 죽이려고 전환이 되었습니다. 엘리아는 두려워서 도망가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엘리아를 먹이고, 재워주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상 19장에 가면 호렙산 동굴에 숨게 됩니다. 18장 갈렐산에서 놀라운 영적 승리를 경험하였던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절망과 좌절과 침체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엘리야야 너가 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느냐? 너는 왜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너를 대신하여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할 것이고. 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이 내게 남아 있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주 냉정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꼭 너가 아니어도 돼 실패와 절망과 침체 가운데 있는 엘리아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 참 수고 많았다. 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호렙산 동굴에 숨었겠니! 내가 너 다 이해한다. 얼마나 아합과 이세벨이 두려우면 네가 여기에 숨어 있겠니! 내가 어떡하면 좋겠니! 그런 위로의 메시지를 어쩌면 기댈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를 대신하여 엘리사를 세우고, 7천 명이나 남아 있어. 이 말은 세상은 너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주셨을까? 이 말씀은 선지자로서 이제 너무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해고당하는 듯한 그런 말씀이 아닙니까? 엘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애 같은 영혼을 얼러주고 그래 너가 얼마나 힘들었니! 하나님께서 엘리아의 문제를 지적해 주시고 엘리야가 왜 이런 영적 침체에 지금 빠져 있습니까? 자기 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엘리아의 말속에 숨어 있어요.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사실이 아니지요. 7천 명이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고 엘리사도 남아 있는데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나밖에 없는 라고 하는 것과 같고 그리고 나만 이 일을 할 수 있어 하는 것과 같고, 나를 통해서 말해야 되고, 자신이 너무나 중요해진 것이 의아했는지 자기 의에 빠지면 자기가 너무 중요해진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착각은 뭡니까? 자신이 세상에 없으면 세상에 안 돌아갈 것 같은 착각, 이 세상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내가 없는데... 이런 착각까지 빠지게 되는 거기에 대한 치료증은 뭡니까? 너 없어도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어. 엘리아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주 그전에 하나님이 엘리아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렇게 쓰다듬어주면서 먼저 회복을 시켜주셨죠. 회복시켜준 이유가 이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간차를 두고 진실을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아로의 그 문제를 지적하시면 자기 의에 빠진 엘리아의 모습이 사실은 동족 이스라엘에 모습과 같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족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이 자기 민족과 함께하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자신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의에 빠졌고, 교만에 빠졌고, 결국 자기 의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놓쳐버리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엘리아는 갈멜산의 영적 승리를 경험한 이후에 어느 순간에 자기 의에 빠져 또 엘리아니즘이라고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붙일 수 있습니다. 자기 의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을 통해 어느 한 부족을 통해, 어느 한 민족을 통해서만 일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교만한 자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이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십니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은혜로 엘리야가 어떻게 갈멘산에서 불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순종하여 말씀을 담으실 때 하나님의 통로가 된 것뿐이죠. 그전에는 아합과 이사벨이 악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악해졌으니까? 그게 아니죠. 그전에도 너무 악했습니다. 그런데 담대하게 갈멜산에 대결에 나갔던 사람이 왜 그에게 유혹한다고 오래 사물에 숨어 있는 거죠. 이러한 과도한 절망, 과도한 열등감, 과도한 침체는 교만입니다. 과도한 절망은 그 이면에 과도한 자기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열등감과 교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열등감이 아주 심한 사람은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영적 침체에 심하게 빠져 있는 것은 그만큼 자기 의가 높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은 넘어질 것이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자신의 모든 상황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비하와 교만에 빠진 것은 자기 의가 높을수록 깊은 영적 침체 즉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영적 문제에 빠져 있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엘리야가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아직도 7,000명이나 남아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동족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이 바로 이 엘리야의 영적 상태와 흡사하다고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자들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의 일에도 그렇고 엘리야 처럼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남은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1절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완전히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인가? 그것도 아니 라는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이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쓰러져 내버려야 할 정도로 넘어진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9:11) 21절에서 24절까지 이 이스라엘의 넘어짐, 자기 의에 빠져 교만하여 밥상이 덫과 올가미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한 신비로운 해석이 등장합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이 앞으로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적으로 계속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넘어짐이 끝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역사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목적이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만드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슬라엘의 넘어짐은 하나님의 축복의 사슬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 그래서 이 24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면 세 단계의 축복의 사실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축복의 사실은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이 구원의 주된 흐름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러져서 이스라엘의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므로 거기에 접붙임을 하게 되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언약의 축복이 접 붙이는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에게 임한 이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참 올리브라고 비유하고 이방인들을 돌 올리브라고 비유를 합니다. 돌 이라는 것은 진짜 돌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가짜는 아닌데 영양학적으로나 상품 가치가 없는 그러한 나무 열매를 가르게 돌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유대인들은 참이라고 우리를 돌이라고 그래서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가짜라는 의미는 아니죠. 그런데 먼저 택함을 받았던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줄기가 되었던 그들의 가지들이 부러짐으로 불신하고 완악함으로 자기 의에 의해 가지가 부러짐으로써 접 붙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증거가 사도행전의 역사에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임했지만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한계가 있었어요. 율법에 여전히 자기 의를 쌓는 율법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습니다. 행전 21장을 보면 안디옥에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바나바가 파송이 되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크게 부흥시켜서 이방 선교의 중심 센터가 되게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역사의 주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 중심이고,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로마서를 쓴 이 대상도 이방인 교회가 중심이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원 줄기였던 예루살렘교회에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경험한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온 이방에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의 통로가 되어 접 붙임을 받음 성도들에 의해 복음이 이방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 실제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두 번째 축복의 자세는 다시 이방인에게서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그 복음의 역사가 흘러가는 겁니다. 어떻게 흘러 가느냐면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이 일으켜진다는 겁니다. 11절과 14절을 보시면 11절을 이렇게 돼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1)

14절을 함께 일겠습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든 내 동족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4) 동족에게 시기심을 일으킨다는 거죠. 시기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까? 내 것이 아닌 나의 권리가 없는 것에 대한 시기심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내가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권리 내 것에 속한 것에 대한 시기심은 선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 속에서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배우자로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면 마땅히 시기해야 되는 거죠? 그러나 그 배우자가 나는 당신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많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나는 이해해. 나는 시기심이 없어. 그걸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마땅한 시기심이 있어야 되는 거죠. 바로 이러한 시기심을 의미하는 정당한 시기심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마땅히 주신 그 축복, 언약의 축복, 구원의 그 은혜를 마땅히 드려야 되는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시기심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두 번째 축복의 사실이 지금 현대의 역사 속에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을 메시아닉 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 마음 가운데 이 거룩한 시기심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갈릴리 주변에 살고, 나사렛에 살고 있었죠, 그들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의 명칭을 우리들은 찬송을 부를 때 전 세계 이방인들은 찬송도 그렇고 그리고 평생 한 번 성지 순례라 하면서 한번 가볼까 말까 하면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잖아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서울의 남산도 한번 안가 본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가보겠다. 한강 물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요단강 물을 가지고 온다 그러고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이상 하쟎아요? 우리는 갈릴리 바다에서 매일 식당도 하고 일상으로 먹고 사는 건데, 저 사람들은 그 갈리리 호수에 가서 배 타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고 도대체 저들은 왜 저러는 것일까? 그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그리스도를 보고 시기심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다시 유대인에게도 복음이 전 세계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축복의 사실은 또 다시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다시 이방인으로 흘러가는 축복의 사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거는 앞으로 미래 이루어질 사건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예언적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은 이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 이루어짐으로 또 다시 열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 이런 이방인들의 두려움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12절의 말씀은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 사람들의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의 충만함은 얼마나 더 큰 부요함을 가져오겠습니까?(12)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있다면 충만함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겁니다. 믿고 있어야겠지만 모두 더 큰 이방인에 부유한 구원으로 전파될 것이다. 23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접 붙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접 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본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 붙임을 받았다면 히물며 원가지들인 이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쉽게 자기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23,24) 하나님은 잘려나간 상태로 버리신 분이 그 가지들 중에 믿음으로 응답받은 자들을 다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한 번 믿음을 거부하고 떠난다 그래서 너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그래서 완전한 멸망 가운데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이르기 전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시 접붙이시고 또 접붙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다시 주께로 돌아올 기회가 남아 있고 또한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단계의 축복의 사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러나 이 바울의 예언적 고백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1단계 2단계가 이루어졌다면 3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22절이다. 22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의 준엄하심이 있으나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 역시 잘려 나갈 것입니다.”(22)

바울은 이방인들이 자랑하고도 말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원망으로 이렇게 아끼지 아니하였던 자기 의를 내세우고 믿음으로 은혜 안에 연설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기억하라. 또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인자를 상기시켜주는 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인자하신 분이 언제든지 다시 접붙일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준엄하심과 인자하심을 함께 통합하여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이고 그리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여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머물 수 있게 되었지 누군가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 앞에서 그것은 전적인 자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스스로 보고 완악함으로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하신 앞에 서 있게 된 것이기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온전히 붙잡고 참포도나무 되신 그분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만 머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