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분과위원회

복음주의적 선교적 교회론 (2021.05.22)

다이나마이트2 2021. 5. 26. 21:48

교회의 부르심

-복음주의적 선교적 교회론-

주제 강의 : 이현모 교수(침례신학대학교)

옛날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릴 텐데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중간에 어디인가 묘하게 우리에게 찌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옛날 이야기를 듣다가 목에 뭔가 걸리는 거 같이 불편한 것이 있으시면 제대로 듣고 계시는 거고, 이야기를 듣는데 끝까지 아주 편하게 술술 넘어간다면 잘못 듣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긴장 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옛날에 바닷가 어촌마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의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어부들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앞에 바다가 문제가 있는 바다였습니다. 곳곳에 암초가 숨어 있었고 예기치 않게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이는 위험한 바다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 앞의 바다를 지나지 않고는 큰 바다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배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마을의 바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할 때는 조심스럽게 암초가 어디 있는지 살펴 보면서 마을 앞의 바다를 지나갈 수 있었지만 예기치 않게 갑자기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몰려오면 많은 배들이 암초에 부딪치고 배가 깨지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가 암초에 부딪치고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작은 배를 용감하게 바다에 띄우고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을 용감하게 건져내 주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 우리 마을에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하셨나 보다 라고 까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너무 고마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도 그 마을에 정착해서 살면서 다른 배들이 파손되면 용감하게 바다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출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동네 모든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내가 보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썩 지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폭풍우가 치는 날에는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기 때문에 마을에까지 배들을 안전하게 끌어다 놔 두었는데 그러다 배가 마을 앞에서 파손되었다고 하면 마을에서 조금 무거운 배를 끌고 바닷가까지 나가서 바다에 나가니까 우리가 벌써 늦습니다. 우리가 가면 벌써 태반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우리 그러지 말고 바닷가 에다가 배 창고를 하나 지읍시다. 높은 파도가 처도 배가 깨어지지 않을 만큼 든든한 창고를 바닷가에 지어 놓고 배를 거기에다 보관했다가 폭풍우에 배가 파선 됐다고 하면 가볍게 바닷가까지 얼른 뛰어 나가 거기 창고에서 배를 꺼내 바다에 띄우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제안을 들었을 때 그럴 듯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힘을 모아서 바닷가에 든든한 창고를 하나 지었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더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우리 지금까지는 폭풍우가 치는 날 우연히 바닷가를 지나다가 배가 파손된 것을 보고 마을에 뛰어 와서 젊은이들을 모아서 바닷가에 나가서 출발하니까 우리가 늦었습니다. 어차피 폭풍과 치는 날은 우리가 고기 잡으러 나갈 수가 없는 환경인데, 우리 젊은이들이 배 창고에서 망을 봅시다. 망을 보고 있다가 배가 깨어지는 것을 보고 즉시 그 곳에서 출발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을 때 그럴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배 창고에서 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가 파손되면 조금 작은 쪽 배들을 즉시 띄워서 사람들을 구하러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정말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또 한 사람이 다른 아이디어를 들고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 배 창고에 이어서 대피소를 하나 지으면 좋겠습니다. 쉘터를 하나 지어 놓고 그 곳에 쌀을 보관하기도 하고, 의자도 몇 개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실제로 추운 바다에 파선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다에 들어갔다가 왔는데 그 추운 날씨에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육지에 건져놓고 또 바다로 들어갔다가 나와 보면 바다에서 건진 사람을 바다에서는 생명을 구했는데 육지에서는 얼어 죽기도하고 심각한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겨울 바다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따뜻한 난로 옆에서 몸을 좀 녹이고,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쉘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듣기에는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쉘터를 만들었습니다. 따뜻한 난로를 준비해 놓고 의자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생명을 건진 많은 사람들이 이 대피소에서 숨을 돌리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대피소에 다가 간단하지만 주방시설을 하나 하면 좋겠습니다. 바다에서 건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스프라도 대접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망을 보느라고 힘든데 간단한 음식이라도 해 먹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피소 에다가 주방시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배 창고에 필요한 시설이 하나씩 하나씩 갖추어지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폭풍우가 치지 않는 날에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배 창고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따뜻한 난로가 있고, 편안한 의자가 있고,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간단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이 있고, 때로는 음악도 있고, 좋은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가시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가시가 나올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자 내 창고에 모든 사람들이 점차 나이가 들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게 되자 배 창고에 모여서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것 보다가 마을에서 자기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고, 처자식을 갖게 되었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배가 파손되고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빠져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아도 이제는 용감하게 그 작은 쪽 배를 타고 바다에 뛰어 들어 가는 것이 망설여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망을 보러 나가는 것도 점차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자기 비즈니스도 해야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 마을 사람들 가운데 불편함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용감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보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지혜롭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인데 저 익숙한데 사람들도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 험한 바다 속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차라리 돈을 냅시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서 전문 구조대를 고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아이디어에 동조하게 되고,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으기 시작하고, 전문 구조대를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전문 구조대들은 글자 그대로 전문 프로페셔널 입니다. 기가 막히게 험한 바다 가운데 들어가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잘 건져냅니다. 다만 마을 사람들에게 변화가 하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위험한 바다에 뛰어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해변가에 길게 늘어서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쳐 주고 응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쪽에 사람이 빠진 것 같다. 뭐 하냐? 아 저쪽에도 사람의 머리가 보이는 것 같은데 저쪽으로 가라! 왜 이렇게 꾸물 되냐 저쪽으로 가라! 라고 소리를 지르고 목청을 높여서 응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까지도 괜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전문 구조대를 운영하기 시작하자 예기치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전문 구조대를 고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밑 빠진 독처럼 돈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사 줘야 하고, 새로운 재원을 공급해 주어야 되고, 새로운 훈련을 시켜줘야 하고,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점차 점차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다 전문 구조대 한 분을 운영하는데 회의 몇 번 운영위원회 몇 번 모임은 왜 그리도 많은지 마을 사람들은 점차 점차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불편함이 목까지 차 오르게 되었을 때에 마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이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제가 보기에는 우리 마을 만한 작은 규모에서 전문 구조대를 운영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한계를 넘어섰다고 인정합시다. 전문 구조대를 해체해야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펄쩍 뛰고 반대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거기에 동조하게 되고,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전문 구조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이제는 아무도 바다에 뛰어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가지면 마을 사람들은 배 창고에 모였습니다. 거기 가면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편안한 의자가 있고, 음악이 있고, 간단한 식사가 있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들 도대체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배 창고를 지었고 뭐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목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탈퇴하겠습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탈퇴를 하고 용감하게 배가 파선이 될 때 바다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그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근데 해보니까 우리도 배 창고는 있어야 될 거 같아! 그게 더 효과적인 거 같아! 우리도 망을 보는 것이 필요한 거 같아! 해 보니까 배 창고에는 대피소가 꼭 있어야 되고, 그들도 하나 하나 필요한 것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자 그들도 또 다시 나이가 들고, 자기 비즈니스를 하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자 그들도 마침내 돈을 내고 전문 구조대를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들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전문 구조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마을에는 이제 두 개의 구조 클럽, 두 개 배 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바다에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바다가 잔잔한 날에는 바다에 호박을 띄워 놓고 두 개의 클럽에서 누가 더 호박을 많이 건지는지에 대한 게임을 하게 됩니다. 그 게임에서 더 많은 호박을 건진 팀은 자랑스럽게 트로피를 받아서 자랑을 합니다. 배 창고 앞에 걸어 놓기 되었습니다. 일단의 젊은 애들이 또 들고 일어섰습니다. 당신들 도대체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배 참고를 만들었고 왜 여기에 모였는지 목적을 다 상실한 거 같습니다. 우리는 탈퇴하겠습니다. 그들이 다시 바다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년 이맘때까지 할 수 있는 아주 긴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그 마을을 방문해 본다면 바닷가 모래사장에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배 창고와 구조 클럽하우스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다에 뛰어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마을 앞의 바다에서는 여전히 배가 파손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 선교분과 위원회 모든 분들 이 배 창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이해하시겠죠? 아마 여러분들은 경험 사항이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결코 믿는 자들이 모여서 나 구원받았네 너 구원받았네 하면서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구원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거나 광택을 내거나 자기의 구원을 보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좀 의외일지 모르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조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 신앙 공동체로서 구원과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교회 구성 자체는 구원 받은 자들의 신앙과 예배 공동체가 거기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온전히 인정하는 자들에 삶의 모습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로 모았을 때 그 공동체는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모임을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 가운데 보면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그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에서 좀 더 잘해 보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행사를 만들고 훈련을 만들고 뭔가를 잡고 전통을 만들고 채워가기 위하여 시작합니다.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만 제가 굳이 이야기 한다면 교회가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갈급함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정말 자기네들이 모여서 해야 될 일의 그 핵심적인 사명이 녹아서 빠져 버리고 그 사명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해서 만든 행사와 프로그램과 전통과 조직과 이런 것들이 남아서 그 껍데기가 교회를 대채하는 일들을 흔히 벌리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패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이 성경 가운데서도 거듭해서 이런 선교적 사명에 실패 이야기들이 성경에 쭉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여러분 아십니까? 내가 몇 가지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나눠 보겠습니다. 첫 출발점은 창세기 12 1절에서 3절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입니다. 이에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리고 당신의 특별한 민족을 형성하는 이스라엘 출발의 시점이 되는 것이 창세기 12 1~3절 말씀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너무나도 익숙한 구절이기 때문에 줄줄 외우기도 하는 구절 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1~3) 창세기 12 1 2 3절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근본과 신앙인의 신앙 삶의 근본이 달라지게 됩니다. 조금 뜻밖이지만 제가 이런 질문을 해보죠? 여러분들은 쉽게 대답할 수 있으시겠지만 창세기 12 1 2 3절 중에서 정말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 원하시는 핵심이 어느 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줌으로 하기 때문에 제가 일일이 여쭈어 보지는 않겠습니다만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해 보겠는데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12 1절에서 3절까지의 핵심은 1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11장에 가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창세기 121절 입니다.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이었지요. 지금부터 거의 3,800년 전에 부족 사회로 끊임없이 약육강식의 시절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떠난다라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미래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라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출발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브라함이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중동의 지리를 잘 아시는 분들은 쉽게 대답하기가 쉽습니다 중동의 땅을 하늘에서 이렇게 내려다 보면 Affluent Crescent Area 라고 풍요로운 초승달 지역입니다. 농경과 도시의 중심 지역이었고 초승달 지역의 한쪽 끝이 갈데아우르 지역 입니다. 아브람이 아버지와 함께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풍요로운 초승달 지역을 쭉 따라 앞으로 간 것입니다. 가운데가 하란 이었고 다시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12 1절에서 3절까지 내용을 두 번 부르신 거 같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면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하란에서 또 다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냥 앞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땅이 어디인지를 안 것은 조카 롯을 통해서 했습니다. 롯하고 헤어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 보아라. 내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 할 때에 그 땅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그 지경을 안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땅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아내의 묘지 막벨라 굴 하나만을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줄어들지 않고 엄청난 민족을 이룰 것 이라는 약속에 근거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만큼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서 창세기 12 1절 근거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3가지 단어가 신앙 생활 가운데 중요합니다. 믿음, 순종, 헌신입니다. 믿음, 순종, 헌신. 내가 대학생 시절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훈련을 받을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단어가 바로 이 세 단어였습니다. 믿음과 순종과 헌신. 믿음, 순종, 헌신. 어떤 분들은 신앙 생활이 뭐냐?라고 하면 신앙 생활은 믿음, 순종, 헌신이라고 대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면 좀 이상 할 지 모릅니다만 믿음과 순종과 헌신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가야 하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의 신앙의 목표도 아니고 순종, 헌신이 믿음의 목표도 아닙니다. 저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부르셔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 가운데 필요한 것 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외로 많은 분들은 내가 겉으로 말하기는 거북해도 그럼 2절 이구나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2절은 빨리 지나갑니다. 2절은 복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셨으니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그를 복 주시고, 그가 복이 되게 하시고, 이것은 이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 목적을 성취해 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로 필요하기 때문에 채워 주시는 것에 불과한 것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실제 목적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안 보지만 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목적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을 떠난 민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을 복 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막 해석 합니까?라고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질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진공 가운데서 펑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0, 11, 12장의 쭉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0장에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범죄를 하고 민족과 언어가 흩어지고 11장에 가보면 열방의 목록이 나오고 언어가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서 불러오기 위하여 그 방법을 찾으면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12 3절에서 복은 열방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복을 의미합니다. 저의 해석이 좀 이상 하다고요. 아니요. 여러분 잘 보시면 창세기 가운데 창세기 12 3절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저는 4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다섯 번이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번, 이삭에게 한 번,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 한번, 제너레이션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부르신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민으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고 언어와 민족이 갈라진 모든 민족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선교적 도구로 아브라함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마치고 약이 하나님의 열망을 버리고 이스라엘만을 택해서 그들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하게 축복하셨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시 흩어진 열방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 그 도구로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가운데 살 때는 어쩌면 겸손하게 하나님이 그들을 열방을 구원하는 도구로 부르셨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배가 부르게 되었을 때, 어떤 영적인 간절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들은 창세기 12 1절과 2절의 말씀을 붙잡고 선민 사상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의 무엇으로 변질 되냐 하면은 그들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민이라는 특권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방과 구별되고, 자기들의 거룩함을 증진시키고 그것이 이방인들에 의해 훼손 되지 않도록 하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신앙의 핵심이 되어버렸지요. 그런데 구약성경을 잘 보시면 선교적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불렀는데 이스라엘이 그 선교적 사명을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선민 사상에 주저앉아 버릴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그들을 다시 원사명 가운데로 회복시켜 주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을 보는 사람들은 항상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들의 선교적 개념을 다시 회복하라고 그것들의 구절을 모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밤을 새도록 해야 할 만큼 구약에 가득합니다. 구약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쭉 이어지는 하나의 맥이 보여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설교를 할 생각은 아니기 때문에 간단하게 몇 개의 구절만 보여 드리지요. 출애굽기 19 5 6절입니다. 이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19장으로 출애굽이 끝납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에서 부르셔서 내 백성을 데리고 나와라 했을 때 모세가 이해한 출애굽은 그 백성을 데리고 애굽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 호렙산까지 도착하면 출애굽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다음 명령을 받아야 되지요. Second Commandment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호렙산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장막을 치고 거기서 기다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Second Commandment를 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근히 기대했던 Second Commandment는 이것입니다. 아 내가 너희를 위해서 가나안 땅을 가나안 복지를 예약했으니 거기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런데 뜻밖에 하나님이 모세를 초청해서 주신 그 명령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는 첫 번째 하는 말씀이 내가 열방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너에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라”(19:5~6). 예 여기서 보시면은 여러 조건들을 이야기했는데 핵심은 뭐냐 하면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여기에 진짜 핵심은 뭐냐 하면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근본적인 목적은 그를 제사장 나라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간에 서 있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구약 시절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장의 중간에서 그들의 죄의 재물을 받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용서를 받아서 전해주고, 그들의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답을 받아서 전해 주는 것이 제사장이고, 백성과 하나님의 사이를 연결 시켜주는 자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임을 보여주면서 그 열방과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중요한 것은 제사장 나라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그들을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은 도구가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택하신 목적은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은 귀를 닫고 이 사명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속 이것을 회복하라고 그들에게 이것을 상기 시켜 줍니다. 역대하 6장에서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할 때 이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의 상징이고 비로소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국가 신앙이 되는 핵심적인 상징인데 솔로몬의 유명한 봉헌 기도 가운데 626 27절에 가면 뜻밖에도 이방을 위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 기도에 보면 하나님 유대인이 죄를 범해서 그 죄를 뉘우치고 그 얼굴을 돌려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들의 죄를 깨닫고 그 얼굴을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신다는 사실 입니다. 저는 듬성듬성 이야기하지만 시편과 이 역사서에서 아주 곳곳에서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죄를 범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사야서에서도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서 4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할 때에 회복 시켜 준다고 하실 때 하나님이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49:6) 아주 쉽게 이것을 풀어서 이야기 한다면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를 그 포로 가운데서 다시 회복시켜서 이스라엘의 옛 땅으로 돌아가게 남은 자들을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가벼운 일이다. 내가 정말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나의 구원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기를 원한다 이것을 내가 정말 원한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9 6절을 구약의 지상 위임명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한 구절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요나서 입니다. 요나서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 여러분 요나가 구약에 두 번 나온다는 거 아시지요? 열왕기하에서 여로보암 2세때 요나가 나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처음 시작할 때 왕이 여로보암이고 두 번째 사람이 여로보암 2세라고 그럽니다. 이 요나는 여로보암 2세때 선지자인데 뜻밖에 하나님의 북 왕국 에다가 축복과 번영의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땅이 얼마나 넓어지고 실제로 요나의 말대로 영토가 넓어지고 사실은 우리 역대기나 열왕기가 물질적인 번영, 경제적인 것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솔로몬 다음에 최고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굉장히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선지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 라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고 계신 것처럼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요나서를 구약 성경의 유일한 타문화권 선교의 책이라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해석합니다. 요나서는 선교적인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의 실패를 보여 준 것이 요나서 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나서를 시작하는 열쇠인데 요나가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고 앗수르는 그 당시에 고대 중동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사람의 껍질을 벗겨서 죽이기도 하고 쇠 막대기를 세워놓고 성 위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죽이기도 하고 그래서 두려워서 못 갔을 것이다. 요나는 그런 수준 아닙니다. 만약 자기 동족에게 가서 하나님이 심판을 예언 하라면 순교의 각오를 하고 뛰어 갔을 사람입니다. 4장에 나오지만 내가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면 이방인이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왜 그들에게 미리 심판을 알려주는가? 그래서 요나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갑니다. 니느웨는 동북쪽으로 약450km 떨어진 곳입니다. 수천Km 떨어진 다시스 스페인으로 도망을 갑니다.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그 다음에 폭풍이 일고 물고기가 뱃속에 들어갔다가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갑니다. 그리고 그거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상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재를 뒤집어 쓰고 죄를 회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니느웨에 내리려고 하던 심판의 메시지를 유예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요나서가 해피 엔딩으로 3장에서 끝나야 되는데 뜻밖의 요나서는 4장이 나타납니다. 근데 여기에 보면 요나가 뜻밖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화가 났습니다. 제가 쉬운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면 요나가 하나님께 되어 든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 이럴까 봐 내가 안 간다고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인자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에게 심판을 알려 주고 만약에 그들이 회개를 하면은 하나님 그 심판을 멈출까 봐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안 간 거 아닙니까? 이럴 수 없습니다. 요나는 여기까지 이야기 하지만 제가 그 뒤에 요나의 심정을 이야기 해드린다면 요나가 외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니느웨는 당신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지옥에 땔감인데 왜 그들이 회개한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이 회개하도록 미리 알려주고 이렇게 하십니까? 이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회개한다고 용서 하시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요나가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성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대모를 시작합니다. 요즘처럼 이렇게 팻말을 들고 있으면 뭐라고 씌었겠습니까? “니느웨 용서 결사반대니느웨 멸망 추진위원회위원장 요나 이렇게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줍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1 2 3장이 다 서론입니다. 요나가 전설에 의하면 대머리라고 그랬는데 이 대머리가 뙤약볕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낮에 박 넝쿨을 씌워줍니다. 커다란 잎으로 요나의 머리를 가려 줍니다. 그래서 요나가 해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서 박 넝쿨을 씹어 먹게 하고, 동풍을 보내서 잎을 말려 버렸습니다. 요나가 화를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요나야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요나가 겁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죽도록 화를 내는 것도 합당합니다. 그러자 딱 한마디 합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전부 다 입니다. 뭐냐하면 요나야 너는 네가 심지도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않은 박 넝쿨 하나를 아끼는데 그렇게 당연하다면,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 못하는 백성이 12만이나 있는데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그들도 내 백성이고 내 소유이다 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는 거기서 딱 끝이 납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구약이 요나서에서 끝난다고 해도 됩니다. 물론 요나서는 북 왕국 역사의 대략 3분의 2정도의 나오지만 요나 이후로 북왕국 왕조는 급속하게 쇠태를 합니다.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사실 요나 사건 때 사실 선교적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택했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선교적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드라마에서 주인공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요나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시작을 하십니다 대신 이스라엘은 이제 구원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놓치게 되고 그리고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동일한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 시대의 교회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물론 교회는 첫 번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도구가 되기 위해서 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그들이 내가 구원 받았다는 거 자랑하고 그것이 마치 신앙의 완성인 것처럼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반듯이 교회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들은 처음에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항상 그 다음에 그들의 사명을 성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배가 부르게 되고 영적인 갈급함을 놓치게 되고, 사명은 쏙 빠져 버리고 선민 사상을 붙잡고, 자기 자신의 구원이 신앙의 최고의 모습인 것처럼 외치는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아주 오래 전에 1988년에 그러니까 벌써 33년 전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 이였고 한인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8년에 벨리스라는 나라에 선교 사역을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벨리스라는 나라를 처음 들어보시는 분도 계실텐데 멕시코와 온두라스 사이에 있는 조그만 나라입니다. 중남미에 있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독특한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한인 교회가 선교에 참여 한다는 것은 드문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돌아오고 나서 텍사스에 있던 모든 한인 교회 목사님들이 모여서 모임을 하는데 제에게 선교보고를 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가서 목사님들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내가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벨리스에 가서 이런 이런 일들을 했고, 이런 결과를 얻었고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를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뒤쪽에 앉아 계시던 한 목사님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질문을 하기 보다는 책망을 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보시오 젊은 목사! 지금 당신 앞에서 선교, 선교, 선교 이야기를 하는데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지금 어떻게 들리는지 아십니까? 내 귀에는 당신 하는 이야기가 우리 교회 크다. 우리 교회 돈 많다. 우리 교회 사람 많다. 우리 교회 힘 있다 라고 자랑하는 소리로만 들려요. 당신 교회야 크고 힘있고 돈도 있고 하니까 선교도 한다 뭐도 한다 하지만, 내 교회는 작은 교회고 돈도 없고 교인도 없는데 우리는 교회 문짝 하나 떨어져 나가도 그거 바꾸기도 힘든 교회요. 그런데 무슨 사역을 하라는 것이요? 무슨 선교를 하라는 것이요? 우리는 모여서 예배 하기도 힘든데 제발 우리 교회 크다. 우리 교회 힘 있다. 우리 교회 사람 많다. 자랑하는 소리가 역겨우니까 그만 하시오. 제가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 목사님께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선교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 하기 위해 존재 할 뿐입니다. 큰 교회는 크고 힘들고 돈 많이 들고 사람이 많이 필요한 선교를 하는 거고. 작고 힘 없고 사람이 적은 교회는 작고 사람이 적게 들어가는 선교 사역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선교 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고 하나님의 주신 기회 가운데서 자신의 능력만큼 선교하기 위해서 존재 할 뿐 입니다. 교회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선교는 교회가 행하는 여러 기능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형편이 된다면 선교라는 기능까지도 감당하고, 형편이 안 되면 선교까지는 안 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예배와 친교에서만 머물러 있겠다 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라는 말의 미션이라는 단어는 여러분 영어를 다 잘 하시니까 아실 텐데 영어 사전에 보면 미션이고 하는 단어는 선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미션은 사명, 임무라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미션이라는 말을 선교라고 번역하지만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교회의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만든 목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좀 신학적인 역사를 본다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교회의 신학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사실에다가 신학의 모든 것의 초점이 신론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를 쓰지 않지만 Dest est ens!라는 말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이것에다가 모든 신앙의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교회의 개념을 거기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이 전부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뭐 하는 곳이냐 하면 예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 교회다 라고 정의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아주 멋지게 이런 신론을 뒤집어 엎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칼 바르트(Kari Barth)입니다. 칼 바르트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새롭게 정리했습니다. Actio Dei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라는 말 이기도 합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행동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언젠가 오래 전에 창조를 하시고 그리고 또 언젠가는 십자가에 대속의 사건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리고 또 보좌에 앉으셔서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제 알아서 그 뜻에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하고 살아 있는 분이 구경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 보면 하나님의 Actio Dei 끊임없이 행동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종말의 시기까지 당신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시는 일을 계속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칼 바르트로 시작해서 하텐슈타인(?)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선교의 개념을 바꿔버립니다. 이전에는 선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 명령하는 그 명령을 교회가 받아서 그 명령을 교회가 성취하는 것이 선교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직접 당신의 일을 하신다 라는 미시오 데이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실제로 행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교회들은 뭐냐 하면 그 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행하신 선교사역을 뛰어 들어가서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건 아주 심한 말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해야 되지만 교회는 예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기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을 선교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말은 뭐냐 하면 교회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좀 더 선교사역에 강조를 두고, 더 많이 선교사를 내 보내고, 더 많이 선교회 경비를 대자는 것이 선교적 교회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라리 Missionary Church라는 말이 선교적 교회론 이라는 것은 Missional Church라고 그러는데 좀 더 본질적으로 교회의 존재 사명을 하나님 맡겨 준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그것이 교회다 라고 바꿔 놓는 개념을 선교적 교회론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교회론을 재정립한 것이 선교적 교회론인데 20세기의 유명한 조직 신학자인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같은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꽃이 없으면 불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선교가 없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사실 이게 영어로 표현하면 참 멋있는 말인데 우리 말로 표현하면 그 맛이 조금 사라지기는 하지만 불꽃이 없으면 Flame이 없으면 불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이죠, 선교가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선포합니다. 칼 바르트(Kari Barth) 라던지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라던지 우리는 조직신학자라고 이야기 하는데 본인들은 자기들은 선교학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Emil Brunner의 말이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불꽃이 없으면 불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선교가 없으면 교회는 존재 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 말이 갖고 있는 무서운 말은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교회가 맡겨진 사명인 선교사역을 감당하지 않고 있다 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좀 더 심하게 얘기해 볼까요? 너무 강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번 옮기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교회가 주일 날 모여서 예배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의 말씀을 나누고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신 사명이 그 교회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고상한 종교적 욕구를 채우고 있는 Christian Social Club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선교가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자기의 종교의 욕구를 채우고 있는 Christian Social Club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기 때문에 해외선교 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개념 자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를 예배, 친교, 교육 이런 것들은 사실은 힘을 얻어 선교하기 위해서 준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창세기 12 1절 해석할 때에 믿음과 헌신과 순종이 신앙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되는 절재적 요소이지만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날 예배와 친교와 교육과 이것이 사실은 교회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냐를 갖고서 지난 7~80년 동안 진보신학과 보수신학이 머리가 터지도록 싸웠습니다. 오늘날에는 보수나 진보나 어느 정도 동의하는데 복음전파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이 둘 다를 선교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 가운데 크리스토퍼 라이트 같은 분은 복음 전도가 궁극적인 선교입니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가 아무리 사회 봉사를 많이 해도 그 가운데 영혼 구원이 없으면 이것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의 우선순위라는 말은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순서상 세상을 섬기는 것이 먼저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이 없이는 온전한 사명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대한 성경을 무시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빼 놓으면 선교는 일어 나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은 한국에서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는 더 커다란 세상에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Prime Mission 이라고 이야기해도 조금도 과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 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선교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여러 가지 선택 사항 중에 하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었고 개인적인 예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선교적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교적 교회론의 여러 종류가 있다고 했는데 우선순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선교적 교회론 안에 흐름이 있는데 어떤 분류에 따라서 사명을 어떻해 정의하고 대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복음주의적 선교적 교회론 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는 지금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영혼 구원의 궁극성을 잃어버리면 사명은 온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적 선교론적 교회로는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특별히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Prime Mission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선교적 교회론을 그리고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개념이 선교적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돼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잘못 된 교회론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분이 좀 존재합니다. 내가 세 가지 잘못된 교회를 말씀 드리고 오늘 얘기를 마칠 텐데요 좀 조심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의외로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 교인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나는 이것이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잘못된 겁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릴 3가지 유형은 잘못된 교회론 입니다. 여기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첫 번째는 교회 존재 이유를 교회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론 입니다. 한 동안 유행 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앞선 교회 들은 오늘날 이런 생각을 안 하지만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살아 있으면 성장 해야 되니까 그렇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른이 되기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다 보니까 커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 자체를 선교적 교회 존재이유 라고 하는 것은 마침 말과 마차 위치를 바꿔 놓는 거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성장 하면 항상 부러워하는 것이 여러분 잘 아시는 릭 워렌 (Richard Duane Warren)목사님의 새들백 교회입니다. 한때는 한국교회에 많은 목사님들이 비행기를 전세 내 다시 피해서 새들백 교회 방문단을 구성해서 방문하기도 하고 갔다 오시면 뭔가 프로그램을 배워서 우리 교회도 무슨 예배를 하겠다, 무슨 예배를 하겠다, 건물을 이렇게 바꾸겠다, 성가대를 없애버리겠다, 교육 프로그램 이렇게 바꾸겠다 그렇게들 하셨는데, 릭 워렌하고 저하고는 같은 신학교 출신입니다. 릭 워렌이 목숨처럼 외치는 개념을 제대로 배워 오는 분들을 별로 못 봤습니다. 릭 워렌이 목숨처럼 외치고 있는 것은 The success of Ministry has nothing to do with the size of church, size of congregation, size of annual budget. 목회가 성공하고 있느냐?는 것은 회중이 얼마나 많으냐? 교회당이 얼마나 크냐? 1년에 예산이 얼마냐? 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릭 워렌이 진짜 외치는 소리는 이것 입니다. The success of Ministry only something to do with the purpose of God. 목표가 성공하고 있느냐?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그 가운데 성취되고 있고 목적이 성취되고 있느냐?와 만 상관 있다. 온누리교회는 참 잘 하고 있는 교회이지만 이 개념을 항상 붙잡아야 될 것 같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지금 성공하고 있느냐?라는 것은 10년 전에 비해서 지금 회중이 얼마나 늘었느냐? 5년 전에 비해서 지금 교회 건물이 얼마나 더 커졌느냐?, 작년에 비해서 올해 예산이 얼마나 더 늘어 났느냐?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목회가 성공하고 있느냐?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교회에 주신 사명이 성취되고 있느냐? 와만 상관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선교적 교회론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정말 우리 가운데에서 성취되어 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는 구약의 성전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들은 깜짝깜짝 놀랍니다. 교회가 구약에 성전이 아닌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굳이 구약의 성전과 같은 개념을 신약에서 찾는다면 거듭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약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굳이 구약에 빗대어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전에 가야지만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한 곳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죄가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성전에 가서 죄가 없는 삶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해야 됩니다. 그것이 성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날에는 구원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존재여야 됩니다. 대신에 오늘날의 교회는 굳이 비유를 찾아 본다면 전투 상황실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상황 병사로 구경을 조금 해봤습니다. 전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모의 전투를 하는 상황실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 조그마한 부대에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실을 가보면 한마디로 도떼기시장 같습니다. 커다란 테이블에 지도들을 펼쳐 놓고 작전 장교들이 둘러서서 여기를 막아라, 여기를 공격해라, 여기를 보강해 줘야 된다, 여기를 지원해 주어야 된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 의논하고 또 한 쪽에서는 끊임없이 요청이 옵니다. 여기 사상자가 많은데 철수 시키고, 새로 병력을 공급해 달라. 우리 탄약이 떨어졌는데 탄약을 공급해 달라. 우리가 지금 밀리고 있으니까 지원사격을 해 달라. 끊임없이 요청이 오고 물자가 들어 오고 배분되고 배치되고 정신이 없는 도떼기시장입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 만나러 오는 것도 아니고 거룩한 삶을 연습하러 오는 것도 사실 아닙니다.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요.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모여서 어떻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영적인 전쟁의 거대한 사단과의 세력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승리를 거둘 것인지 그것을 논의 한다고 목청을 높여서 함께 분배하고 풀어서 전투 상황실과 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오래 전에 한 번은 저희 동네에 있는 어느 장로교회에서 성전 봉헌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불러서 그곳에 참여했습니다. 그 날 따라 대전에 폭설이 와서 축사 하실 분이랑 모든 분들이 못 왔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당황해서 저를 불러내서 그래도 당신이 신학교수 했으니까 축사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제가 보니까 교회를 참 예쁘게 잘.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참 예쁘게 잘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 하셔야 될 일은 이 교회를 얼마나 깨끗하게 보전 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이 교회를 닳아 없어지게 하느냐?가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구약의 성전처럼 하나님 만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교회는 비지니스가 아닙니다 라는 사실을 저는 부목사로 생활하면서 선교 목사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어떤 교회 가보시면 선교 목사는 제가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전달하지는 마시고 선교 목사는 재정 장로님과 천하의 원수 지간입니다. 맨날 재정 장로님들이 야단을 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어려운데 당신은 돈만 조금 있으면 홀라당 가져가서 밖에 갔다 줍니까? 우리 교회에 지붕에 비가 새고 있고, 주차장에도 뭐가 필요하고, 어디에도 무어가 없고, 교실이 모자라서 애들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어디 뭐가 고장 났고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어떻게 당신은 교회 돈이 조금 있으면 홀라당 밖에 갔다 줍니까? 제가 참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 교회는 비지니스가 아닙니다. 교회가 만약 비지니스 라면 더 많은 이득을 남겨서 구성원들을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좋지만 교회는 비지니스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자원을 오늘 얼마나 많이 교회 밖의 하나님 나라 밖에있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느냐가 교회의 근본적인 존재의 목적입니다. 한국 교회는 자기 교회 성장 교회의 성장 개념 그리고 말은 안 하지만 자기 교회 내부를 향하는 비즈니스 책임 개념으로 교회가 만들어지는데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것이 어쩌면 선교적 교회 이론의 핵심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래 전에 거의 200년 전에 영국의 한 교회가 아프리카 우간다에 다섯 명의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들의 평균 생존 기간이 2년 이었습니다. 열 명을 보내면 다섯 명이 죽었습니다. 20명을 보내면 7년을 생존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5명의 팀을 파송 하는데 팀 리더가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 2년 안에 우리 중에 누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텐데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슬퍼하지 마십시오. 대신 부탁은 누군가 그 자리에 대신 와 주십시오. 그 팀은 2년 동안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몇 개월 만에 첫 사람이 죽었고 또 죽고, 또 죽고 해서 2년이 되었을 때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위대했습니다. 그들이 보낸 젊은이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 슬퍼하고 아파 있으면 항상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 갔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온누리교회 해외선교위원회 선교위원으로 여러분들의 헌신이 고맙고 감사하지만 이런 복음주의적 선교론이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내가 오늘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선교적 교회론으로 교회를 온전히 변화 시키시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교회로 여러분이 교회를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