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1일 토요일 오전9시부터 한국 기독교의 요람, 정동지역 선교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는
가을 소풍을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 벧엘예배당 내부에서 단체사진
[탐방 코스]
정동교회 탐방 후 이화박물관까지 전체 이동 관람 4개조로 편성 이동
① 조 : 프랑스 대사관, 창덕중학교 ①②③④ 순으로 탐방
② 조 : 첫 새문안교회 터, 예원학교 운동장 - ②③④① 순으로 탐방
③ 조 : 배재 박물관 ③④①②으로 탐방
④ 조 : 중명전 ④③②① 순으로 탐방
조별 탐방 후 정동공원에 집결 후 러시아 대사관 고종의 길 구세군
대한본영과 제일 영문 성공회 서울 대성당
정동제일교회(1885)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
1887년 10월 9일 미국의 북 감리회 소속인 Henry Gerhart Appenzeller(1858~1902) 지금의 자리에 설립했다.
예배만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초에는 한옥집을 개조하여 '벧엘 예배당'으로 불렀다.
교회 근처에는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과 함께 개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교회와 접해 있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출석하면서 1894년에는 200여 명으로 신자가 불어났다.
그래서 1895년 9월 9일에 신축 예배당을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는데
최초의 서양의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예배당을 완공했다.
유관순이 이 교회 신자였으며, 개화운동을 주도한 윤치호는 이 교회의 장로였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한자 대신 한글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를 하였으나 1902년 목포에서 열리던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좌초되어 영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정동제일교회 본당 내부. 벧엘 예배당 위치를 잘못 찾아서 들어간 곳인데 본당이 참 아름답다.
정면에 스테인드 글라스와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꽃 장식은 마침 결혼식이 있어서 장식해 놓았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에서 정동교회에 대한 안내를 듣고 있다.
교회 장로님께서 정동교회 130년사를 자세하게 잘 설명해 주신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당시 6대 담당목사였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가 참여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 사업에 중점을 두었습니다다.
1922년에는 최초로 여름 성경학교를 개설하기도 했고,
1930년에는 남북 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한 조선감리교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활을 담당했습니다.
8.15 해방이후에는 한 때 분열의 위기도 맞기도 했으나,
1948년 재건파와 부흥파의 합동 총회를 개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교단 통합을 신속히 이루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 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1976년 문화공보부는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됐습니다.
1979년 4월 14일 새로 완공된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한국 건축가 협회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7년 제 20대 담임목사로 송기성 목사가 부임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동교회 벧일 예배당 앞 아펜젤러 동상 앞에서 아펜젤러 동상 앞에서 한국기독교 문화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정동제일교회의 현재 모습
오른쪽 벧엘예배당의 창문이 3개로 되어 있고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문을 형상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1887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 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1885년 이래 이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Hospital)'을 개설하여 의료선교를 진행하고 있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施蘭敦; 1856~1922)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병원이었다.
그는 일찍이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는 한국의 풍속 때문에 병이 난 여자를 남자 의사가 치료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여성 해외선교회에다 여의사를 파견하여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줄 것을 청원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1887년 10월 31일에는 그토록 원하던 여의사 메타 하워드(Miss Meta Howard)가 파견되었고,
이내 '시병원'과 이웃하는 자리에 '보구여관'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이자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의 모체가 된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흔히 명성황후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잘 알지 못한다.
보구여관에서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쉽사리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개시하였으나, 여의사 하워드는 도착한 그해에만도 1,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과로에 노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부득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시적인 공백을 다시 메운 것은 흔히 '홀 부인'으로 유명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 1892년 에 WIlliam James Hall과 결혼)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로 손꼽히는
박에스더(Mrs Esther Kim Park, 1877~1910; 본명은 '김점동')도 보구여관 출신이다.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셔우드 의사의 조수 겸 통역으로 활동하다가 마침내 미국유학의 기회를 얻어
정식 의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다시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도 한다.
손탁(Sontag,A. 孫澤, 1854~1925)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과 민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 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 정책을 수립, 반청(反淸)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손탁의 배일운동이 성공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종은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1898년 3월 16일자로 된 「양관하사증서」에서 고종은 노고에 보답하는 뜻 (以表其勞事)을
각별히 표시한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호텔 업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손탁 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서울 방문이 빈번해지자 방 5개로는 협소하게 되었고
이에 고종은 왕실재정으로 이를 확장해 주었다. 1902년 10월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이 준공되었다.
이 시기 손탁 호텔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설계한 증축된 손탁 호텔은 벽면 전체를 아케이드 처리한
전형적인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이다.
손탁 호텔에는 영국수상 처칠도 묶었고 미국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이용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 호텔에 투숙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초청하여 회유하고 협박했다.
배일운동의 중심지가 을사늑약을 체결토록 하는 일제강점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손탁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 보에르에게 이 호텔을 매각했고,
보에르는 1917년에 이를 다시 이화학당에 매각했고, 이화학당은 이를 기숙사로 사용하 다가 철거한 후
1923년에 이 자리에 프라이 홀(Frey Hall)을 신축했다.
이화학당(박물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에 서울에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이다.
서울 중구 정동에 미국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했다.
이화학당 설립자인 스크랜튼은 윌리엄 스크랜튼의 어머니이다.
학교의 이름은 명성황후로부터 받은 것이며, 한국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 이었다.
1904년 중등과가 설립되고, 190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가, 1910년에는 대학과가 차례로 추가 되었다.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은 1908년에 배출 되었고,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은 1914년에 배출되었다.
1918년에 보통과가 이화보통학교로, 고등과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립되었다.
대학과는 중등과가 이름을 버꾼 대학예과와 1925년에 병합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교했다.
1928년 에 마지막 남은 유치원 사범과가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여 각급 학교가 독립적인 학제로 운영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등록문화재 등록 제3호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고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라는 뜻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마침 이화박물관에는 애국지사 김란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별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약소국가의 여성으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에 맨몸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주었던 김란사. 그 분이 꿈꾸었던 희망을 공감하고 꺼진 등에 다시 불을 켜는 시간이 된다.
설명해 주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해서 전해들은 한 토막의 재미있는 일화
남녀7세부동석이라고 하던 시절의 조선 시대에 특히 이 이화학당에는 기혼자는 입학을 할 수 없는 시절에
김란사는 정부 관리인 하상기님과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이화학당 소식을 듣고 가슴에
뜨거운 불씨가 생겼다고 한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한 밤중 처럼 캄캄합니다"
어는 늦은 밤 김란사는 등불을 든 하인을 앞세우고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미 몇 차례 입학을 거절 당한 터에 이번에도 프라이 선생(학당장)이
이번에도 거절을 하자 김란사는 등불을 훅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꺼진 등불과 같이 매우 어둡습니다"라며 간곡히 입학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화는 김란사의 등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1895년에 일본 게이오 기주쿠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1900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7년간 공부하여 한국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영어와 서양의 사고 방식을 배우며 신 여성이 된 김란사는 이화학당으로 돌아와
사감으로서 조선의 여성교육에 앞장서 꿈을 주고 도전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 주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교육자 김란사는 학생들에게 늘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고 말하며
시대적 사명을 강조했다.
이화박물관에 유관순 열사의 얼굴은 우리가 많이 보던 퉁퉁한 얼굴이 아니다.
일본의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서 퉁퉁한 사진이 우리에게 많이 보여지고 익숙했던 것 같다.
문화 해설사님의 설명으로는 이 사진이 실제 얼굴에 근접한 사진이라고 하신다.
제1호, 명예졸업장 성명 : 류관순, 입학년도 : 1916년
류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고등과 재학중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휴교령으로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인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로 내려가 4월 1일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중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다 옥사하였다.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그에게 추서하였다.
이에 이화여고는 창립 110주년을 맞아 그의 애국 정신을 다시 기리면서 명예졸업자격 심의를 거쳐
이 졸업장을 드린다. 1996년 5월 30일 이화여자고등학교장 최종옥
&
소녀 유관순의 기원
"오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서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소서.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도 힘을 주옵소서."
1919년 3월 31일 (음력 2월그믐) 매봉에서 기도하며
"나라위해 내 놓을 목숨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앞장 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전시로 확인해볼 수 있는데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김마리아, 송죽회와 황애덕, 조선여자교육회와 차미리사, 농촌계몽운동과 최용신 등
이화학당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와 선각자들이 활약했던 역사적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였을 텐데...
미국 유학생들 명단이 자료로 남아 있었다.
한국 전쟁시 부산 피난 시절의 이화학교 모습
요즘 21C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급훈 인 것 같다.
조금 전에 본 배재학당의 교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 라고 한다.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다.
이런 가치는 22C가 되더라도 변하지 않고 지켰으면 하는 가치인데....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정말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고 지나는 것이 아닌가하여 안타깝다.
이화학당의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학급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남북 통일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장로님 권사님들로 어깨에 짐이 무거운 줄로 압니다.
책상 가운데 줄 그리고 넘어 오지 않게 싸우지 말고 우리 사이 좋게 잘 지냅시다. 하하하
정동길을 걷다가 보니 캐나다 대사관앞에 커다란 회화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수령 500년 넘는 높이 17m, 지름 5.16m의 거목으로 1976년 보호수(서2-3)로 지정되었고,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축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 하는 등
캐나다 대사관의 노력으로 정동 회화나무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고 여전히 세월을 감당해내고 있습니다.
프랑스 공사관, 창덕여중
1886년 조선은 프랑스와 수교를 하였고, 프랑스는 1896년 플랑시(V. Colinde Plancy) 공사의 주도로 공사관을 지었다. 현 창덕여중 자리이다.
프랑스 공사관은 1910년 경술국치 때 영사관으로 격하되어 현 프랑스 대사관 자리로 옮겨 갔고,
남겨진 건물은 통독부 산하기관으로 사용하다가 1939년 심상소학교를 세우며 헐었다.
각국 공사관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외관을 가졌다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 서소문쪽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뒤편을 끼고 서대문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한양 성벽이 자연스레 언덕을 이루고 있는데다 주변 일대가 제법 너른 지형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공사관의 터전으로 아주 좋은 장소였다.
운동장 한켠에 RF 1896 이라는 정초석 만이 남아있다.
영사관의 규모는 총1,372㎡로, 탑옥(塔屋)과 화강석 대석(臺石), 창대(窓臺), 장식 기둥,
그리고 우아한 아치창으로 꾸며진 2층 벽돌 건물이었다.
한양성곽 둘레길로 아직도 조성 중이다. 년말쯤 가면 좀더 많이 복원이 될 예정이라고 하신다.
이화여자 고등학교 (이화백주년 기념관,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담장.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밝히기 위하여 옛 모습 그대로 학교 담장을 쌓는다는 표지석이 잇었다.
2009년 10월 5일에 다시 복원한 학교 담장길이데 참 운치가 있고 좋아 보였다.
내 눈에는 아래와 위가 다른 시기에 쌓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사실 확인은 잘모르겠고....
덕수궁 돌담길의 아늑한 정취를 따라 걸어 들어오면 만나는 정동극장은
시민들의 이웃과 같은 생활 속의 열린 문화공간이다.
정동극장은 1908년,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던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圓覺社)의
복원 이념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극장으로 2015년 서울 미래 유산으로 등재됐다.
개관일 : 1995년 6월 17일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북 감리교 아펜젤러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1886년 고종(高宗)황제(1852~1902)께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고 한다.
2008년 7월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깊은 배재학당 동관 건물이 다양한 근대 유물둘과 함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교육선교를 위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최초의 2명의 학생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로 시작한 이후에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을 의무적으로 강요하지 않았지만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구한말에는 교육구국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고,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굽히지 않았다.
1층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어 그 당시 교실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고,
상설 전시장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인재를 길러냈 던 배재학당의 교육이념과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의 현판, 유길준의 서유견문 등 배재학당의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과 아펜젤러 선교사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친필 일기를 비롯, 당시 사용하던 성경, 타자기, 피아노 등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늘 헷갈리는 지도이다.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데(서울기준으로)
서울시내의 청계천은 반대 방향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내가 매번 헷갈린다.
&
고종이 하사하신 "배재학당(培材學堂)"현판도 전시되어 있다.
아펜젤러의 의로운 순교
아페젤러 님은 오로지 선교를 위해 이 땅에 왔네.
배재학당을 세워 영재들을 길러내시고
여성들을 중시하시여 이화학당의 문을 여시었네.
성도들의 헌금모아 예배당을 신축하시고
책을 찍어 세상에 펴내시니 새 문화 풍속을 널리 펼치었네.
성서를 번역하다 순교하였으니 그 바다 무정하고 무심하도다.
아들과 딸을 잘 두시어 그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니
이런 일은 사서에서나 찾을 일이로되님께서 하신 일들은 드물고 귀하도다.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
광화문 연가 (이영훈님의 노래비가 있었다.)
이제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고종의 꿈
마침 정동 일대에서 고종의 꿈 탐방, 연극, 체험의 행사가 열린다고 곳곳에 베너들이 붙어 있었다.
서울시에서도 참 좋은 일들을 하시는 것 같다. 기독교역사도 포함하면 더 좋겠는데....
을사늑약 체결의 아픔이 서린 곳 중명전(重明殿)
1899년 경운궁의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으며,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1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러시아인 사바틴에 의해 지금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덕수궁의 대화재로 고종이 1904년부터 편전으로 사용하였고, 이때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 건물에서 체결되었으며, 1907년 이 준, 김란사 등의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우리 근대사에 매우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1915년 일제는 중명전을 덕수궁에서 제외시켜 경성구락부(Seoul Club)로 임대하였다.
1925년 화재로 재건하였고 외국인을 위한 구락부로 계속 사용하였다.
1963년에는 국가에서 소유권을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이전하였고,
얼마안가 민간에 매각되어 많은 훼손을 입었다. 1983년 서울시는 유형 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였다.
2003년에는 정동극장이 매입하였다.
중명전은 우리나라 서울지역의 초창기 근대건축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중요 건축물이며,
궁궐내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서울시에서 관리하여 왔으나 당초 덕수궁 권역의 건물이고, 문화재청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됨(2006.9.01.)에 따라 덕수궁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의 현장 중명전이라고 한다.
나는 무심코 중명전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명(明)자가 이상하다.
날일(日)자변이 아니라 눈목(目)자변이다. 아무 생각없이 볼 때는 안보이던 글자였다.
첫째는 현판을 쓰신분이 화가나서 획을 하나 더 그어 버렸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꼭 지켜 보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밝을명이 아니라 눈밝을명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맞는지 틀린지는 몰라도 참 아픔이 느껴진다.
을사늑약의 진실
왼쪽부터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부대신 권중현, 내무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하야시곤스케,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외무대신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이라고 한다.
내가 직함을 붙여 놓은자 5명이 을사오적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약의 부당성
1.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조약
을사늑약은 다음의 점에서 국가 간의 정식조약으로서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 을사늑약문 원본에는 제목이 없으나 일본이 국제 사회에 공포할 때에는 임의로
"Convention"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호 조약으로 성격을 규정하였다.
- 각국 통수권자가 조약체결 당사자에게 주는 전권위임장이 없었다.
- 대한제국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의 어새와 비준 절차가 없었다.
2. 무력에 의한 강제로 체결된 조약
일본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과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은 애초에 무효인 조약이였다.
이 점에 근거하여 이미 1906년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가 "국제 공법(Droit International Public)"에
기고한 논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주장하였고, 1935년과 1963년에도 국제법상으로
무효인 조약임이 재확인 되었다.
비운의 역사의 현장에서 열강의 제국주의 논리에 사라져 갔던 대한제국의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념 사진을 한장 남겼다.
다시는 지지 맙시다.
정동공원 내에 한국카돌릭 수도원 첫 자리 (정동 수녀원) 표지석이 있다.
정동 일대를 나는 처음으로 방문해 보았는데 곳곳이 문화재로 가득한 역사의 현장이다.
아는 것이 없으니 보이는 것이 없는것 같다.
19세기 말 제물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4명의 수녀님이 가난한 환자와 고아들을 볼 보기 위해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1887년 7월 29일부터 같은 해 9월 7일까지 이곳에 2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지원자 5명을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채 2 개월이 안되는 기간을 머무르다가 명동으로 수녀원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곳 정동 수녀원은 명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수녀원의 역할을 하였으며
2008년 9월에 수녀회 한국 설립 120돌을 맞이하여 이곳에 기념비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로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 문물을 막으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면서도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으나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 맺으면서부터
개항의 길로 나가게 됩니다. 그때쯤부터 가톨릭도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사적 제253호.
지정면적 1,102㎡ 1884년 수교 후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러시아 공사관이 1890년 8월에 초석을 놓았다.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탑은 3층의 벽돌 구조이다.
공사관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타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있는데, 1973 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1981년에 건물과 주변 조경을 재보수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전망 탑은 회색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탑 외부를 단장할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에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있으며, 2층은 벽 면으로 처리하고 전망대 구실을 한 3층은
사방에 한 쌍씩 반원 아치 창문을 설치하고 삼각형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
현재 탑의 북동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 모양의 2 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9월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즉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 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고종이 거처하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 풍의 실내 장식을 했다.
건물은 6.25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고종의 길
1896년 (고종33년)2월 11(양력)
[十一日. 上興王太子移蹕駐御于大貞洞俄國公使館. 王太后, 王太子妃移御于慶運宮](고종실록 34권)
"임금과 왕태자(王太子)는 대정동(大貞洞)의 러시아 공사관(俄國公使館)으로 주필(駐蹕)을 이어하였고,
왕태후(王太后)와 왕태자대비(王太子妃)는 경운궁(慶運宮)에 이어하였다"
이 기록에는 아관파천시 경로는 밝히지 않았다. 이 길이 항간에 떠돌았던 ‘러시아공사관 비밀통로’였을까?
아니면 러시아 공사관 땅속에 덕수궁과 연결된 지하 통로가 있을까?
아직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 길이 아관파천의 길이었는지,
또 비상 통로였는지, 둘 다이었는지 알 수 없다.
구세군 대한본영과 제일 영문
1885년 7월 2일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감리회 에서 분립되어 창설.
구세군 국제본부와 감리회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
- 대한민국 구세군(구세군 대한 본영) 현황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월리엄 부스 대장의
일본 순회선교 중 한국인 유학 생들의 요청에 의해 1908년 로버트 호가트(한국명 허가두) 정령과
그의 부인 이 한국에 파견된 것이 시초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조선)에서도 빈민구제에 집중하였고, 1928년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탈로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이미 타국에서 도입하고 있던 자선냄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선냄비의 시초이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신사참배 반대 때문)으로 1941년 조선구세단(조선구세군 사관학교 폐교)으로 격하당하고 일본구세단(일본구세군도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일본구세단으로 격하됨)으로 편입 되는 등의 과정을 겪으며 세력 약화를 피할 수 없었고, 끝내 신사참배에 가담하는 흑역사가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1950.6.25.) 당시에는 한국구세군 제8대 사령관 로오드 부장이 납북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교세를 회복하게 됨. 현재 구세군은 공식 명칭은 구세군대한본영이다.
대한본영의 선교관할 지역은 대한민국, 북한, 몽골, 캄보디아, 중국 연변자치주 등이다.
구세군의 용어와 계급
구세군은 창립당시 강력한 선교조직의 필요에 따라 준군대식으로 조직을 구성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군대식 특징과 용어 등을 사용하는 특색 있는 교회로 알려졌다.
1. 일반적인 용어 - 영문 (Corps) : 구세군은 교회를 영문이라고 한다.
영문은 군대의 주둔지라는 개념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역사회의 선교, 봉사를 목적으로 한다.
- 병사 : 구세군의 일반 교인을 병사라고 한다.
- 사관 : 구세군의 목회자를 사관이라고 한다.
2. 사관(Officer) 사관은 타 교단의 신학교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구세군사관학교를 나와야 한다.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학조건은 특별한 것은 없으나 기혼자인 경우 부부가 함께 입교하여
교육을 받아야 하는 특색이 있으며, 교육과정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다.
구세군 사관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명령과 조직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며 맡겨진 임무에 따라 일반 목회를 담당하는 목회사관과 구세군의 시설과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사관 등으로 나뉘는데 순환하며 보직을 맡게 된다.
3. 사관의 계급 구세군 사관은 계급이 있다.;
이는 구세군 조직상 일사 분란한 지휘체계를 갖추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군대의 효율과 선교
그리고 사회사업을 위해서다.
- 위관사관
◦ 부위 (Lieutenant) : 사관학교 졸업 후 처음 임관되었을 때의 계급
◦ 정위 (Captain) : 임관 후 5년이 지나면 정위로 진급
- 영관사관
◦ 참령 (Major) : 정위 진급 후 15년이 지나면 참령으로 진급한다.
사관학교 임관 후 만 20년이 지나야만 달 수 있는 영광스런 계급이다.
참령까지가 일 반적인 구세군 사관의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후부터는 특별한 직책을 부여 받을 때만이 진급할 수 있다.
◦ 부정령 (Lt. Colonel) : 참령 진급 후 특별한 직책이 부여 되었을 때 맡게 된다.
◦ 정령 (Colonel) : 부정령 진급 후 맡게 되는 직책으로 대개 한 군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야만
부여되는 영광스런 계급이다.
- 장성사관
◦ 부장 (Commissioner) : 전 세계 구세군의 주요사항들을 결정하는 의결권을 가지며 대장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갖는 등 특별한 권한을 갖게 된다.
◦ 대장 (General) : 구세군의 최고 지휘자 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구세군 최고의 계급이다.
4. 일반 병사의 계급
구세군에서는 일반교인을 병사라고 하며, 성도를 군우라고 호칭하는데 사관과 마찬가지로 일반 병사도 맡겨진 직분에 따라 계급이 있다. 따라서 구세군의 모 든 교인은 하나님의 병사가 되는 영광을 갖는다.
◦ 부교 : 일반교회에 집사에 해당하는 직책
◦ 정교 : 일반교회에 장로에 해당하는 직책
◦ 하사관 : 부교이상에 직책을 담당하는 모든 교인을 통칭해서 하사관이라 칭한다.
5. 구세군의 입대식
믿음을 갖고 어느 정도 영문에 출석하게 되면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데 신앙고 백 후 받게 되는 것이
입대식이다. 입대식은 일반교단의 세례와 비슷하다.
◦ 예비병 : 타교단의 학습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문 출석 후 최소한 6개월이 지나야만 받을 수 있다.
◦ 병사 : 일반교단의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문 출석 예비병 입대를 한 후 6개월이 지나야만 받을 수 있다. *교회= 영문 *목사= 사관 *교인= 군우 *장로= 정교 *집사= 부교 *성 찬식= 입대식 *학습= 예비병입대
*세례= 병사입대
구세군역사박물관은 구세군 한국군국이 1908년부터 이 땅에 펼쳐온 사랑과 봉사
그리고 섬김과 나눔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체험공간입니다.
1928년 구세군사관학교로 건축된 박물관 건물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0호로 선정된 근대건축물 문화재로서 정동의 문화역사 명소일 뿐만 아니라 건축연구와 체험학습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2003년 설립된 구세군역사박물관에는 100년이 넘는 성경과 찬송가를 비롯한 유서 깊은 기독교 문화유산과
구세군 유물, 그리고 구세군의 사회봉사 역사와 이웃사랑의 대명사인 자선냄비 운동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구세군 악기전시관, 영상 미디어관, 자선냄비 체험 Zone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민족의 고난과 함께한 구세군의 독립운동가 전시관도 오픈하였습니다.
Heart to God, Hand to Man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슬로건으로 전 세계 131개국에서
사랑과 봉사를 펼치는 구세군의 깊은 영성과 따뜻한 사랑의 봉사를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구세군역사박물관은 2019년 리모델링을 하였고 미술 갤러리, 공연장, 문화아카데미, 체험교실, 휴식공간을
포함한 정동의 복합문화센터로 새롭게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고종의 길을 걸으면서 1897년 알렌 공사가 스케치한 미국공사관 주변 평면도가 전시되어 있다.
스케치 해 놓은 자료도 100년이 지나면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항공 사진도 없었는데 참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것 같다.
영국 대사관 문양
영국의 경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영국 국왕이 사용하는 국장을 통해 자신들이 자랑할만한
국가적인 브랜드를 관리하고 권장해 왔다
이 사자/유니콘으로 상징되는 잉글랜드의 브리티시 군주제 국가 문양에는
듀 에 몽 드르 (DIEU ET MON DROIT)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어로는 God and my right(하나님/신과 나의 권리)
혹은 my divine right(하나님이 주신 나의 신성한 권리)와 같은 의미다.
물론 이 프랑스어도 거슬러 올라가면 라틴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 있겠지만...
암튼 15세기경 헨리5세 시절부터 잉글랜드 왕실의 표어로 채택된 것이다.
암튼 자체적인 고유 브랜드를 넘어서 영국 왕실이 보장하는 이 문양의 사용을 허가받은 곳은
그 상품의 품질과 명성의 모든 측면에서 가치있고 특별한 취급을 받게 된다.
성공회 대성당
성당의 정식 명칭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서울 대성당은 서울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다.
대한성공회 전신인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 초대 주교로 1890년 제물 포항에 도착한 C. G. 코프
주교가 지금 자리에 있던 낡은 한옥에 십자가를 세우고 장림교회(將臨敎會)로 이름 짓고
정기 미사를 드림으로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울 대성당은 1922년에 착공, 26년에 완공되었으며, 성공회의 토착화(상황화) 선교정책에 따라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적 건축미를 살린 점이 특징이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계 학생들의 만세운동의 중심지였고, 70년대에는 사회정의 실현과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에서는 6.10 국민대회 등으로 국민운동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성당은 1926년 5월 2일 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자금 관계상 설계 도면의 절반 밖에 짓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대성당은 교회 창립 103주년을 맞이하여 1994년에 이르러 교인들의 의지를 모아
교회의 오랜 숙원인 성당 완성을 위한 증축 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6년 5월 증축 부분에 지하 3층의 교육관을 부속 건물로 하는 총1,239평에 이르는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게 되었다.
[양이재(養怡齋)]
양이재는 왕족 자녀들이 교육받는 곳이었습니다.
수녀원 자리에 있던 건물인데 이곳으로 옮겼답니다.
성공회 예배당에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어서 내부에 못 들어가는 대신에 이곳에서 정동 기독교 역사
탐방을 전체적으로 마무리를 했다.
양이재 앞에서 마지막 단체사진.
사진 찍어주신 기독교문화유산 해설사님 감사합니다.
성공회 성당의 건물 내부의 동쪽.
비잔틴의 이콘양식의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위에는 예수님, 그 아래 스테판, 요한, 마리아, 이사야, 성 니콜라스가 그려져 있습니다.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예배 형식은 로만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 형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만카톨릭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성공회 성당의 내부 뒤쪽 (서쪽)
2층에 파이프 오르간이 장식되어 있다. 2층의 뒤쪽 위에서 성가가 울려 나오면 너무 멋있을 것 같다.
헨리8세(1491~1547).
형이 죽는 바람에 형수였던 아라곤(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결혼했습니다.
18살(1509)에 왕이 되었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죠.
35살(1527) 때,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 했지만 교황(클레멘스 7세)이 거부했죠.
대법관 크롬웰은 결혼을 승인(1533)했습니다.
대주교가 된 크롬웰은 로만카톨릭과 단절하고 성공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한 정동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즐겁게 마치신 팀들이 팀별로 마지막 식사 교제를 하신다.
함께 식사 함은 늘 즐거움 입니다.
우리팀도 돌솥밥 전문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이후에 노천 카페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였습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였는데 오후에 Why Mission? 개강 예배가 있어서
먼저 일어 나느라 즐거운 판을 깬것 같아서 죄송했습니다.
1530장로님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다음에 조용히 다시 한번 정동에 돌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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