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약령시장 약령문 (전통기와와 전통 일주문 형태로 되어 있고 단청이 예쁘게 칠해져 있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 효종 9년(1658년)부터 대구읍성 안의 객사(客舍)부근에서 매년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주기적으로 한약재를 거래했던 전통 한약시장으로 국제적인 한약물류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대구 약령시는 오랜 역사와 전통속에서 경제적 측면의 본원적 역할과 더블어 민족 주체성의 구현과
한반도 문화의 전승은 물론 관광 자원의로서의 가치등 소중한 민족 문화의 보고이다.
약령공원, 약초와 약용식물 등의 작은 동산으로 조성 되었으며 지압 보도와 한방 족욕 체험장, 음수대등
건강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나무 의자에 둘러 앉아 족욕하면서 따뜻한 약차 한잔 하고 싶은 곳이다.
약령시 한의학 박물관
약전 골목의 삶과 채취를 직접 느껴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전시 문화 공간이라고 한다.
3층은 약령시의 역사, 문화존과 한의약 전시관, 2층은 한방 체험존과 한방 웰빙존으로 되어 잇다고 한다.
하루 천냥을 버는 명당 자리라고 간판이 안내를 하고 있다. 약전시장 골목
하루 천냥이 나오는 명당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해 현재의 경상 감영공원 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잡고
두아들에게 이터는 하루 천냥 나오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의 뛰어난 안목은 400년 영남의 수도 경상 감영의 터가 되었으며 이후 일제 감점기에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서면서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어 그야말로 하루 천냥을 버는 명당자리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대구 교남 YMCA 회관
대구제일교회 건너편에 있다. 1927년 9월 3일 설립된 일제 강점기 국내최대 항일민족단체인
"신간회" 대구지회가 활동하던 곳이다.
등록문화제 제570호 등록되어 있다.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빛 바랜 태극기가
내부에 걸려 있고 기독농촌운동, 신간회 운동등 기독교 민족 운동의 자료들이 있는 것 같다.
교남YMCA 회관이 이만집 목사 3.1.만세운동 기념지라는 표식이 붙어 있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의 3.1 만세 운동이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신명여고학생 일부와 대구교보학생등
동산성경학교 성서 강습생을 비롯 장날에 모인 장꾼들과 농민등 1천여명에 달한 인파가
쌀가마니를 포갠 단에 올라 이만집 목사가 독립선언서 공약3장을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대구 3.1운동의 시작의 중심지, 기독민족 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다.
에코웰빙 한방 체험관, 대구 교남 YMCA 건물 바로 뒤쪽에 있는 건물이다.
맥주병과 병마개로 예쁘게 하트를 만들어 놓아서 무엇 하는 곳인가 찾아 보았더니
어리이들에게 에너지 교육과 친환경 한방 테마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시민에게 힐링 재생 웰빙 등의 3가지 주제로 체험장이자 휴식 공간으로 활용될
체험관에는에코전시실과 힐링실, 한방차, 한방 체험실, 세미나실 등의 시설을 갖춘다.
건물 옥상에는 각종 약초들로 정원을 꾸며놓았다고 한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시대의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존재했던 부산 동래에서 서울 한양까지 잇는
간선도로이다. 이 중에서 영남대로(嶺南大路)와 영남로(嶺南路), 동래로(東萊路) 등의 명칭으로도 불린다.
현재는 영남대로 옛길 혹은 문경새재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은 추풍령, 조령, 죽령 이렇게 3가지 길이 있는데
"추"자와 "죽"자의 의미가 좋지 않아서 과거를 보러 갈 때에는 조령인 문경세재를 넘어 간다고 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 갔던 선비가 장원급제를 하여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말을 타고
금의환양하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는 이순신(李舜臣, 1545 ~ 1598)장군이 두사충(杜思忠)에게 써준 시입니다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두사충에게 받들어 드립니다
北去同甘苦(북거동감고)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 했고
東來共死生(동래공사생)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城南他夜月(성남타야월)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 아래에서
今日一盃情(금일일배정)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쌈을 권장하여 계산동 일대를 두릉 두 씨 세거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보았다.
그 아낙네는 청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라는 속언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 계산동 일대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뽕나무가 거의 사라졌지만 골목 이름만은
뽕나무 골목으로 남아 그 때의 뽕나무밭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뽕 잎따며 맺어진 사랑에 대한 잔잔한 스토리가 있는 뽕나무골과 두사충의 이야기 입니다.
그때 심은 뽕나무는 아니겠지만 어째든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뽕나무가 여러그루 있다.
근대문화 골목길
이 골목길은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주제로 한 길이다. 1.64㎞의 비교적 짧은 코스이지만 볼거리가 많아
다 돌아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리며, 골목투어를 전국 유명 관광지로 만든 가장 인기 있는 핵심 코스이다.
동산 청라언덕, 선교사주택, 3.1 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제일교회, 민족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의 고택,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 두사충의 뽕나무 골목,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조선의 과거길 영남대로, 에코한방웰빙체험관,
옛 대구의 번화가 종로, 화교소학교, 사투리로 길다를 질다로 표현된 진골목이 이어진다.
李相定(이상정, 1897~1947)장군. 독립운동가 고택.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 전각에도 탁월함.
이상정의 아내 권기옥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알려진 그녀는 평양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부인이다.
이상정 장군은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껴 1923년 만주로 망명,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며, 金九(김구), 金奎植(김규식)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申翼熙(신익희)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그곳에 가서 중국인들의 한국인박해로부터 교민보호에 진력하던 중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일 만에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현재 바보주막으로 영업 중이다.
이 주막은 비운의 노무현 대통령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조합원이 되어 2013년 가을부터 운영하고 있다 합니다.
대구 계산동 근대골목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전통 한옥을 개량한 도시형 한옥으로 안채와 문간채겸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토담을 쌓은 전통한옥과는 달리 붉은 벽돌담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구지역의 부유층들이 살던 거주지역이며 일제 강점기의 주택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대구시는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계산예가는 도심 골목투어의 핵심거점인 이상화, 서상돈 고택 방문객을 위한 편의시설과 /span>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2012년 개관하였으며, 계산동을 포함한 도심일원에 대해 안내하는 영상관,
대형 입체페널에서 텍스트와 영상을 통해 대구 근대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시실,
근대기 이 지역의 활발했던 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정보를 전시물과 E-BOOK등으로 접할 수 있는
한옥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근대 역사문화벨트에서 만나는 대구의 예술가들
문학(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이응창, 이윤수)
미술(김진만, 박기돈, 서동균, 서병오, 김용조, 박명조, 서동진, 서진달, 이인성, 이쾌대)
음악(박태준, 현제명, 권태호, 박태원, 김문보)
개화기에 발간된 잡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학교에서 배웠던 개벽, 백조 이런 잡지들이 대구에서 발행이 되었구나.
개화기에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무엇 보다 학교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키워 준 것에 감사한다.
대한민국에 교육열이 이렇게 높은 것도 다 선교사님들의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더운 날씨에 대구 선교 역사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제5차 선교역사 여행 대구편의 특징은 선교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문화 해설사를 통하여
대구의 근대문화 골목길을 통하여서도 선교 역사에 대한 교훈을 받고 있다.
홍수자 해설사님이 뜨거운 날씨에 너무나 수고를 해 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
계산성당은 우리나라 3대 성당중의 하나이다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성당).
1899년 로베르 신부에 의해 한옥으로 처음 지어졌지 만 1901년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1902년에 프와넬 신부에 의해 다시 설계되어 지금의 건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설계와 100여 년의 긴 전통 때문에 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딕 양식의 우뚝 솟은 쌍탑이 특징인 계산성당은 고풍스러운 내부와 건축물의 아름다움 덕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인사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에서 보면 서울의 명동 성당을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성당 내부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 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순교했던 우리나라 성인을 의미한다.
계산성당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대구 가톨릭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서 100여년을 함께 해 왔다. 성당 내부도 참 아름답다.
대구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 내에있는 카페 이스트힐에서 모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1잔을 마셨다.
날씨가 더운데 버스에서 물을 준비해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얼음까지 다 먹어 버렸다.
대구에서 마셔 본 아이스 아메리카노 매우 좋았습니다.
신명여고 3.1 운동 기념탑
신명여학교는 1902년 5월 선교사 마사 스콧 브루언 여사가 대구에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한 것이 모태가 됐다.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지역 최초의 여학교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SM이라고 하면 알아 주는 학교였다.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된 뒤 1912년 신명여자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구남산고등여학교로 개명됐다.
광복 후 1951년 신명여고와 신명여중으로 환원됐다.
이후 재단 분규와 여고의 남녀공학 전환 등으로 교명은 신명고등학교와 성명여중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명의 딸은 3,1운동의 첫 횃불을 올렸다. 영남의 하늘에, 순정의 기름에 불을 붙여, 적의 총칼 앞에서 높이 치켜든
그 휘황한 횃불. 큰 의로움을 위해서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담대성 그 헌신성.
그 정신을 이어받아 참되게 살기를 다짐하는 소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여기 돌을 세운다.
(개교 65주년 기념 1972년 10월 23일 재학생 일동 세움) 대구 중구 신명고등학교 성명여자중학교에는
1919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이 학교(당시 신명여학교) 교사들과 재학생 졸업생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기념탑을 교내에 세운 학교는 전국에서 신명고등학교가 처음이다.》
신명여고의 교훈이 "하나님을 경외하라"이다. 이 정신이 영원토록 이어지길 기도한다.
신명여학교는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활약을 펼쳤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때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가 교사 임봉선(당시 22세·6회 졸업생)과
이재인(31세), 이선애(22세)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일제의 압제에 있는 우리나라를
자주독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선무요 우리의 살길이니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며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뒤 이날 낮 전교생 5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 밖에 모였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혹시 일경에 쫓기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치마의 어깨 끈도 처음으로 만들어서
치마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 했다고 한다.
주도적 역할을 한 임봉선(1897~1923)은 3.1운동 전해인 1918년 21세의 나이로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임봉선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내려온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1898~?)과
김천교회 전도사 박제원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상황을 듣는다.
또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고 만세운동 참여를 결심한다.
경북 경산 출생인 김무생은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주모자로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가치관이 벌써 다르다. 교회의 5개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예배 (레이투르기아)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 되었다.
교제 (코이노니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교육 (디다스깔리아)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선교 (케리그마) 우리는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봉사 (디아코니아) 우리는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파송을 받았다.
3월 8일 오후 만세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임봉선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이끌었다.
당시 시위대는 만세운동이 시작된 큰 시장에서 동산교, 대구경찰서, 경정통, 남성정,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앞까지 진출했다. 이곳에선 일본군 80연대가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또 기마 경찰이 시위대로 뛰어들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임봉선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체포됐다.
당시 여학생들은 나이가 어린 점이 참작돼 석방됐지만 임봉선 등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임봉선과 이재인은 각각 징역 1년 형, 이선애는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임봉선은 이 과정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1923년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청라언덕에서 바라보는 대구 제일교회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것 같은데 서울의 충현교회와 모양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19년 3월 8일 오후, 대구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사적 현장 중 한 곳이 지금 동산에 있는 3·1만세운동길이다.
이 길은 당시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서 만세운동 참가자들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집결장소로 갈 수 있었다.
90계단 옆에는 1900년대 초의 대구사진과 3.1만세운동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계단 위 계산성당 쪽 방향은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3.1운동 길 굴다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의 독립만세 삼창으로 시작된 대구 3.1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같이 번져 교회와 교회를 통하여 경북 각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4월 말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대구의 3.1독립운동은 다른 도시와 달리 기독교 기관이 주축이 된 거사였으며,
당시 동원된 기독교 기관은 제일교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계성학교, 신명학교, YMCA,
동산성경학교, 대구고보, 농림학교 등이었다.
90 계단 3.1 만세 운동길을 다른팀에서 찍어 주신 사진이다. 이 사진이 없어서 정말 아쉬웠는데.....]
전부 계단으로 만들어 놓으면 연탄 배달을 위해서 리어카가 올라 갈 수 없기 때문에 연탐 배달을
위해 리어카가 올라 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하하하 나도 현장이 있었으면 이렇게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땅이 꺼져라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 외치지 않았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임훈 장로님 작품 사진 찍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라언덕( 靑(푸를청)蘿(담쟁이라))근처 푸른 담쟁이가 보이길래 사진을 한장 찍었습니다.
청라 언덕은(청라 : 靑(푸를청)蘿(담쟁이라)) 20C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 되었으며, 달성토성이 대구의 중심이었을 때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東山)으로도 불리운다.
19세기말, 대구에 정착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시내의 야트막한 언덕 일대를 사들인다.
그리고 이곳에 교회와 병원, 그리고 여러 채의 주택을 짓는다.
붉은 벽돌의 서양식 주택 벽면 위로 푸른 담쟁이(청라)가 감고 올라가는 이국적인 경관이
이때 만들어지는데 이후로 이곳은 담쟁이 라(蘿)자를 쓰는 청라(靑蘿)언덕이라 불린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시 중구 동산동과 대신동 십수채에 이르던 선교사 주택 중에
3채가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오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인 이곳은 챔니스주택, 스윗즈주택, 블레어주택 등 옛 선교사들이 생활하였던 주택과
90계단, 대구 3.1만세운동길, 대구 최초의 서양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 노래비,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묘지인 은혜정원 등이 있다.
또한 청라언덕은 골목투어 2코스의 출발지이며, 드라마 촬영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이곳 청라언덕에는 선교사 묘역인 은혜정원이 있다.
헌신적으로 활동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독신여성으로 18년간 교육선교에 헌신한 선교사 스윗즈(Switzer)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대구여자성경학교를 설립했던 그녀는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은혜정원 묘비에 있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비문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챔니스(Chamness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챔니스주택은 191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계성학교 제2대 교장 레이너(Reiner), 선교사 챔니스,
그리고 제7대 동산병원장을 역임한 마펫(Moffet)선교사가 살았던 주택이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2층집인데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 건축물은 당시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양식과 생활양식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영화 촬영장소로 사용 되는가 하면, 건축분야 논문의 주제로도 인기가 있다.
현재 의료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1800년대부터 1900년대에 이르는 동서양의 많은 의료기기가 소장되어 있다.
스윗즈(Switzer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이 주택은 1910년경 건축되었으며, 스윗즈 선교사가 살았다고 하여 스윗즈 주택이라 불린다.
계성학교 제5대 교장이었던 핸더슨(Henderson)과 계명대학교 초대학장이었던 캠밸(Campbell) 등
선교사들이 거주하였다. 전통 한식과 양식이 잘 조화된 주택으로, 대구읍성 철거 당시 나온 성돌을 기초로
하였으며, 일부 보수 되었으나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에는 선교 100주년 기념종탑과, 백일홍, 소나무, 대나무 등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현재 선교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1층에는 각종 성경책자와 선교 유물이,
2층에는 성막 모형과 성경관련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블레어(Blair)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블레어 선교사가 살았던 주택으로 1910년경 건축되었다.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당시 미국의 주택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 교육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에는 근대교육과 관련된 시대별 교과서, 서당, 초등학교 교실 같은 교육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대구지역의 만세운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각종자료와 사진, 유물이 전시된 역사관으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에는 청라언덕을 배경으로한 박태준 선생의 첫사랑이 담겨있다.
계성학교 시절 박태준(1900~1986)선생은 청라언덕 옆에 있는 신명학교에 다니던 여학생을 흠모하나
짝사랑으로 그치고 만다.
뒷날, 이 이야기를 계기로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을 쓰고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동무생각이다.
당시 노래들이 슬프고 우울한 데 반해,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동무생각은 청소년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 국민 가곡이 된다. 대한민국 가곡 1호가 바로 이 동무생각이라고 한다.
계성고등학교 역사관으로 들어 가면서 여기도 90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계성고 역사관 핸더슨관 / 대구시 유형문화재 47
블레어 선교사가 모금한 성금으로 계성학 교 5대 교장 핸더슨 직접 설계하여 1931년 지어졌다.
학교 본관 건물로 1964년에 3층 을 증축하였다. 중세 서양 성곽모습의 고전 미가 있다.
가운데 2개의 기둥 위에 면류관을 상징적으로 장식해 놓았다고 한다.
계성고 역사관 아담스관 / 대구시 유형문화재 45호
美선교부 아담스가문 2만 4천원 모금, 1908년 지은 영남지역 최초 양옥 건물로서
독립 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대구만 세운동의 발원지가 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계성고등학교 3.1 만세운동 기념탑. 계성고등학교도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나보다.
나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곳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를 피할 길을 주신 은혜의 장소 인 것 같은데 아쉽게도 토요일 오후라
문을 열어 주시는 분들이 없어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정식으로 공문으로 관람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분명히 근무를 하실텐데
열쇠하나 잠시 빌려만 주셔도 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선교사님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학교인데 이젠 그 정신이 점점 퇴색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명감이 아니라 생계수단으로서의 마지 못해 근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 옴은 나만의 생각이길....
계성고 역사관 맥퍼슨관 / 대구시 유형문화재 46호
아담스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 후 교사 건립모금운동을 할 때 맥퍼슨부부가 기증한 4만 원으로
1913년 지었다. 모임 지붕과 한식 기와 등 한국식과 서양식의 절충 건물로서
한국 현대 음악 선구자인 박태준과 현제명이 수학하였다. 현재는 계성교회와 컴퓨터실로 사용되고 있다.
맥퍼슨관 앞쪽 정원에 이 학교 설립자인 안의와(James E. Adams)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까지 같이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안의와 선교사의 흉상만 나오게 찍었다.
대구동산병원 (계명대학교 부설병원)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은 존슨 의료선교사 가 대구 제중원을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온 병원이다.
약전골목에서 시작한 병원은 1899년 10월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동산병원으로 개명하고 이후
계명대학교 부설 병원으로 성장해 왔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은 1999년 10월 1일 개원 100주년 을 맞이하여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사 사택 2동을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으로 설립하였다.
120년 전에 세워진 동산병원 건물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병원으로 대구지하철3호선 공사로 인하여
훼손위기에 있게 되자 구관의 중앙현관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동산병원은 미국인이 지었다 하여 미국병원이라고도 하였는데 1898년 존슨 선교사가
제일교회 구내에 초가로 세운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 제중원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동산동의 초가로 옮기면서 동산병원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 행하신 3대 사역이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하셨는데
선교 역사 현장이 다 그렇지만 계성고 신명여고를 통하여 가르치시며 대구 제일교회를 통하여 전파하시며
동산병원을 통하여 고치시는 사역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 축복이고 은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이 바로 이 3가지 사역에 집중할 때 성령의 바람이 부는 사역이 되지 않을까 싶고.....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별하는 은혜를 주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저도 대구에 7년이나 살았는데 처음으로 방문해 보는 곳들이 있어서 너무나 은혜이고 감동이였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오후 내내 무더운 날씨에 열정적으로 해설해 주신 두분 문화해설사님께 머리숙여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디서 나오는 열정이신지 50은 넘어 보이시는데 열정들이 대단하십니다.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을 마지막으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5번째 대구 선교 역사 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대형 버스가 주차 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도로변에 잠시 주차하고 신속히 탑승을 한다.
버스 탑승전에 마지막 단체사진......
감사기도 : 임훈 장로님
대구선교역사을 잘 마무리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한 최초의 선교사이신 베어드 선교사님,
대구 선교의 아버지라 부르는 아담스 선교사님,
재중원과 동산병원과 나환자를 위한 애락원을 설립하신 존슨 선교사님
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부루언 선교사님들의 역사적 발자취들을 잘 보고 배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발걸음 가운데도 성령님 함게 하시길 바라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대구선교 역사 공부 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을 알지 못하면 자신도 알지 못한다. 또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부분을 바로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많이 배우셨습니까? 은혜는 단체 카톡방으로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착 감사기도 : 김병순 장로님
토요일 버스 전용차로를 이용하기 위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쉬지 않고 양재 까지 달려 왔습니다.
김병순 장로님의 도착 감사기도로 제5차 2000선교 국내 선교역사여행 대구편을 마무리 했습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인데 베트남 쌀 국수 집에서 쌀국수 한그릇 먹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늦게까지 식당 문을 열어 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입니다.
함께하신 2000선교 팀장님들 자랑스럽습니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여행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 기독교 역사 유적지 탐방 (2019.9.21) (0) | 2019.09.21 |
---|---|
대구 선교역사 여행3 은혜의 정원 2019.07.06 (0) | 2019.07.10 |
대구 선교역사 여행1 2019.07.06 (0) | 2019.07.08 |
청계산 산행 (2019.6.1) (0) | 2019.06.03 |
안동여행 (2019.4.20) (0) | 2019.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