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회개(3)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살전1:6-10)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참된 회개] 씨리즈”의 세 번째 시간으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는 오래 동안 목회했던 교회이고,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역했던 교회이고,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았던 교회이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바울의 마음을 기쁘고 마음 든든하게 만든 자랑스런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는 마게도니아의 항구도시로, 번영과 명성을 얻은 도시입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했을까요? 6절에 나오는 후반부의 말씀을 보면,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혼란한 가운데도, ”성령이 주는 기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데살로니가에서 ”영적인 파도타기“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써핑]을 하는 사람들은 태풍이 오는 해변을 찾아가서, ”높은 파도를 즐기려고 찾아간다.”고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과 고난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 사로잡히거나 사람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붙잡혀야 ”성령님께 붙잡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붙잡히고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6절에서 말씀을 받았어요.
”또 여러분은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됐습니다.“(살전1:6)
여기서 [말씀]은 ”견고한 역할“을 합니다.
나의 인생에도 환난가운데도 말씀이 있는 사람은 환난을 겪지 않습니다.
그 뒷받침의 말씀이 마태복음 7장 24-25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세차게 내리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위 위에 기초를 세웠기 때문이다.“(마7:24-25)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신앙의 핵심“을 전수받기 때문에, 신앙이 단단합니다.
▶그들이 전수받은 신앙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말씀과 성령”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이 공부할 때 [국,영,수] 세 과목이 튼튼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기본기]가 있어야 하듯이 훌륭한 크리스천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로 가서 성경을 강론했는데 거기서 너무나 강력하게 바람을 일으켜서
불과 한 달 동안 [복음 사역]을 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신앙의 [롤 모델]이 되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영적인 롤 모델”이 되었을까요?
6절의 말씀에서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또 여러분은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됐습니다.“(살전1:6)에서,
▶여기서 ”우리“와 ”여러분”은 누구를 말합니까?
①주 ②우리(=바울의 일행) ③여러분(= 데살로니가 성도들) ④헬라의 신도 ⑤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
여기에 나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고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 입니다.
여기 도시는 항구 도시이기에, 문물 교류가 잘 되는 항구 도시이므로
소문이 빠르게 전해지고, ”선한 영향력을 방방 곳곳에 미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을 보면,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살전2:13)
이들이 이렇게 놀라운 반전을 이룬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고,
정말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지 3주 동안 머물렀는데, 베뢰아에서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데살로니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서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곳이 많이 있었는데, 왜 [갈릴리]를 선택했을까요?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시골 갈릴리의 어부”를 택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베드로를 선택했을까요?
그 대답은 [베드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백지와 같은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그런 순수한 고백 때문에,
베드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주어진 현실은 받아드리지만 진리를 왜,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을 받아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중요해요.
말씀을 뿌린 [씨앗]은 똑 같은데, 그 말씀을 받아드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 다릅니다.
우리 각자의 심령도 서로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다 보면 어떤 교회는 냉냉 하고 어떤 교회는 아주 목마름이 확실히 느껴져요.
말씀을 뿌리는 [씨앗]은 똑같은데 이런 차이는 “받아드리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데살로니가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9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
“그들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환영을 받았는지 우리에 대해 친히 보고하고
또한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변화된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어떤 신들인가요?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이고, 사람이 지어 낸 [신화]이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변화를 보였어요.
그 당시의 사람들은 성적인 타락과 내적인 분열이 심각했는데,
[관습]이 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아주 깔끔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들의 삶이 달라졌어요.
▶[우상]과 [하나님]은 어떻게 다른가요?
①우상은 금, 은, 돌로 만들어진 죽어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입니다.
②우상은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입니다.
③우상은 거짓된 속임수이지만,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입니다.
④우상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귀신들의 장난이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인 [절대자]이십니다.
⑤우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어요.
⑥우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⑦우상은 “귀신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성령이 역사” 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똑똑하고 정직하다면 우상을 버릴 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정직하다면 하나님을 받아드릴 수 밖에 없어요.
[신앙]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A에서 B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은 은사를 체험했는데도 우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품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폭탄을 끼고 살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인데,
우상을 버리지 않고 ”우상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쓴 책, “두려움 너머의 삶”에서, ▶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까?
①인간은 “영적인 목마름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목마름을 해소해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 가서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②인간의 내면에는 “영적인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영적인 두려움”을 해소해야 합니다.
③인간은 “내적인 갈망이 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내적인 갈망을 해소해서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복 하고 싶은 갈망이 있으니까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내 자식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더 자식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갈망을 얻기 위해 죄를 짓고 탈법을 하더라도 그 갈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앙은 신앙이고 사주보는 것은 과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주역]은 주나라에서 길흉을 점치는 역서인데, 그것이 과학이 아니에요.
또 어떤 사람은 [제사]는 전통이니까 “그대로 따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하면서 점치는 것은 ”그냥 해보는 것이니 괜찮다“고 하는데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왜, 점치는 행위가 [우상숭배] 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 충만해 지기가 어렵고, 간이 걸리고 힘듭니다.
그러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는 일은 간단하고 쉽습니다.
점쟁이는 돈 만 주면 단 번에 ”접신행위“를 즉석에서 해 주니까 그게 더 쉽습니다.
교회에서 [성령충만] 하기는 어렵지만 점을 보려고 가면 감각적으로 접근하기 쉬우니까,
성스러운 결혼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행위“가 됩니다.
점집에서 돈만 내면 ”접신행위를 해 주는 것“은 아주 쉽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우니까,
그렇게 쉬운 것만 찾아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하나님을 찾으세요.
▶왜, 사람들은 점집을 찾아 갈까요?
점집의 예언이 ”맞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보다도 행복의 갈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제사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사에 ”조상의 혼령이 찾아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에게 “혹시나 화가 미칠 까봐” 내려놓지 못해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의 대상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두려워 하니까 우상 숭배를 뿌리치지 못해요.
그러나 과감히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그만두고 [추모예배]로 바꾸세요.
▶제사와 추모예배는 어떻게 다른가요?
[제사]는 혼령을 이 땅으로 불러드리는 것이고,( = 제사는 [하향식]이고)
[추모 예배]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 추모 예배는 [상향식])
[두러움]의 대상이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제사]와 [추모예배]는 추모하는 방법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하향식]이고 또 다른 방법은 [상향식]입니다.
제사상을 차리지 말고 가족 끼리 둘러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는 방법이 [추모 예배]이니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상]를 내려놓고 유일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추모 예배]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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