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온누리교회 (다산신도시)
추수의 때가 오고 있다 (계14:6~2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한계시록]은 “두 가지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①첫째, 최후의 심판을 사람들에게 각성시킴으로, 회계하고,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고,
②둘째,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공격에 대하여, 성도들이 휩쓸리지 않고,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을 보았습니다.
[12장]에서 [사탄], 곧 [용]의 세력이 [어린 양 예수님]을 죽이려고 공격했고,
[13장]에서 두 짐승이 어린 양을 따르는 성도들까지 공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용]은 자신의 권세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경배하도록 우상을 만들어 현혹시키지만,
그러나 ”순교자들은 저항하고 믿음과 인내로서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14장]에 이르러 전투 분위기를 벗어나서, 이제 승리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실행하시는 구체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6절에서 13절까지는 ”최후의 심판이 실행되기 전“에, [천사들의 경고]가 계속 나오고,
14절 이하에서 [추수]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단지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행복해져요. 예수 믿으면 기쁨이 와요.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이 오고, 예수님이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만 전하면,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들은 스스로 평안하고,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것은 [가짜 행복]이고, [가짜 기쁨]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마지막 심판 앞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11절의 말씀인데,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과
그의 이름에 표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밤낮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계14:11)
여기서 ①짐승에게 경배하는 것, ②그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의 인을 받아서, 짐승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영원토록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로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짐승의 세력이 주는 현재의 고통이 두려워 굴복하고 숭배하게 되면,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때 [천사들의 경고]가 잠시 멈추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것은 마치 경고성 나쁜 소식이고, “이제 마지막 심판이 오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큰 도성도 무너지고,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는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이다.“는 나쁜 소식을 전하지만,
그 중간에 하늘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에, 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입니다. 12- 13절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또 나는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렇게 기록해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계14:12~13)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왜, 그런 사람이 [복]일까요? 성령님께서 마치 맞장구를 치듯이, [하나님의 음성]에 성령께서 또 추가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음을 말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계시록에서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1차적으로 [순교자]들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을 때,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순교자들은 더욱더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14절 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을 ”추수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추수]를 두 가지로 표현했는데,
①하나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이고,
②또 하나는/ 포도를 추수하는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추수의 기능]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기 때문인데,
①하나는/ ”곡식을 거두어 드린다.“는 추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죠.
②또 한편으로는 [부정적 측면]으로, 끝까지 완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진노와
심판을 강조하기 위해서, ”포도를 추수하는 이미지“를 이용한 것입니다.
먼저 곡식을 추수하여 거두어 드리는 모습을 보면, 이제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하여,
알곡은 창고에 거두어 드리는 모습이 15- 16절의 말씀입니다.
”그때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으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의 낫을 보내 추수하십시오.
추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무르익었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으신 분이 그분의 낫을 땅에 던지니 땅이 추수됐습니다.“(계14:15~16)
여기에, 구름 위에 앉아,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추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①[씨앗]을 심기 전에 땅을 기경하고, ②씨를 심은 다음에, ③물을 주고,
④잡초를 뽑아 주고 관리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곧 “농부의 인내와 헌신과 수고”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가 [추수]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여,
[알곡]은 거두어 드리고, [가라지]는 불에 태워 버리는 것으로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3장 37- 43절에 보면, [인자]가 좋은 씨를 뿌리고,
그런데 그 좋은 씨를 뿌려진 그 밭에 [사단]도 가라지를 함께 뿌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입니다.
[추수의 때]는 ”세상의 [끝]“이고, [추수하는 일군]은 ”천사“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뽑혀 불태워지고, [알곡]은 거두어 드리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우리가 가서, 가라지를 뽑을 까요?“라고 질문할 때, ”주인이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아버릴 수 있으니, 추수할 때까지 내버려 두면 추수할 때 내가 뽑겠다.“고 대답합니다.
▶왜, 그럴까요? [종]들은 알곡과 가라지를 정확하게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가라지]일지라도 [알곡]처럼 변화될 수 있는 하나님의 그 능력이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참고, 또 인내하시고, 마지막 심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내하고 기다리며 복음을 전하셨지만,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이제는 포도를 추수하듯 심판하신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에는 [포도]를 ”수확하는 목적“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은 포도를 수확하여, [큰 틀]에 넣고, 올라가서 [발]로 짓이겨 밟으면, [즙]이 나오는 것이 [포도주]입니다
이렇게 [발]로 짓이기는 것,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끝까지 회개치 아니한 자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거예요.
그렇게 [포도즙]이 흘러나오는 양이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그것이 [피]라고 했어요.
진노를 당한 이들의 [피]가 그렇게 흥건히 흘러나오니, [참혹한 심판]입니다.
이런 모습은 [계시록]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구약]에 다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구약의 예언서]에 다 있는 이미지를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담당해야 할 일은 [십자가의 틀]에서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셨기에,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추수의 때]가 오고 있으니,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복된 때“가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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