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 자를 섬긴 자의 상급 (마25:31~46) 2025.04.18

다이나마이트2 2025. 4. 18. 08:57

2025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어린양을 바라보라' 마지막날 양재 목회자분들이 특순을 섬겨 주시고 계신다.

우리 경기A공동체 황문규 목사님이 솔로도 하신다. 성악가이신줄 알겠습니다. 너무 잘하셨습니다.

 

2025 40일 특새[40] 작은 자를 섬긴 자의 상급 (25:31~46)  말씀: 이재훈 목사

 

그 동안 우리는 작은 예수, 40일 새벽 기도회에 참여하여, [40] 동안 훈련했습니다.

이제는 습관화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 기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린 양을 바라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영원하신 어린 양, 이 땅에 오신 어린 양, 세상을 섬기신 어린 양, 죽임 당하신 어린 양, 부활하신 어린 양,

그리고 다시 오실 어린 양, 영원하신 그분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셨고 이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다시 오실 어린 양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현재만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바뀌어 집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오실 어린 양]이 영광의 보좌에 앉아,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모든 종류의 구별이 사라질 것입니다.

어떻게 구별이 될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두 종류로 분류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 아닌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염소]로 구별하여 비유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양과 염소]로 분리하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을 치려면, [염소]도 함께 키웁니다.

그래서 겉으로 봐서는 이게 []인지, 염소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양과 염소를 함께 섞어서 키우기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들도 이 세상에 함께 섞여서 생활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마지막 심판 때에 [의인]일지?, 누가 [악인]이 될지?

[사람]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으니,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어린 양, 예수님이 심판자가 되셨을 때는,

정확하게 [][염소]를 분류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으로 확인되면, 오른편으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염소]로 확인되면, 왼편에 놓여지고,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분리하는 기준이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듯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얻어지는 것인데,

 

, “[행위]에 따른 심판이 될 것으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행위]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참되다면,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상은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절에, “내게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또 야고보서 226절에,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어 있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염소]였던 것으로 분류되니,

결국 마지막 심판 때의 행위로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상관없는 행동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믿음에 대한 심판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고 말을 했으니,

결국 ”[믿음]이 불러오는 [행위]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에 대해서 35절에서,”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내가 헐벗을 때 옷을 입혀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의인들에게 평가하셨을 때, 의인들은 놀라워하며 반응했고, 당황했습니다.

우리들이 언제 주님을 먹여드리고, 언제 마시게 해드렸고, 언제 입을 것을 입혀드렸고,

언제 돌봐드렸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이들은 어떤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의도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우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반문하면서, 자신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들이 담겨 있을까요?

세 가지 의미를 발견합니다.

 

첫째로, [그들의 행위]인생에서 기억될 만한 큰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이들의 반응]에서 나타난 의미는 너무 작은 행위여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렇게 자신들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반응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오른편에 앉혀진 이들은 지금 겸손으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자랑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겸손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참된 겸손이 무엇인지?”[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63- 4절에,

너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래서 네 [착한 행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여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갚아주실 것이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비유]는 다른 사람이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행한 일을 기억하지 않는 상태의 [겸손]“을 말씀하시는 거죠.

우리의 일상에서 행한 [작은 선행]도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때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 정반대가 아닙니까?

우리는 [작은 선행]은 평생 기억하고, [엄청난 악행]은 다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잘못 행한 못된 짓은 그냥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참된 겸손]은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남이 모르게 행동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일까요?

[나의 선행]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

어쩌면 내가 베푼 은혜를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사람,

나에게 어떤 보답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

그들이 오늘 말씀하고 있는 바로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주님]께 하듯, “[행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3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해 하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신분제도]에 따라, []들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주인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을 의식하며 일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특별히 사회 리더십으로 있는 분들,

세상에서는 하찮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는 결코 하찮지 않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영혼]을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가치]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작은 자]에게도 주님께 하듯,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믿음의 행위]가 우리에게 나타나길 바랍니다.

 

[의인의 겸손][악인의 교만]이 대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선행을 한 사람은 기억이 없다.“고 당황하고 있는데, 하지 않은 이들은 언제 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을 한 사람]은 겸손하게 기억조차 못하고 있지만, [선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하지도 않은 걸, 선행한 것처럼,

그렇게 기분 나빠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면, ”어떻게 이런 행위 가지고, 영원한 생명과 형벌로 나누는가?“를 의심하지만,

그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상태],

영혼을 결정짓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자기 []를 내 세우고,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죽음으로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 예배해 주신 나라에서,

아버지의 통치를 받아 기쁘고 복된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