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022 새벽기도회 25일차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이재훈 목사
14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4~15, 우리말 성경)
평화의 기도
우리의 마음 속에 늘 간직해야 할 기도입니다.
용서의 기도에 관하여 계속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에 관하여 확대해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본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계해서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용서에 대한 것을 실천하지 못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준 것 같이” 의 아람어에서의 의미를 따른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해 준 것과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해 주소서’ 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가지 용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용서와 십자가의 값 없는 용서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값없는 용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의 용서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회개를 통한 용서를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로서의 능력을 누리기 위한 용서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두번째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후에 이 두가지를 다시 강조하신 것입니다.
결단의 용서와 감정(정서)의 용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서의 용서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서의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의 용서는 가능합니다.
집을 나간 탕자에 대해 아버지는 먼저 결단의 용서를 했을 것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용서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당시의 문화로는 용서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아버지는 먼저 결단의 용서를 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 자녀가 돌아 왔을 때 정서의 용서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결단의 용서 후에 우리는 정서의 용서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화해 해야만 용서한 것이라고 믿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화해까지 나아가는 용서가 아니라 결단의 용서를 말하시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겠다는 것은 탕자가 아직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 친밀함을 누릴 수 있는
정서의 용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정서의 용서까지 나아가지 못했더라도 결단의 용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먼저 우리에게 결단의 용서를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처음부터 정서의 용서를 원하셨다면 우리는 온전한 용서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은 그가 이삭을 제물로 받친 후에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상태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셨으며,
믿음의 싹이 튼 그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가 이삭을 받칠 수 있는 믿음의 단계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서의 여정도 화해에 이를 때 용서한다면 우리는 그 용서의 단계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단의 용서를 통해 날마다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
정서의 용서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십자가 용서의 은혜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삶에 대하여 용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결단의 용서 이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빚진자를 탕감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자를 용서해 주지 않는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결단의 용서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이 비유에 나오는
빚진자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과 동일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용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용서의 축복을 누리는 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드린 죄악의 열매들을 우리는 가해자이기에 잘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만큼의 고통이 용서의 고통입니다.
사랑으로 그 고통을 씻어내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내 죄로 인해 얼마나 아프셨었는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100% 나는 의인이고 다른 이는 100% 죄인, 악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처로 우리는 서로 맞물려있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에게 먼저 용서를 요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더라도 십자가에서 받은 용서의 체험으로 인하여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는 용서를 체험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내가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고나면 그 용서가 나를 용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새로운 서클을 만들어 냅니다.
용서는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십자가의 은혜가 흘러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화해의 용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자를 찾아 용서하기 위해 나아갔던 캄보디아인의 삶의 간증을 우리가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날마다 우리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용서를 통한 선한 사이클의 용서가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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