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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소나타 야마가타 (2021.10.28)

다이나마이트2 2021. 10. 28. 23:30

2021년 10월 28일 저녁7시부터 31번째 러브소나타 야마가타 집회가 "당신도 당신의 가족도"라는 주제로

서울 서빙고 온누리교회와 일본 야마가타 야마긴 현민홀을 라이브로 중계하면서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전도 집회를 열었다.

2007년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14년간 31번째 행사로 그 동안 2,284개 교회가 협력했고, 3,394명의 결신자가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라 체온 체크도 하고, 예배 예약을 확인도 하고, 초대장을 교환하고,

일본어 통역기를 받아서 입장이 가능했다.

러브소나타 마스크, 야광봉, 종이비행기, 야마가다 러브소나타 프로그램 안내서가 좌석에 준비되어 있었다.

러브 소나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라고 일본어와 함께 무대가 아름답게 준비되어 있었다. 

Love Sonata라고 적힌 무대를 바라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일본 현지에서 진행이 되었다면 참석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한국에서 한.일 라이브 중계로 진행하는 첫 번째

러브 소나타 행사이기에 예배 예약을 하고 참석을 했다.

오후7시 정각에 오프닝 공연으로 일본 현지 Yamagata Yamagin Hall에서 ABC-Tokyo 발레단의 공연이 서울 온누리로

중계가 되었다.

두번째는 반대로 서울 온누리에서 일본으로 중계가 되고, 박진아 작가님의 샌드에니매이션 공연이 있었다.

언제 보아도 참 감동인 모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으로 중계되고 있는 일본 야마가타 야마기인 홀의 현장 모습이다. 

송솔나무와 솔나무 앙상블의 "Majesty, Worship His Majest연주가 있었다.

송솔나무의 Flute Solo 연주 "Hometown"이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2만원짜리 피리도 연주 전문가의 손에 있으면 최고급의 연주를 할 수 있는

좋은 악기가 된다는 설명과 누구의 손에 잡힌 인생이냐에 따라서 재질과 상관없이 좋은 인생이 된다는

간증과 함께 참 아름다운 연주 였다.

김영미 소프라노와 송솔나무, 솔나무 앙상블의 협연으로 "시편23편"과 "넬라 판타지아" 두 곡이

연속으로 공연 되었다. 감동의 무대 였다.

다시 일본 야마가타 현지에서 ABC-Tokyo 발레단의 "Messiah" 공연이 있었다.

김영미 권사님의 일본 엔카 노래가 있었다.

한국에 국민가수 '이미자'와 비슷한 일본의 '미소라히바리'의 옛날 노래 "가와노 나가래노 요우니" 노래가 있었다.

참 오랫 만에 들어 보는 일본 노래이다. ㅎㅎㅎ

김영미 권사님 찬양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나님의 은혜" 찬양이 있었다.

피아노 반주는 성우경님이 해 주셨다. 언제 들어도 참 감동이 있는 무대였다.

요한복음 14:1~3절 말씀으로 "영원한 집"이라는 제목의 이재훈 목사님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통역은 동경 온누리교회 담당 목사님이신 후쿠자와 마키토 목사님이 담당해 주셨다.

안녕하십니까?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야마가타에서 여러분들을 직접 뵙지 못하고 영상으로 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일본 러브소나타 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3년 만에 열리게 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준비해 주신 여러분들 또 야마가타에서 함께 이 자리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만 가정에서는 더 가까워진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많은 남편들이 그 동안 직장생활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를 깨달았다라고 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브소나타 야마가타 집회에 주제가 당신도 당신 가족도라는 주제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소중한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차를 타고 여행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열차 안에서 검표원이 기차표를 검사 하고 있는데 아인슈타인이 열차표를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직원이 아인슈타인을 알아보고 박사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이 티켓 없이 열차를 타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박사님을 믿으니 티켓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직원은 아인슈타인 박사를 지나가서 한참 지나가서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아인슈타인 박사는 기차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검표원이 다시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믿습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이 고개를 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누구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갈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 사람이 어떤 곳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갈망 있다는 것은 그 갈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목마름이 있다라는 것은 목마름을 해결해 줄 물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배고픔이 있다 라는 것은 그 배고픔을 해결해 줄 음식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해서 먹으면 지겨워 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멋진 경치와 전망을 가지고 있는 지역에 우울한 사람들이 더 많다 라는 것입니다.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은 무엇일까요? 인간에게는 의미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일을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의미를 발견하면 아무리 위험한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의미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이 의미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영광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달리는 많은 코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빨리 달리는 코뿔소에게 상을 주지 않습니다. 영광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꿀을 만드는 벌들에게 가장 튼튼하게 벌집을 만든 벌에게 상을 주지 않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영광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만큼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잘 하면 상을 줍니다. 그것을 기뻐하는 영광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영광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자연만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자연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적도 있을 수 없고 심지어는 자연을 만든 창조주도 있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입니다. 이성은 자연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성만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산을 깎아 육지로 만들 수 있고, 바다를 육지로 만들 수도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은 자연 밖에 있는 자연적인 요소이며 자연과 초자연을 연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 '이성'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한 '또 다른 이성' 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완전하며 초자연적인 이성으로부터 우리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이렇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이성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 존재를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둘째로, 자연 밖에 있는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양심(良心)’입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됩니다. 바쁜 일을 했을 때 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선한 일을 했을 때 기쁘게 합니다. 양심도 자연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동물의 세계는 양심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다른 동물들을 보호하거나 해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본능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뿐입니다. 야마가타에는 많은 온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마다 온천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온천은 그 곳에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온천은 왜 다른 온천보다 크지 않고 작냐?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옳은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물의 세계는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한 동물이 약한 동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강한 동물에게 너는 어떻게 약한 동물을 보호하지 않고 이렇게 잡아 먹냐? 라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보호하지 않냐?라고 따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양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양심도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자연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히 선하고 의로운 어떤 양심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자연 바깥에 있는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성양심으로 예로 들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으로 동물과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대 많은 사람들은 단세포로부터 점점 더 발전을 해서 많은 세포로 인간이 발전되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인원에서부터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 발전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동물들을 보면 마치 인간이 사는 것처럼 새끼를 낳고 자식을 보호하고 돌보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협력하는 그런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동물들이 수 억년 수 십 억년이 지나면 그 동물들의 마음 속에 이성이 생겨나고 양심이 생겨나고 인간과 동일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동물과 인간은 원래부터 완전히 다른 종류로 창조된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 안에 양심과 이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그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인간의 일부 형상을 그 동물들에게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섭고 힘이 세고 포악한 동물들도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통해서 그 동물들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무서운 동물들을 우리가 동물원에 가두어 놓고 구경하고, 관찰하고, 때로는 실험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과 생물은 오랜 시간 수 십 억년을 거쳐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완전하고 선하신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 안에는 특별히 이성과 양심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고, 영원한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느끼는 깊은 비참한 절망감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인간이 깊은 비참함을 느끼는 그것은 바로 원래 인간은 위대한 존재였다라는 증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많이 다치고 아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서 넘어지면 덜 다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매우 심각하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느끼지 않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가 나는 왜 이렇게 메마른 사막에만 살아야 되는지 한탄하며 눈물 흘리는 낙타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돼지 우리에 살고 있는 돼지가 나는 왜 이렇게 더러운 곳에 살아야 되는지 낙심하며 실망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직 인간 많이 비참함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물은 떨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비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높은 신분에 있던 분이 갑자기 떨어지면 그 절망과 자괴감은 매우 큰 것입니다. 인간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원한 존재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여기에 큰 장애물이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인간의 영원을 회복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나타나는 모습일 뿐이지 그 이면에 있는 더 중요한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든 그 죄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 것, 인간이 죽게 된 것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떠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타락한 영혼은 인간 자신의 이성으로서 양심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노력으로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그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 오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 이르게 한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 해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316)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이시 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이 갈망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도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조금씩 연장할 수는 있지만, 죽음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 죽음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만이 해결해 줄 수가 있습니다. 완전히 의로우시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죽음으로 죽음을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나 자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말한 분을 우리가 단지 선한 선생님이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을 준다라고 하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해야 될까요? 예수님의 자기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만일 예수님이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주장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기꾼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 라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주장을 한 분이 단지 훌륭한 도덕적인 선생이라고, 위대한 지도자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으면서도 없음을 알고도 그렇게 말했다면 사기를 친 것이고, 그것을 모르고 말했다고 하면 정신병자인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사실이라면 인류 최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한 말을 믿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이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고, 역사의 BCAD를 나누는 기준이 된 사람이 이 둘 중에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 한 가지 가능성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사실 진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이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파스칼은 수학자로서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책 팡세에 보면 그는 젊은 시절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만약 믿지 않았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엄청난 낭패를 겪는다. 그런데 내가 만약 사실인 줄 믿었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손해 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이다. 파스칼의 젊은 시절의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진리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을 대신할 죽음이라는 이 말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땅의 씨를 뿌리고 물을 줍니다. 왜 물을 씨앗에 줘야 합니까? 씨앗에 주는 물은 한 생명을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 씨앗을 썩게 하는 것입니다. 씨앗이 썩어서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썩어져 열매를 맺는데 그 씨앗과 열매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씨앗 속에 생명이 있다면서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여 열매로 변화되는 것처럼 인간도 영원한 생명 있다면 죽음을 통과하여 영생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몸 안에 있는 이 생명이 신비롭지 않습니까? 우리 신체를 해부하면 이것이 생명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머리에 있을까요? 가슴에 있을까요? 다리에 있을까요? 손과 발에 있을까요? 우리의 생명은 신비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다라는 것은 살아 있다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지 생명이라고 집어낼 수 있는 것은 실제 우리가 보기 어렵습니다. 생명은 볼 수가 없습니다. 씨앗이 열매로 변화될 때 그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 안에도 영원한 생명이 있을 때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죽음을 통과할 때 영원한 생명에 있다는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증거로 나타납니다. 영원한 생명 있다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변하여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과 멸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는 헛된 것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 방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을 이 세상에 집착함으로써 충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오래 보관하는 것으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신을 불에 태우고 때로는 찾을 수 없게 소멸 될지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이 영원한 부활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읽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오늘 이 집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열려지는 집회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환경이 계속해서 다가 올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이 닥쳐 올 것입니다. 재난이 없더라도 우리 모두는 육체의 한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탁월한 과학자의 지성과 이성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주고 싶었고 여러분의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여러분의 가족과 여러분의 환경과 여러 분의 친척을 생각할 필요 없이 여러분 자신이 그 말씀 앞에서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홀로 온 것처럼 우리는 홀로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시 기도 드리겠습니다. 잠시 여러분의 마음에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드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받아드리고 싶은 말씀이 였다면 저를 따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저를 만드시고 창조하셨음을 받아드립니다. 저는 죄 가운데 있기에 깊은 갈망과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 두렵습니다. 오늘 들은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신줄을 믿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믿습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밤에 함께하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쁨의 세레모니 일본 현지에서 요시하라 마나부 목사님의 인도로 안내와 결신 카드 작성과 앙케이트 조사등이 있었다.

이번 31번째 야마가타 러브 소나타에서는 45명의 결신자와 38명의 긍정 반응자가 있었다고 한다.

"안토니오 코가" 님의 간증과 클래식 기타 연주가 있었다.

'달의 사막"이라는 곡을 연주해 주셨다.

"MY HANDS"라는 곡도 불러 주셨는데 참 감동이였다.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만들어 보내드린 화관의 소개와 화관 씌워주기 세레모니도 있었다.

일본어 찬양 "GOD Bless You"의 작곡자 '이와부치 마코토' 님의 찬양으로 GOD Bless You 찬양이 있었다.

한국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전달한 화관을 초대하신 분이 모셔온 분에게 화관을 씌워드리고,

한국에세는 일본을 향해 일본에서는 한국을 향해 또 서로에게 God bless you 찬양을 드린다. 

마음의 소원을 적은 종이 비행기를 날라고, 준비한 야광봉을 흔들며 주님을 다 함께 찬양한다. 

야광봉을 흔들며 "주 예수 기뻐 찬양해"를 나가야마 유타 목사님의 인도로 힘차게 부른다.

축도 : 타카하시 토조미 목사님의 축도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