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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선교역사 여행, 교산교회, 홍의교회 (2018.9.15)

다이나마이트2 2018. 9. 16. 21:52

존스 선교사와 이승환 모자의 보름 선상세례

이승환은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중 존스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첫째, 고향에 계신 연로하신 어머니 보다 천국 가는 것이 좋은 세례를 먼저 받을 수 없고,

둘째, 술 장사를 하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어 세례 받기를 거절했다.

그 이후에 이승환은 주막을 그만 두고 고향인 강화로 내려와서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전도했고

존스 선교사를 통하여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고자 했다.

당시 제물포에서 노를 저어서 강화도까지 가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기도 했고, 아침에 출발해야

저녁이 되어 도착하는 정도의 거리라고 한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한분의 세례를 위하여

제물포에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도착을 했지만 안동김씨 양반 문중의 김상임의 반대로

강화 입성이 거부 되었다고 한다. 선교사가 강화도에 상륙을 못하자 이승환은 어머님을 엎고

달이 환한 달밤 배에 올라가서 "선상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강화에 겨자씨가 떨어진 순간 이었다고 한다.

서양 오랑케로 인식하고 상륙도 거부했던 양반이지만 이 배려깊은 행동을 통해서 나중에

김상임이 예수를 영접하였다. 초기 강화 기독교의 지도자였던 김상임은 자신의 토지를 교회에 헌납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로 강화 복음화에 헌신하였지만 목사 안수를 한 달 앞두고 열병 환자를 심방 후

자신도 열병에 감염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첫 번째 감리교 신앙공동체(시루미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강화의 첫 교회인 강화 교산교회의 출발이라고 한다.

바로 이 유명한 선상 세례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교산교회 앞에 만들어져 있다.

1893년 강화에 첫 번째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 강화의 어머니 교회 라고도 불리는 교산교회

달 빛이 환하게 비취는 가운데 배 위에서 세례받는 상징적인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교산교회

현재는 예배당이 별도로 건축되어 있고 과거 교회는 현재 기독교 선교 역사관으로 만들어져 있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시작한 인천 내리교회에는 1892년 존스(G. H. Jones, 조원시)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부터 존스 목사는 강화 지역 선교를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강화 지역민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내리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한 방편으로 상조계를 조직하였는데,

외국 선교사들이 뒤를 봐준다는 소문을 들은 상인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계원 중 한 사람이 곗돈을 횡령하고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

계원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의 평판이 나빠졌다.

그러나 당시 50여 명의 계원 가운데 두 사람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강화 서사면(지금의 양사면) 시루미[甑山] 출신 이승환이었다.

1893년 존스 목사는 인천에 있던 전도인 이명숙을 시루미 마을로 보냈고,

이승환의 집에서 교인 4∼5명이 모여 예배를 시작하였다.

한편 서민층이었던 이승환과는 달리 양반 출신이 김상임의 입교는

강화지역 복음 전파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독교를 믿게 된 김상임은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자기 집 앞마당에 열두 칸짜리 예배당을 지어

시루미 이승환의 집에 모였던 교인들을 옮겨오게 했다.

이로써 김상임이 살던 다리목[橋項] 양반들과 이승환이 살던 시루미 서민들 50여 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교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 이름은 교항(橋項)과 증산(甑山)을 합친 것이다.

1893년 말 존스와 스크랜턴 선교사가 교산교회에서 유숙하기도 했고,

내리교회 전도부인 백헬렌도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썼다.

1930년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개칭하였지만,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 상태였다.

1950년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었고, 1961년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1977년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 1979년에 목사관을 신축하였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고,

1982년에는 새마을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으며,

그해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사진으로 보는 강화교산교회100년사』를 발간하고,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를 제막하였다.

2003년에는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을 봉헌하였고, 2009년에는 강화복음전래기념비를 제막하였다.

2013년에는 창립 120주년 기념 강화초대 기독교선교역사관을 봉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산교회 [橋山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화 교산교회 조보환 장로님을 통하여 교산교회의 역사와 지역 현황과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강화 교산교회 조보환 장로님

저는 공직에 오랜 시간 있었습니다. 필리핀에 선교사로 좀 나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CGN TV를 통하여 온누리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정말 말씀이 갈급할 때에

CGN TV를 통하여 말씀을 공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 이였습니다.

그 이후에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CGN TV를 후원 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귀국을 해서는 온누리교회도 한번 방문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경하던 온누리교회의 귀한 장로님들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산교회 기독교선교 역사관

한 개교회에서 이런 선교 역사관을 만들어 두셨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자랑이다.

온누리교회도 이런 선교 역사관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선교역사관 내부에도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노모를 엎고 존슨 선교사가

하루 종일 빌려서 타고온 배에 올라서 세례를 하려고 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그날은 달은 유난히도 밝았을 것 같다. 

시루미 신앙공동체의 가정 예배의 모습, 지금 우리의 구역 예배와 비슷한 모임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1899년 강화교산교회 성탄일 경축이라고 안내 표지판에 적혀있다.

저녁 예배에 태극등 37개를 달고, 6~70명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선조들은 기록을 정말 잘 하셨었나 보다.

교산교회 선교 역사 박물관 안에서 조보환 장로님께서 참 열심히 설명을 해 주신다. 

목사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 보면 너무 과장하시고 뻥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언제나 "우리 교산 교회가 전국에서 으뜸가는 교회 되게 해 주시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 되게 해 주세요"라고 자주 기도 하셨습니다.

교인들은 300명에서 200명 100여명으로 자꾸만 줄어 드는데 목사님의 기도는

전국에서 으뜸되게 세계에서 유명하게 하실 때 습관적으로 하시는 허무맹랑한 기도 아닌가?

과장법이 너무 심하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공직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세가 점점 더 쪼그라 드는데 어떻게 전국에서 으뜸되게라고 기도하시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에 교회 앞으로 큰 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 주차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도로가 나면서 교회 앞에 여러분이 보신 것 처럼 넓은 주차장이 생겼습니다.

2012년에는 예정에 없는 보권선거가 이 지역에 있었습니다.

후보들의 공약사항으로 기독교 역사 박물관에 대한 공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3년에 3억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이 배정되었고 역사 박물관이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만들어 주시고, 주차장을 만들어 주시고, 선교역사관을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일련의 역사들이 일어나자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서 미국에서 카나다에서도 여러분들과 같이 선교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교산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 보니까 목사님의 기도가 허무맹랑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님을 제가 체험하고 있습니다. 

김용기 장로 감사패 (옛날에는 꾕과리에 감사패를 기록했다는 것이 참 특이하게 보였다.)

김인원장로 장로 증서 및 수첩, 김리브가 권사 친필 찬송가 가사 및 신분증

교회 문서들과 흑백 사진이지만 교회 추억의 행사 사진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록 참 신기한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선교사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장 되고 하는데

강화도 선교 역사는 오직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진행하신 것 같다.

선교사님이 강화도에 와서 전도하신 것이 아니다.

제물포에서 술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라는 분이 제물포에서 복음을 듣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 분이 어머니와 함께 야밤에 배에 올라가서 세례를 받았다.

이런 배경으로 양반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동네가 개종을 하고 교회가 생기고

스스로 돈을 모아 교회 건물을 사고, 자연발생적으로 교회가 개척되어 갔다.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를 해방 시켜주고, 기독교식 문화에 다른 장례도 치르고, 항일 운동이나

민족적 신앙으로 자주 독립을 위해 앞장도 서고, 한일자 돌림이나 믿을 신자 돌림으로 이름도 바꾸고

참 이상하고 특이한 한국의 자주적이고 독특한 신앙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강화 지역 출신의 감리교 목사 장로 사모 권사들이 그렇게 많이 배출 되었다고 하신다.

지역교회 섬기는 강화 교산교회

강화의 어머니 교회인 강화 교산교회는 2세기에 걸친 강화 복음 선교의 산 증인으로

"1인 1명 전도 운동"을 통한 영혼구원과 예수 마을 이루기를 힘쓰며, 강화교회의 산파로

아름다운 신앙 유산과을 계승발전 시켜 나가기 위해 "신앙의 대 잇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미래 교육의 산실로 민족일꾼 양성을 위해 장학기금 모금 및 장학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과 노인복지 사업에 대한 비전을 키워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상 남북의 평화 통일,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북한 교회 재건 기금을 적립해 나가고 있다.

김지현 총무장로. 문현규 회장장로, 교산교회 조보환장로, 1530 전총무 김종호 장로(나)

장로님과 기념 사진 한장 남겨 왔다. 감사합니다.

 

김지현 장로가 사진 찍는 모습을 찍었는데 재밌다.

교산교회에서 설명을 마치고 교회를 나오면서........

조보환 장로님 잘 설명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온누리교회에 오시면 장로님들이 식사 대접은 하실 겁니다. 꼭 한번 오세요.

양재에 오시면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교산교회에서 단체 사진

교산교회 선상세례 기념 조형물 앞에서 단체 사진

강화의 안디옥 교회라 불리는 홍의교회(1896)

홍우(鴻羽) 혹은 홍해(洪海)라고 불리던 홍의마을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훈장이었던 박능일(朴能一)이 강화의 첫 번째 교회인 교산교회의 김상임(金商任)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부터였다.

이때가 1896년 경이다. 마을 훈장인 박능일이 개종을 하고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자 홍의마을 토착 유지들이 개종하게 되었고, 1년 만에 교인수는 80여 명에 이르렀다.

홍의마을에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토담집 예배당이 세워졌고, 서당을 학교로 바꾸어 신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초기 홍의교회의 교인들은 7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를 믿는 한 형제로 돌림자를 쓰기로 결정하였고,

이들이 선택한 돌림자는 한 일(一)자였다. 이는 성을 바꿀 수는 없으니 이름의 끝자를 바꾼 것이다.

일자는 처음 믿었다. 혹은 한 가족이다라는 의미로 돌림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 7가지 글자를 선택해 7명 교인들이 이 글자를 하나씩 뽑았다. 그 글자는 능력 능(能), 믿을 신(信), 공경 경(敬), 받들 봉(奉), 순수할 순(純), 하늘 천(天), 빛 광(光) 등이다. 이들은 가운데 글자를 이것으로 하고 끝은 한 일자로 맞추웠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박능일과 같은 권신일, 김경일, 종순일 등이다. 이러한 개명 운동은 강화도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초기 교인 중 일 자로 끝나는 이름을 지닌 인물은 6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바다 건너 교동에는 믿을 신(信) 자를 돌림으로 했다.

홍의교회에는 또 한 가지의 특징이 있었는데, 교인들이 대대로 입어왔던 흰옷에 검은 색 물을 들여 입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실용성을 고려한 행동으로, 당시 주일이나 검은 옷을 입은 교인들이 줄을 지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검정개가 지나간다. 고 놀리거나 심지어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교회에 고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의논 끝에 인천 내리교회 목사와 전도사들이 내려와 장례예배를 인도하였다. 여기서 전통 장례에서 볼 수 있던 상청과 신위를 우상숭배라고 철폐하고,

상복과 두건에도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것이 강화도에서 처음 시도된 기독교식 장례문화였다.

생활 속의 변화를 통해 기독교인임을 나타낸 홍의교회 교인들은 강화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 전도를 하였는데 읍으로 가서 강화중앙교회를 세운 주선일, 교통에 들어간 권신일, 석모도와 주문도로 들어간 윤정일,

강화 중부와 남부 선교사역을 개척한 종순일과 황양일 모두가 일자 돌림 홍의교회 교인들이었다.

1899년 박능일이 인천 제물포학당으로 나가자 김경일이 제2대 담임을 하게 되었고,

1900년 박능일이 귀향하여 강화읍 잠두교회(현 중앙교회)를 개척하였다.

1935년 교회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1953년 교회가 재건되었고, 1982년 새롭게 건축하였다.

현재 홍의교회는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 예배당으로 옛날 토담집 예배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교회 왼쪽 묘지 동산에는 홍의교회 ‘본처전도사’로 평생 교회를 지킨 김경일 전도사의 묘가 있다. 그리고 2008년 역사전시실을 개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의교회 [紅衣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화도 기독교인들의 다섯가지 신앙 특색

첫째, 복음적 신앙

빚 탕감과 노예해방 등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실천함으로써 강화 주민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 노예해방 : 잠두교회 김씨 할머니는 80이 넘은 나이에 예수를 믿기 시작 했고,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성경을 읽다가 크게 감동이 되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여종 복섬이를 양녀로 삼았다.

* 빚 탕감 이야기 : 주인으로부터 빚 탕감을 받는 종에 대한 성경 말씀(마18:23~)에 따라서

홍의교인 종순일은 채무자들 앞에서 차용증서를 모두 불 태워 버렸다.

* 강화 최초 기독교 장례식 : 곡 대신 찬송가, 두건에 십자가를, 묘비 대신에 십자패를 세움

 

둘째 :  자립신앙

선교사의 지원이 아닌 자체적으로 예배처소를 구입하고 운영하며 선교에 앞장 섰음

 * 교산교회 : 교인수가 증가하자 교인들의 헌금으로 다리목 마을에 초가집 15칸을 매입 함.

 *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 주선일씨댁(초가 6칸 반에서) 예배를 드리며 잠두교회를 설립.

 

세째 : 토착적 신앙

고씨부인 장례식에서 나타난 대로 곡하는 대신 찬송가를 부르고, 두건을 대신해서 십자건을 쓰고

비석 대신에 십자패를 세우는 등 복음을 우리 문화에 맞게 적용함.

 

네째 : 일자돌림 신앙

양반과 평민의 계급과 문중의 항열등을 없애버리는 의미로 믿음의 형제들이 같은 돌림자를 사용

한일(一)자 또는 믿을 신(信)자를 넣어 이름을 개명한 후에 의형제를 맺고 강화 복음화에 헌신 함

 

다섯째 : 민족적 신앙

항일운동, 1동 1학교 운동을 비롯한 사회 계몽운동, 마리산 부흥 운동을 통해

민족 자주와 독립을 위해 앞장 섰다.

 

홍의 교회가 교산교회에서 받은 복음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우리의 것으로 토착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와 같은 역활을 담당했다. 

당시 인구 68,000여명에 불과했던 강화도에 홍의교회와 같은 감리교회가 130여 곳이나 세워졌다.

교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홍의교회를 거쳐 강화도 전역과 주변 섬으로 힘차게 뻗어 나갔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무슨 선물을 준비해서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숭실대학교 로고가 붙은 봉투에 담긴 것으로 보아

총무님 개인적으로 준비하신 것이 아닌가 싶은데 참 감사하다.

이태열 장로님과 영성팀도 교회 가까운 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야간에 또 조문을 가야 할 곳이 있어서 2차 모임에는 함께 못하고 식사만 하고 도망 왔습니다.

김지현 총무님 강화도 역사탐방 기획하시고 사전 답사하시고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율 지성팀장님을 대리하신 원종호 장로님과 지성팀의 저녁 식사 모습입니다.

지적으로 생기신 분들만 지성팀이신 것 같습니다. 카톡으로 올라온 사진을 퍼 왔습니다.

 

김지현 총무님의 수고로 강화도 선교역사여행 책자까지 만들어 졌다.

온누리교회 1530장로회 한 맴버가 된 것이 참 자랑스럽다.  이런 귀한 동역자분들이 함께 계셔서.....

아침에 집에서 출발 할 때는 꾀 많은 비가 내렸는데 강화도 방문 내내 참 좋은 날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