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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선교 역사 여행 전주편 (2016.12.03)

다이나마이트2 2016. 12. 24. 23:14

 

2016년 12월 3일(토) 새벽 6시 양재 온누리이천선교 사역팀에서 지난해 광주 순천 여수에 이어서 금년에는 전주 김제 군산의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호남선교역사 여행을 떠난다.

6시 출발 쉽지 않은 결정인데 한분도 늦지않고 원근각처에서 부지런히 참석해 주셨다.

감사한 것은 참 많은 인원이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홍보기획팀 강승구 집사님께서 지난 주에 답사를 전부 다녀오시고 귀한 자료도 미리 준비해 주셔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숙지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수고에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린다.

전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가 지난해 보았던 "블랙마운틴" 영화도 상영해 주셔서 호남지역에 선교오신 분들의 역사들을 되돌아 보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드디어 쉬지 않고 3시간을 달려서 전주에 도착해서 9시에 전주 콩나물 국밥으로 식사를 했다.

삼백집이다.  하루에 삼백 그릇만 파시는 집이라고 해서 삼백집이라고 하신단다.

1947년부터 국밥집을 하셨으니 벌써 70년 가까이 식당을 하시는 유명한 집이라고 하신다.

전주 콩나물 국밥 오리지날을 먹는 기분입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첫번째 목적지 전주대학교에 9시 30분 경에 도착을 했다.

1964년 '기독교 정신의 구현'을 건학이념으로 강흥모 목사가 설립한 대학이라고 한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별이 있습니까?" 슈퍼스타를 키우는 전주대학이라고 학교 홍보를 하셨다.

전주대학교 온누리홀에 도착을 했다. 온누리교회에만 온누리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대학교 내에도 온누리홀이 있는 것이 반가웠다. 호남선교역사 강의가 있었다.

호남선교 역사 강의 김천식 박사

스타센터 갤러리에 들러서 최미정 작가님의 호남선교역사 미술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림속에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에 의하여 시작된 호남선교역사가 한 폭의 그림으로 웅변을 한다.

아직은 누가 누구인지 잘 구별이 안되지만 1892년 조선에 온 미국남장로회 소속 호남선교 7인의 선발대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주에 무덤이 있는 분들이 있다.

 

"헌신 속에 핀 사랑의 꽃' 호남선교역사 미술 작품을 그리고 계시는 최미정 작가님에게 영감을 주셔서 한 폭의 그림을 통하여 호남선교의 역사가 잘 전달 되고 그 의미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최미정 작가님을 위하여 또 작품을 위하여 함께 중보 기도를 드렸다.

전주대학교 내에 있는 호남기독교박물관을 돌아 보았다.

미국 남장로교회등 7개 교단에서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해 주셨다.

7인의 선발대 동상이 작게나마 세워져 있다. 한번의 앵글에 7분이 다 잡히지 않았다.

맨 왼쪽에 전킨선교사님이 있고 현재 사진의 맨 왼쪽은 메리 레이번, 린닌 데이비스, 테이트, 매티 테이트, 레이놀즈, 맨 오른쪽에 얼굴은 없지만 팻시 볼링 선교사 님이시다. 이 7분이 호남선교의 시작을 알리시는 '7인의 선발대'이다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 를 보면 미국 남장로회에서 주로 호남지역과 제주도 지역을 담당했다.

경상도와 평안도는 미국북장로회에서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은 미국 북감리교에서 현재 북한 지역의 강원도 일부 주황색으로 보이는 부분은 미국 남 감리교에서 선교를 했다. 경상남도 지역은 호주 장로 선교회에서, 북한의 함경도 지역은 카나다 장로교에서 선교사를 파송했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 가 시작 되었다고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 놓았다.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미션공의회 예양협정에 따라서 선교지역을 배정했는데 미국 남장로회에서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분할해서 호남지역 선교부와 선교가 시작 되었다.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으로 점차 복음이 확산 되어가고 각 지역에 선교부가 생기게 되었다 설명이 되어 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하신 일들은 바로 예수님이 행하셨던 3대 사역과 거의 동일한 것 같다.

선교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성령님이 나의 가슴에 말씀 하시는 부분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오셔서 무엇보다 교육선교를 통해서 국가관과 민족의식을 가르쳐 주신 부분에 너무 감사하다.

특히나 지금 대통령 탄핵 시국에 나라가 어수선 한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비극 가운데서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사참배도 거부하며 순교자의 길을 걸은 민족이 사랑하는 우리 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다. 애국가에도 나오지만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애국애족의 민족 정신을 가르친 것 눈물나게 감사하다.

선교사님들의 영향력 가운데 1순위는 교육선교였다고 하면 의료선교도 빼 놓을 수 없고 여성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민주화 운동에도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이바지를 했는지 선교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고개가 숙여 지도록 감사하고 눈물난다.

 

척외사상(斥外思想)이 있던 시기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선교사를 환영하는 곳은 없어도 그분들은 은둔의 나라,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세계지도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인생의 황금기를 조선에 바치고 낯선 땅에서 묻히기까지 하신 조선의 선교사님들 그들이 이 땅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 하는데 아직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다.

학문에 눈 뜨게하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전킨(전위렴)선교사를 기념한다는 뜻의 기전여학교는 1900년 매티 테이트에 의해 소녀6명으로 시작했다. 신흥학교는 1900년 9월 레이놀즈 선교사가 본인의 집 사랑방에서 서문외교회 최초의 세례 교인인 김성희의 아들 김창국을 가르치며 시작했다. 이후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 학생들은 1919년 전주 남문 밖 시장부근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신흥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자진 폐교했다. 

아픈자를 치료하다.

1998년 미국에서 온 선교사이자 의사인 잉골드는 전주 성문 밖에 작은 집 한 채를 구입해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1884년)에 이어 국내 두번째이자 호남지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예수 병원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1904년 9월 포사이트 선교사가 내한하여 전주에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복음을 전파하다.

1893년 완산 밑 은송리(지금의 완산동)의 작은 초가집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 호남의 첫 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의 시작이다. 호남 최초의 전주 서문교회는 설립초기에 테이트 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가 교회를 이끌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여 78처의 교회를 세우고, 21인의 장로와 5인의 목사를 세웠다.

호남 기독교 박물관 앞에서 김장렬 장로님과 함께

호남기독교 박물관 앞에서 이천선교 리더십들과

호남기독교 박물관 앞에서 단체사진 한장

 

전주대학교를 벗어나서 선교사 묘지를 둘러 보기 위하여 이동하고 있다.

선교사 묘지 바로 길 건너 편이 호남 최초근대 병원인 예수병원이 있고 바로 그 옆이 예수대학교이다.

 

선교사 묘역 안내판이 아주 조그만하고 초라하게 보인다.

선교사 묘역은 조그마한 야산 꼭데기에 있어서 약간의 등산(?)이 필요한 곳이 있다.

선교사 묘역 안내판이다. 전킨 선교사를 포함하여 17분의 선교사님들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

가운데 묘비가 전킨(전위렴) 선교사님이신데 묘비 앞에 자세히 보면 3개의 돌이 놓여있다.

3명의 자식들도 바로 이곳에 뭍혀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7인의 선발대 가운데 한 분으로 은둔의 나라 조선에 오셔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이 땅에  

묻혀계신 현실을 바라볼 때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옵소서"  "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명을 다하지 못 할까 하는 것과 지나치게 내 자신의 일과 세상의 도움에 의존할까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셨던 선교사님들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데 관리는 너무나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울의 양화진이나 하다못해 광주의 양림동산의 선교사 묘지와 비교해서 너무 초라하다. 선교사 묘지 바로 앞에 큰 길을 낸다고 공사를 하고 있다. 세상에는 반듯하고 넓은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굽은 길도 있고 약간 좁은 길이 있으면 어떠냐?

역사적인 현장이 너무나 쉽게 훼손 되고 있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호남 최초의 교회 서문교회 

1993년이 전주서문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었다고 기념비가 서 있다.

전주 서문교회는 구 한말 1893년 6월 미국 남장로교 이눌서(레이놀즈)선교사 일행과 정해원씨등이 은고을 전주부중 외곽 지대인 완산지역의 은송리 (현 완산동)의 초가 1동에서 전주교회란 이름으로 호남지방 최초의 교회로 세워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인전 목사 기념비

서문교회의 목사님이시면서 3.1 운동등 항일 운동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활약하시고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시고 일본의 지명 수배를 피해 상해로 옮기셔서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하시고 조국 광복에 앞장서신 참 훌륭하신 목사님이신 것 같다.

이 시대에는 왜 이런 민족의 선각자와 같은 목사님, "조국이여 안심하라" 외칠 수 있고 기도 할 수 있는 능력과 성령이 충만한 장로님들이 안 나타나는 걸까?

 

1892년 7인의 선발대가 조선에 들어와 1893년 전주 은송리 서문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후 전위렴 목사가 1908년 1월 2일 43세로 별세를 하지 그 미망인 마리 리번 여사가 미국 남장로회에서 남편의 선교 기념으로 미국에서 종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슴아프게 1942년 일제침략 말기에 전쟁무기 제조를 위하여 이 종이 일본에 빼앗기고 1945년 해방 이후에 그 모양의 종을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종 하나에도 민족의 한이 있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본다.  

호남최초의 교회 서문교회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

다음에 또 방문하게 되면 서문교회 박물관도 꼭 돌아 보고 싶다.

이제 점심시간이다. 전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전주비빔밥 집이다.

 

가족회관이 전주음식 명인의 집이라고 한다.

전주 비빕밥 무형문화재인 장인이 운영하는 집이라고 광고하시고 계셨다.

전주 비빕밥 참 맛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먹는라 진짜 식사로 나온 음식 사진은 없습니다.

점심 식사 이후에는 김제로 이동하여 금산교회를 둘러 보고 군산으로 이동하여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와 전킨(전위렴)선교사님이 설립하신 군산 구암교회등을 돌아 볼 예정입니다.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