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수) 저녁 7시 서빙고 온누리교회 본당에서 2024 차세대교사 부흥집회 '교사,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 집회가 있었다.
117년 만에 11월 폭설이라고 한다. 첫눈이 이렇게 많이 온 것은 생전 처음본다. 우리동네는 40Cm가 넘게 왔다.
회사에서 퇴근하시고 오시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따끈한 오뎅을 준비해 주셨다.
눈 내리는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정말 따~~악 이였다. 나도 한 꼬치 얻어 먹었다.
선생님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다음 세대 응원단-
예배당 안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배너가 걸려 있었다.
시작 기도 : 노희태 목사님(차세대 본부장)
하나님, 우리를 처음 부르셨을 때에, 다음 세대 친구들을 위해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아이들을 부르셨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그 첫 사랑, 우리에게 주셨던 그 첫 열정, 또 우리를 부르실 때 말씀하셨던 주님의 그 부르심,
하나님, 이 저녁에 우리가 기도하며 나갈 때에, 이 저녁에 예배하며 나갈 때에,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어 주셨던 그 마음을 우리 가운데 온전히 들어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에 역사하사 이 밤이 은혜의 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밤 될 수 있기를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함게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찬양 : 임동현 전도사님과 파워스테이션
역시 온누리교회 차세대 출신이셔서 그런지 이재훈 목사님 그 어려운 율동을 다 따라하신다. 속으로 많이 놀랐다.
대표기도 : 서병화 장로님 (차세대 총무장로)
환영인사 및 성경봉독 : 김종호 목사 [눅2:41-52, 우리말성경]
41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그들은 관례에 따라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43 기간이 끝나 그 부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44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45 그러나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46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전 뜰에서 예수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47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마다 그가 깨닫고 대답하는 것에 몹시 감탄했습니다.
48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
49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51 그러고 나서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52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설교 : 제목 '어디에서 예수를 찾는가? (눅2:41~52)
차세대 교사 여러분! 이 자리에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자리로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눈이 많이 왔지만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더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떠오르는 말씀이 있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두가 다 평등해지는 말씀, 어떤 색깔도 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또 때로는 쓰레기도 예뻐 보이고, 어떤 허물도 다 눈으로 깨끗해져 버리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 우리를 정결하다고 불러주시는 은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은혜, 그 은혜를 이렇게 흰 눈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저녁 우리 차세대 교사 여러분들과 함께 찬양하니까 정말 제가 27년전 차세대 교역자일 때보다 찬양이 얼마나 업그레이드 됐는지? 그때는 찬양하면서 원, 투, 쓰리 이런 것도 업었고, 오~오~오 하면서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동그라미 그리는 이런 방법도 없었고, (하하하) 따라가느라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하하) 제가 목감기가 약간 있어서 목을 너무 무리하면 안되는데, 오늘 하루 종일 목소리를 아꼈는데 찬양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약간 너무 오버했습니다. (하하하). 중간에 이 목소리가 고갈되면 임동현 전도사님의 책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살 때 소년 청소년이죠.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을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는 나이를 13살부터 그렇게 시작하기 때문에 12살인면 꼭 유월절 절기 때, 예루살렘에 가서 금식하면서 절기를 지키면서 이제 비로소 성인이 되려면 그러한 과정도 꼭 지켜야 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청소년의 기록은 오늘 본문 외에는 사실 기록된 내용이 없습니다. 어린 유아 시절에 동방박사의 경배를 하고 또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을 때에 태어난 직후 혹은 약 만 1년 정도 됐을 때의 기록, 그러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그 순간에 딱 한 본문, 청소년 시기를 엿 볼 수 있는 본문은 바로 누가복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청소년 사역에, 차세대 사역의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낼 수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들이 많이 담겨 있죠.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워 가고, 그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랄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교육의 목표는 전인적 성장이 하나님과의 관계, 또 나 자신과의 관계, 또 이웃과의 관계, 여러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사랑스러워하는 존중받는 그러한 인격체로 성장해 갔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어느 한순간에 세상의 모든 것을 통달하고 태어나시지 않았다는 걸 봅니다. 예수님도 성장하셨다는 거죠.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을 때, 하늘에 능력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심으로써 행하신 것이지, 본능적으로 그냥 원하시기만 하면 뭐든지 하실 수 있는 그런 전지전능한 능력을 감추시고, 내려놓으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심으로써 성장하셨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고 또 우리의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장의 모델이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 우리의 학생들이 우리의 차세대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성장해 가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일어난 일, 율법 학자와 대화하시고, 토론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았을 때부터 율법의 완전한 힘을 가지고 그렇게 계셨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12살 때 되실 때까지도 끊임없는 배우는 자로서 자라나셨고, 이제 12살 때 율법 학자들과 더 배우기 위해서 또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 위해서 또 자신이 깨달은 점을 나누면서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그 가운데 일어난 사건 44절에 보면 이제 유월절을 마치고 되돌아가는 그 여정 속에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리 속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이제 그제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라는 겁니다. 어쩌면 이렇게 무관심한 부모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루가 지나도록 예수님이 12살 때 아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둘이 데이트를 즐겼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이렇게 다 올라오죠. 올라올 때는 가족 단위로 올라왔겠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다 모이면 이제 부족 혹은 그 가문 단위로 친척들을 많이 만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제 각기 고향으로 흩어지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까지는 같이 길을 갈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 대그룹이 함께 이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이 그 일행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뒤집어보면 한 번도 예수님은 이탈 학생이 아니었다는 거죠. 당연히 어딘가에 항상 있는 학교 가는 시간에는 학교에 있고, 교회 가는 시간에 교회에 있고, 가끔 저희 학생들은 교회 갈 시간인데 안 오는 학생도 있고, 심지어는 학교 갈 시간인데 안 가는 학생도 있습니다. 저도 사실 초등학교 때 그래도 교회를 떠본 적은 없지만 가끔 교회로 가다가 다른 데로 가기도 했어요. (하하하) 예수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시다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제 대그룹인 친척들이 함께 이동을 하게 됩니다. 어딘가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그만큼 신뢰를 주었던 예수님이였습니다.
52절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한테 사랑스러운 순종하는 그러한 자녀로 12세까지 성장했기 때문에 그만큼 신뢰했던 그러한 청소년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예수님이 있을 것이라고 소년 예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서도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님이 예수님 믿기에 당연히 예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 교회에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 마음속에 당연히 계시리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때로 어떤 직분, 직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당연히 계실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교사로 봉사하기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하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주로 모시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가는 여정에 정말 예수님이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많은 교사 공동체에 함께 좋은 분위기 속에서, 또 어떤 사회의 활동 속에 함께하고 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예수님이 어디 계시지?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일은 혹시 없는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故하용조 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그런 예화를 드신 적이 있어요. 큰 길을 갈 때는 자기 차에 전조등이 켜져 있는지? 안 켜져 있는지? 잘 모르고 가다가 외딴길, 어두운 길로 들어가 보면 내 차의 전조등이 꺼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혹은 고장 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여러 차들이 함께 달릴 때는 가로등도 있고, 여러 차들의 불길 속에 섞여 있을 때는 내 차의 전조등이 고장난 줄을 잘 모르고 갑니다. 그러나 나 홀로 걸어가야 할 때, 그리고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는 내 차에 전등이 꺼져 있거나 혹은 고장 났다는 걸 그때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시점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을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리를 함께 마련하는 것은 예수님을 정말 주님으로 모시지 않았어? 나의 삶에 예수님이 과연 계실까? 그리고 그분의 인도 가운데 있는가? 또 교사로서 섬기는 이 섬김 속에 우리의 학생들에게 차세대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사역과 가르침과 섬김 속에 예수님이 전해지고 있는가? 당연히 전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내가 차세대 교사로서 섬길 때, 그 저 차세대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만나겠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은 그 모든 일들을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차세대 자녀들의 완악함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우주로 왕으로 모든 것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는 그런 인간의 완악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차세대에게 우리가 전해야 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들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이심을 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교회 영종온누리교회를 기증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평생 모은 재산으로 그런 꿈을 가지고 젊을 때부터 하신 거예요. 전 세계를 돌아다녀 봐도 예수님을 전하는 공원이 없더라는 거죠. 노아의 방주도 만들고, 성경박물관도 있고, 많은 것들이 있는데 천로역정도 있고 다 있잖아요. 그런데 정작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공원이 없더라.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는 공원을 좀 만들고 싶다’라고 찾아 오셨어요.그 래서 참 이렇게 성도님이 평생 모은 재산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는데 ‘힘듭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였습니다. 근데 마음은 이거 너무 힘듭니다. 이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헌신하면서 하시겠다는 그 마음 정말 단순하지만 정말 놀라운 관점 아닙니까? 왜 사람들에게 방주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요. 다 중요해요. 그런데 ‘왜 정작 예수님을 전하는 공원은 만들지 않으냐?’ 그분은 참 놀라운 중심과 초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저는 몰랐습니다. 부모로서 당연히 놀란 일이죠. 또 화가 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요셉과 마리아가 걱정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쩌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신의 자녀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한 말씀을 보십시오. 49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아니 대답해 보세요. 마리아가 그렇게 놀라서 그냥 막 눈물 콧물 쏟으면서 울고 있는데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아니 이런 정말 한 대 맞아야 될 말 이지요. 왜 나를 찾았느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정말 정이 뚝 떨어지는 말 아니에요. 4일이나 정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예수 어디 있어? 그러고 찾아왔는데 아니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정말 이 상황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인간적으로 기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 죄송해요’. ‘제가 유월절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깜빡했어요. 벌써 3일이 지났어요’.이렇게 말 했으면... 얘가 너무 몰두했나 보지! 그랬구나 이해가 되었을 텐데....“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정이 뚝 떨어지는 말입니다. 가끔 우리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다 보면 정이 뚝 떨어질 때가 있죠. 또 우리 차세대 학생들 열심히 해주는데 정말 반응이 이상할 때 정이 뚝뚝 떨어질 때가 있죠. 바로 그러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근데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죠. ’정이 뚝 떨어지는 말이라‘ 그런데 바로 그런 의도입니다. 정을 떼려는, 인간적인 정을 떼려 요셉과 마리아가 12년 동안 예수님을 키울 때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정말 오늘 이 시대에 12살이면 조금 말 안 듣는 때잖아요. 그런데 51절 52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정말 순종하는 아이었어요.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이 얼마나 깊이 깊이 들어 있을까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12세가 되어 이제 시간이 빨리 흐르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세계는 금방 이제 요셉과 마리아는 육신의 부모로서의 예수님과의 관계로서의 정을 떼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사명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공생애를 사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요셉과 마리아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분명 마리아는 알았죠.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요셉과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왜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께서 12세에 이르기까지 그 비범함, 그 거룩함, 그 경건함, 순종과 사랑스러움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인간적인 관계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을 떼시면서 더 이상 나와 이런 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두 분의 자녀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 이렇게 질문한 겁니다. 지금 찾고 있는 예수가 꼭 당신의 자녀로서의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디에서 예수를 찾고 있습니까?. 마땅히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엄청난 메시지를 전해주는 거죠. 이렇게 예수님께서 소녀이셨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 인간적인 육신과 육신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정확하게 깨닫도록 정을 떼시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의를 이루도록 예수님께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왜 육신의 자녀로서의 나를 찾고 있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요. 이 ’내 아버지의 집에‘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원문에 가까운 직역은 사실 ’내 아버지의 안에‘ 영어로 In my Father’s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집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소유격으로 표시됐을 뿐이에요. 그래서 영어 버전은 어떤 데는 그냥 Bussiness로 In my Father’s Bussiness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이렇게 ‘아버지의 집’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아버지의 소유 안에 내가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십니까? 나는 아버지께 속한 존재로 세상에 이 두 분이 내가 이 세상의 통로가 되었지만, 저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년 예수가 육신의 부모에게 전해준 첫 번째 메시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나타난 사건입니다. 12세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십자가로 나아가야 하기에 육신의 부모의 인간적인 정도 뛰어넘는 그러한 발걸음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30세 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하죠. 저는 12세 때부터 시작 한 것으로 봅니다. 12세 때부터 이것은 공적인 메시지이자 첫 번째 공적인 메시지죠. 이것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친다고 하는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차세대들은 아버지의 속한 존재들이에요.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고 우리의 소유물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물도 아닌 아버지께 속한 존재 그러므로 우리의 교육의 목표는 그들이 아버지께 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때로 우리의 어떤 육신적인 관계는 섭섭해질 수도 있고, 때로 우리가 그들로부터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 이 한 가지를 위해서 우리 차세대의 교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우리 차세대들을 섬기면서 굉장히 섭섭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섬겼는데 어쩜 저렇게 모를 수가 있어! 교사의 마음에 섭섭함이 생길 수 있어요. 이러면 교사인 내가 중요하게 됩니다. 학생과 나와의 관계 중요하죠. 선생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을 느끼는 건 중요하죠. 그런데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지금은 당장은 듣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너희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진리의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때 혹 우리가 우리의 사역 속에 예수님을 당연히 계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씨앗 속에 때로 우리 교사 공동체가 너무 좋아서 예수님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래서 예수님이 보인 만큼만 가까워야 됩니다. 때로 어떤 교회에 가보면 너무 가까워서 예수님이 계실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회의할 때 예수님이 좀 밖에 앉아 계세요. 우리끼리 할 말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멀어서 예수님이 안 보일 수도 있어요. 그분의 몸된 교회, 그분의 지체된 그들이 하나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정말 우리 차세대 다음 세대들을 응원하는 저희들의 관계와 섬김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당연히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반드시 있게 하시는 그런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교사들,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너희들이 있어야 될 것은 아버지께 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이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너희들의 인생을 헌신하자 그 메시지를 향하여 우리가 그들을 계속 응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많은 차세대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님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계실 것이라 당연히 생각하고 예수님을 무시하며 나아가는 길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전해지는 우리 차세대 사역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다음에 대해서 아버지의 것임을 고백하며 아버지께만 온전히 속하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헌신하는 우리 다음 세대의 응원단을 우리 차세대 교사들을 축복하시고 이들의 삶과 가정과 일터와 건강을 견고케 하여 주시옵시오. 우리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나타나시고 인지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차세대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또 그들의 모습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격려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양 : 오직주의 사랑에 매여
중보기도 : 노희태 목사님 인도
축도 : 노희태 목사님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제, 교통하심과 함께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라가고, 다시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과 우리 친구들과 우리 모든 부서와 우리 다음 세대 친구들과 이 땅에 예배의 부흥을 이루게 될 우리 다음 세대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셀레브레이션
로비에서 간식 : 호두과자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온누리교회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권사 안수집사 임직예배 2부 (2024.11.30) (0) | 2024.11.30 |
---|---|
2024년 권사 안수집사 임직예배 1부 (2024.11.30) (0) | 2024.11.30 |
춘천 왕터리조트 차세대 리트릿 (2024.11.16) (0) | 2024.11.16 |
1027 악법저지를 위한 연합예배 (2024.10.27) (0) | 2024.10.27 |
두란노국제선교회 32주년 감사예배 (2024.10.17) (0) | 2024.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