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일)부터 28일(토) 까지 인천 송도컨벤션 센타에서 열린 제4차 서울 인천 로잔대회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행사장에 다녀왔다.
26일 목요일 밤 행사는 한국교회의 밤으로 한국교회의 12돌에 대한 감동적인 영상과 공연이 진행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전세계에 한류 열풍이 불고있는 이 시점에 대한민국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이 대형 무대에 배경 사진으로 걸려 있는 것 만으로도 큰 감동이였는데,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은 출연자들, 감동적인 뮤지컬, 드라마, 국제 행사에 걸맞은 영어로 진행하는 등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 유감없이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린 감동적인 무대였다.
지난 140여년 동안 하나님이 이 땅에 행하신 한국 선교의 역사적인 자료만을 모아서 전세계 200여 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감동적인 드라마를 선사하고 있었다.
*원작 테마: 길갈의 열두돌
*의미: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과거 신앙의 행적을 가르치고 교훈하기 위한 물건
*열두개의 물건_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있는 물건. 그 자체로써 신앙적인 상징을 내포하는 물건들로 설정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 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개 씩 가져다가 어깨에 매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여호수아 4:5~6)
장종현 목사(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모든 대회 참석자에 환영인사를 하셨다.
<최형근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다>
1막. 부흥
첫번째 돌 : 밧줄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로 가득찼습니다.
단상 앞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길선주 목사가 서 있습니다.
길목사는 밧줄로 자신의 몸을 꽁꽁 묶고,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렇게 죄에 묶여 있습니다!”
그는 밧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고 신음하며 안간힘을 씁니다.
밧줄이 끊어지고,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신과 반목했던 맥큔 선교사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습니다.
“내가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립니다.
길목사는 단상에 올라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중들은 그 말씀 앞에 울부짖으며 자신의 숨은 죄들을 고백합니다.
밤새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교회는, 날이 밝자 해방된 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찹니다.
이것이, 지금은 북한의 수도가 된 평양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의 풍경이었습니다.
1907년, 당시 현장에 있던 선교사 무어(J.Z.Moore)는 보고서에 이와 같이 기록했죠.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이번 부흥 운동으로 한국인들이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한 ‘그리스도인 체험’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부활의 옛 복음이 이제 완전한 구원으로 생생하게 체험되고 있으며, 게으르고 무익했던 무리가 엄청난 능력을 지닌 복음 전도자들로 변화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에, 복음을 받은 자들이 뜨겁게 반응 한 이 영적 사건은 온 나라로 번져갔고, 이후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사에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들 만큼 빠른 시간에 양적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이 특별한 부흥은 한국 교회사 140년의 파도를 넘으며, 역사의 위기 속에서도 불씨를 일으키고, 마침내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를 견인하게 하는 모판이 되어줍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낭독해 주시고 계신다>
지금 우리는, 한국교회의 열두 돌을 찾아 떠나는 항해의 갑판 위에 올랐습니다.
이 시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교회들은, 전지구적인 문제들과 다음 세대의 전도 위기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당신들이 가져다 놓은 그 열두 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과거로의 항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해 행하신 총체적 복음 사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평양 대부흥이라는 모판이 심겨지도록 밭을 기경한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복음의 파장 : 태동기 (1880~1909)
한국교회의 첫걸음은 척박한 황무지에서 시작되었다.
유교를 기반으로 한 왕권국가였던 조선은 서양 세력을 배척하며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나 쇄국은 조선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서양 제국이 아닌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정치가 부패하고 국방이 무너지고 민생이 파탄나면서, 조선의 민초들은 배고프고 상처입고 병들어 갔다.
그러나 이처럼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 조선에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창세기 1장 3절이 시작된다.
두번째 돌 : 예수셩교전서
조선 땅에 빛이 있으라’하신 그 빛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예수셩교젼서>로써,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입니다.
1911년이 되면 한국교회는 온전한 신구약 한글 성경을 갖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훨씬 오래 전, 조선에 정식으로 선교활동이 허락되기도 전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 선교사는 만주를 오가던 상인, 서상륜 등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조선에서 천시 받던 이들 상인들이 조선 민초들에게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들의 헌신으로 1885년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복음서를 읽고 있는 조선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국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인데요.
한글성경 번역을 도왔던 서상륜이 사비를 털어 황해도 자신의 집에 교회를 세운 것이죠.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입니다.
<이규현 목사님이 낭독해 주시고 계신다>
1885년 부활절,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입국하면서 조선 정부 의 승인하에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시작된다. 선교사들은 예배당과 학교를 세웠고, 지역마다 병원을 개원했다. 조선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과 근대문명을 만났다.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자립, 자치, 자전의 3자 원리를 적용하고 교파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수의 한국인 목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한다.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의 협력에 의해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자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의 올바른 선교의 방향과 노력은 부흥이 태동하도록 돕는 산파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독특한 신앙문화를 만들어 갔다. 새벽기도회와 전도하는 날을 구별하여 드리는 날연보, 그리고 열정적인 사경회가 그것 이었다. 평양대부흥의 불씨는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다. 조선인들은 기존의 질서가 붕괴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만났다. ‘복음’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며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게 되었고, 이 갈망은 조선사회의 지배원리였던 신분제 철폐를 비롯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낳았다.
평양 대부흥의 또 다른 의의는, 한국교회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였다.
1907년 장로교는 최초로 안수를 받은 7인의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을 한국의 최남단 제주도로 파송한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는 말과 문화가 다르고, 미신이 강해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타문화권 지역이었다. 한국교회의 첫 선교는 이처럼 우리 안의 타자를 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정숙 교수님이 3번째 돌 막사발을 설명해 주시고 계신다>
세번째 돌 : 막사발
이것은 조선 막사발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의 설교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질그릇의 나라입니다. 임금이나 양반은 청자나 백자로 된 사기그릇을 쓰지만 백성들은 흙으로 빚은 막사발을 주로 씁니다. 천한 개밥그릇에도 쓰고 묵사발, 국사발로도 쓰지요. 저는 특히 묵사발을 좋아합니다.”
아펜젤러는 조선 사람들을 고린도후서 4장 7절의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조선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부서진 삶에 복음을 담아 세상에 전했습니다. 이후로 한국 교회사에 피어오른 복음의 총체성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라나는 생태계처럼 자연스러운 복음의 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생기가 번져가던 한반도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나라를 잃고 35년 만에 국권을 회복하지만 곧 나라가 둘로 분단되는 비극을 겪는데요, 그 혹독함의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란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진짜와 가짜가 드러나고, 복음의 빛깔은 더욱 선명해지죠
복음의 파장 : 시련기 (1910~1950)
1910년, 불법적인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식민지배 초기에 선교사들은 교육선교를 통한 계몽과 인재양성에 힘썼다.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던 이화학당 등을 비롯해 전국에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고 근대문물을 배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품은 학생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 기독학교들을 통해 민족주의자들이 양성되었고, 이 중 다수는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리더십이 되었다.
네번째 돌 : 태극기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5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했죠, 이 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체포된 시민들 중에서도 기독교인 비율이 20퍼센트에 전국의 마을과 장터에 독립선언서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교회 네트워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은 16세의 이화학당 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손수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연행되고, 옥에 갇혀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결국 옥사합니다. 일본은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한국교회는 큰 피해를 입습니다. 이렇듯 일제 강점기에 복음의 파장은 기독교인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16세의 유관순이,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깊은 신앙의 결단으로 항거하다 죽음으로써, ‘사회적 책임’이라는 좁은 길로 나아갔던 것이죠. 한편, 망국이라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복음의 확장은 계속됩니다.
<주승종 목사님이 낭독해 주셨다>
3.1운동이 끝난 후, 큰 좌절을 맛본 한국교회와 민중들에게 독립은 요원하고 현실은 비참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부흥을 사모하는 열망은 식지 않고 이어져 1920년대 장로교의 길선주와 김익두, 1930년대 감리교의 이용도로 이어진 전국적인 부흥 사경회 운동이 일어난다. 신유의 기적을 비롯해 성령 체험을 강조한 이들의 강렬한 성령운동이 한때 이단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이들은 민족의 시련을 견뎌낼 유일한 소망은 복음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며 부흥의 불씨를 이어갔다.이렇듯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한다. 복음의 영향으로, 조선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무지를 돌아봄과 동시에 새롭게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계몽운동들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우리 물건을 우리가 생산하자는 ‘물산장려운동’, YMCA, YWCA의 기독교 청년운동, 그리고 질병 퇴치운동등으로 발화된다. 이 시기, 또 다른 놀라운 사건은, 한국교회가 나라를 잃은 시련 가운데서도 해외 선교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장로교 총회를 창립하면서 선교사 파송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그 후, 1917년에 파송된 아버지 방효원 선교사에 이어 중국 산동 지방을 개척한 방지일 선교사에 의해 한국교회는 큰 선교의 열매를 맺는다. 방지일은 20년간 일본 경찰의 수사와 연행을 당하면서도 1957년, 중국의 마지막 개신교 선교사로서 공산당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수많은 중국인들을 개종시켰다. 이처럼 어둠속에서도 복음의 파장은 한국 교회를 일어서게 했다. 그러나 이제 역사의 시련이 가져다준 임계점에 도달한 것일까?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7년간, 길고 암울한 한국교회의 밤이 시작된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전쟁을 위해 한국의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다. 끝까지 저항한 선교사들이 학교의 자진 폐쇄를 결정 한 데 이어, 2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명이 투옥된다. ‘신사참배냐, 예배의 중단이냐’의 갈림길에서 한국교회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1938년, 수년간 버티던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진다. 각 교단의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헌금을 바쳐 전투기를 헌납하며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한다. 전쟁을 지지하는 시국 강연에 나서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찬송가를 삭제하며 나아가 모든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한다. 곧이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위기에 봉착한 선교 사들마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된다
다섯번째 돌 : 감사헌금 봉투
한국교회 예배당 안에 배교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집니다. 그러나 믿음을 택한 소수의 교회들은 천로역정의 중요한 문턱을 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눈에 고요한 눈물이 흐르고 찬양은 뜨거우며, 단상에 선 목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국 교회의 어둠을 밝힌 두 명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인 주기철 목사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표적인 지도자 입니다. 한국 장로교 총회는 이를 문제 삼아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합니다. 일사각오를 외치며 하나님만 예배할 것을 당부했던 주기철 목사는 수감 중 행해진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하다 1944년 부활절을 보낸 뒤 옥중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목회자가 해방 후 감옥에서 풀려나 한센병 환자들의 공동체인 여수 애양원으로 향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고름을 직접 짜내며 그들을 가족 처럼 돌봐주던 손양원 목사입니다. 1940년대 후반, 한반도 전역에 이념 갈등이 심화되면서, 아직 십대였던 그의 두 아들이 좌익에 의하여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 납니다. 손목사는 아들들의 장례예배를 집전하며 감사 헌금을 봉헌합니다. 이 헌금 봉투의 겉면 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 그 후, 그는 자기 아들들을 죽인 좌익 청년이 처형을 당할 위기에서 놓이자 그를 건져내 양자로 삼습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 곁을 지키다 북한군에 의해 총살당하여, 결국 사랑하는 두 아들의 곁에 묻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장 급진적인 복음을 살아낸 손양원 목사의 삶은, 복음 통일의 부르심을 감당해야 할 한국 교회에게 영적 도전을 주는, 살아 숨쉬는 푯대가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시련을 견뎌낸 한국교회가 상처투성이로 해방을 맞이하지만 그 기쁨은 찰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르다 풀려난 저항파 목회자들과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회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져, 한국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교단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로 한국교회는 계속되는 분열로 치닫게 된다. 갈라진 것은 교회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김일성의 사회 주의 정권과 미군정이 각각 38선을 경계로 수립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자리에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30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을 당하고 만다. 이처럼 교회가 분열하고 나라가 분단되는 아픔 속에서 복음은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 었을까?
여섯번째 돌 : 태반항아리
전쟁은 한국교회에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후 1955년까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말씀을 대적하는 시대 가운데에서도 진리로 무장된 증인들을 세워 복음을 더욱 복음되게 하시죠. 이 시기, 국내의 섬을 돌며 복음 전도의 기적을 일으킨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깨진 항아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것입니다. 그녀는 성결교의 순회전도사로 자원하여 남도의 122개의 섬을 다니며 전도합니다. 그러다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피란을 거부하고 성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이 항아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기도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섬을 돌며 산파 역할을 겸했던 그녀의 유품이죠. 이 깨어진 태반 항아리는, 그녀가 산고의 고통으로 잉태한 수많은 영혼을 떠오르게 합니다
<한기채 목사님께서 낭독해 주셨다>
그녀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신안군 전체로 퍼져나가 1,004개의 섬 일대에 약100여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이 곳은 오늘날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복음 전도는 전쟁 가운데서 이루어낸 놀라운 선교적 성취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복음을 살아낸 증인들로 인해 부활의 소망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이들의 죽음으로, 한반도의 어둠 너머엔 새벽의 동이 트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파장 : 재건기 (1951~1959)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았습니다. 생기를 잃은 시선들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쓰러진 나무를 세워 땅에 꽂습니다. 그리고는 부서진 석재와 합판들로 벽을 두릅니다.
그 위에 비와 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치고 십자가를 겁니다. 비바람이 치고, 전쟁고아와 미망인들, 오갈 데 없는 피난민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은 배급받은 밀가루와 각우유를 나누며 오병이어를 재현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자 사방이 붉은 십자가로 빼곡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거처는 점차 큰 무리의 교회로 변모됩니다.
일곱번째 돌 : 천막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삶의 터전은 잿더미 속에 사라졌습니다.
공산주의의 핍박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온 월남민들의 사정은 더욱 비참했죠. 하지만 그들은 가는 곳마다 천막교회를 세웠고 십자가 아래 모였습니다. ‘월남 피란민’ 공동체는 남한 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 중심에 한경직 목사가 있었죠. 전쟁 직후 기근까지 덮쳐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자, 그를 비롯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원받은 구호물자를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1951년과 1952년에, 미국의 부흥사인 밥 피얼스 목사와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각각 방한하여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전쟁 피해자들을 돕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세계최대의 민간국제기구인 월드비전과 컴패션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또한 천막촌이 형성되면서 평양의대 교수였던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을 열어 가난한 이들을 무상 치료하며 오늘날 건강보험의 근간을 놓습니다.
이처럼 전후 재건기의 한국교회는 무너진 세상 속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거의 모든 영역에서 펼치며 성장해나갔죠.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6년, 한국교회는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함으로써 또다시 세계 선교의 뜨거운 열정을 이어갑니다
<강대흥 선교사님이 낭독해 주셨다>
2막. 선교지에서 선교국으로
재건기 이후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은 민주화에 대한 전국민적인 열망이 끓어 오르며 정치적으로 혼란과 변화에 직면한다. 교회는 산업화로 인해 도시로 모인 노동자 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 인권운동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는 등 사회, 정치적 운동을 펼친다. 또한 한편에서는 군선교 를 통해 청년들의 복음화를 이루고, 학원선교 역시 급속히 성장해나간다.
1964년 한국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여 이화여자대학의 초대 총장인 김활란은 교계지도자 75명을 초청하여 복음화운동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한다. 그의 제안을 교회 지도자들이 공감하고 지지하여 개신교 17개 교단이 함께 참여하기로 결의한다. 이는 분열되었던 한국교회의 연합과 더불어 제2의 부흥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었다.
여덟번째 돌 : 구호들
이것은 1965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교회가 주도한 민족 복음화 운동의 구호들입니다. 민족 복음화 운동은 1965년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아래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는 대중 전도대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갱신과 일치, 개인의 거듭남을 통한 사회변화, 민족 전도운동을 목표로 삼았죠. 이 운동은 전 교단이 초교파로 연합함으로써 분열된 한국교회의 상처를 꿰매고 다시 한 몸이 되게 했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베를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래함을 만난 조종남 박사와 한경직 목사는 민족복음화운동을 대중전도집회와 접목시킬 아이디어를 얻고, 그를 초청합니 다. 1973년 5월,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는 전국 6개 도시를 순회하고,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전국의 집회에 총 440만 명, 서울 여의도 대회에는 110만 명의 군중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고, 결신자만 1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빌리 그래함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북한 동포를 위해 함께 기도했는데요. 그 자리에서 북한은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형제가 되었습니다
<유관재 목사님께서 낭독해 주셨다>
민족복음화 운동은 이후로 CCC 김준곤 목사가 주도했던 74년 ‘엑스플로 전도대회’와 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 그리고 84년의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선교대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주도했던 88년 ‘88세계복음화 대성 회’등의 대중전도 집회로 이어진다. 이와같은 열정은 평양 대부흥 이후 한국교회의 DNA 속에 흐르는 부흥을 향한 열망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화가 이루어져 교회성장과 선교운동이 가속화된다. 1960년에 5,011개 에 불과했던 교회 숫자가 1990년에 이르러 35,819개까지 늘 어나는데, 이는 30년간 7배 이상 증가한 엄청난 성장이었다.
더불어 1960년에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는 95년에는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게 된다. 또다른 성장의 측면으로, 1980년대 전후로 이루어진 대도시 중 심의 도시개발과 함께 대형교회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1991년에 이르러 한국은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 로 역사적인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복음을 기반으로 구제와 양육을 실천하는 월드비전과 컴패션등 국제 NGO들의 수혜국에서 한국은 수많은 기독교인 후원자들이 봉사하는 후원국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급속한 성장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아홉번째 돌 : 깃발들
이 깃발들은 지난 40년간 한국교회의 선교의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70년대의 대중전도집회들을 통해, 한국교회는 다시 한국 너머를 보게 됩니다. 당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74년 로잔 대회로 인한 변화를 느끼고 있었는데요.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그룹은 80년대의 기독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직면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 복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74년 발표된 로잔 언약에 이어 로잔의 문서들은 그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기독청년들은 복음이 단지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가난한 이웃을 품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두가지 운동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대학 캠퍼스 전도 운동과 그 회심자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일으킨 다양한 활동들, 다른 하나는 열방을 향한 선교동원 운동입니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 청년선교단체들이 활발히 일어나는데, 바로 이 깃발들의 주인들이죠. 이 깃발을 든 수많은 청년들은 한국 교회 초기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뜨거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먼 타국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 시기의 대학생 선교단체 출신들 중, 주목할 만한 운동을 이끈 한국의 ’복음주의 리더들‘이 있다.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목사등은 교회 성장을 넘어서 교회 갱신에 대한 시대적 필요의 응답으로 제자훈련과 선교 헌신 운동등을 주도하고, 년들을 일터선교와 세계선교에 헌신하도록 이끌었다. 깃발을 든 청년들의 행진은 계속 이어져, 미국에서 학생자원자운동(SVM)이 일어난 1888년의 100년 후인 1988년에, 선교한국 청년대학생선교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난다. 매 2년마다 열리는 선교집회는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청년대학생들에게 선교를 도전했다. 그 결과 80년에 100명이던 선교사 숫자가 89년에 1,000명이 되고, 2002년에 10,000명을 돌파하더니, 2013년에 20,000명을 넘어서며, 한국은 선교사 파송 순위로 세계 2위를 기록한다. 한국선교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말 기준으로 세계 174국에서 2 만1,917명의 한국인 장기 선교사와 451명의 단기 선교사가 사역 중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두 번째 부흥을 이끄신 하나님의 시선은 선명하게 세계의 ’땅끝‘을 향하고 있었다. 너도나도 복음의 일꾼이 되겠다고 서원했고, 교회들은 기쁨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헌신과 기도로 이제 한국은 선교사를 받던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변모해 글로벌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참혹했던 역사의 시련기에도 부흥의 불씨를 이어가며 복음전도의 씨앗을 뿌린 한 국교회에 주신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의 선물이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해외 선교지로 파송된 후, 하나님의 핵심 선교 전략인 교회만큼 탁월 하고 지속적으로 효력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는 신념아래, 교회 개척 사역에 주력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한국 장기 선교사의 45.5%가 현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사역들을 병행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교육선교는 특별하다. 한국 선교사들은 근대화와 경제 발전,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선교의 수혜를 입은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섬길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2014년 기준, 한국 선교사들은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직업훈련원을 포함한 총 810개의 학교를 선교지에 세웠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세워진 기독대학들만 17개에 달한다. 이렇듯 세계 선교가 확장될수록 미전도 종족에 대한 분명한 인지가 생겨나면서 1990년 대 초,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애통함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가장 가깝고도 먼 우리의 땅끝인 북한과 그곳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함이었다.
열번째 돌 : 쪽복음
90년대 중반, 북한에 가뭄이 들며 수십만이 굶어죽는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합니다.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뉴스로 전해지자 한국교회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본격적인 북한 선교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대북 식량 지원금의 90%를 감당하면서, 3만명이 넘는 북한 이탈주민들을 기꺼이 환대합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대안학교가 세워지고, 교회마다 북한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다양한 탈북민 사역이 시작됩니다. 바야흐로 북한선교의 시간이 온 것이죠. 하지만 여전히 북한은 가장 가깝고도 먼 땅끝입니다. 탈북민들의 증언으로 북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몰래 들여온 성경을 입수하여 ‘지하교회’로 모이며, 발각될 경우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는다는 정황이 밝혀졌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는 지하교회 교인들의 숫자가 무려 5만에서 7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 땅에 남겨놓은 그루터기들인 지하교인들은 지금도 생명을 걸고 부흥의 땅, 평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박성민 목사님이 낭독해 주셨다>
3막. 길 위의 한국교회
2019년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언론 추산 1만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2024년 현재 30%에 이르는 교인들이 교회 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또한 극심한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심각한 분열과 한반도의 평화위기 또한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편, AI를 비롯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에 직면해 있으며, 기후 재난과 생태 위기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할 사명을 부여받은 한국교회와 글로벌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당면한 이 모든 문제들을 견인해나가기에 제동이 걸린 상황이 다. 1995년 성장의 정점 이후, 한국교회는 대체 어떤 조류들을 만난 것일까?
한국교회는 제2의 부흥기를 지나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를 맞이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95년 이후 10년 동안 14만4천명의 성도가 감소했고, 기독교인의 비율도 15%로 떨어졌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교회가 끼친 선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신뢰도가 급속히 하락했다는 점이다. 리서치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25%에 불과하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핵심 단어는 ‘배타적’ ‘물질적’ ‘위선적’ ‘이기적’ 이었다. 그 원인으로는 한국교회의 경쟁적인 개교회 주의와 양적 성장에만 치중했던 점,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리더십의 타락, 그리고 소통을 가로막는 교회 시스템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기독교인 개개인이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지 못한 위선적 이미지도 원인 으로 꼽힌다. 30여 년간 한국교회의 선교는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침체하면서 선교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 파송 선교사가 줄어들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선교사 리더 십의 문제와 지나친 성과주의, 그리고 교계와 선교계의 과다경쟁 문제등이 불거지며 반 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써의 전략 면에서도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점차 소외되어가는 지역교회 활성화와 늘어나는 이주민들을 품는 사역, 청년과 다음세대를 위한 미디어 사역등 현재와 미래에 걸쳐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사역들을 위 한 세심한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열한번째 돌 : 로잔 로고
74년 로잔대회가 열린 10년 뒤인 1984년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라는 표어 아래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80년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민족을 바른 길 로 인도하지 못한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로잔운동의 로고인데요, 로잔운동은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워 사회선교에 대한 열망이 들끓 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사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어떤 이들은 사회를 선교지 삼아 묵묵히 헌신했죠. 그리고 올해는 로잔운동의 희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은 로잔대회를 잉태하 게 했습니다. 로잔은, 복음 전도와 사회선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 50년 동안, 로잔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주었죠. 이제 다시 한국교회는 회개를 선포하며, 로잔의 정신과 동행하여 선교의 해법을 찾고, 세상으로부터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장석 목사님이 낭독해 주셨다>
앞서 우리는 한국 교회사 140년에 걸쳐 드러난 복음의 파장을 보았다. 이 140년의 네러티브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사에 일어났던 총체적 사역들은 먼저 뜨겁게 복음을 수용한 참제자들에 의해이뤄졌다. 개교회 차원이 아닌 ’민족 복음화 운동‘으로 연결된 부흥운동은 지도자들의 책임의식과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세대가 바뀌어도 이런 사명감이 계승된 것은 한국교회 가운데 성령의 감동이 지속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빈곤 상태였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다 양한 선교 사업을 펼치는 선진국이 되어 복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선교는 2024년 현재, 풀어가기 쉽지 않은 문제들 앞에 서있다. 그 문제들 앞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온전한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깊이 숙고하며 참 제자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성숙의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제자도 성숙의 과제는 고도 성장을 경험한 교회일수록 더욱 절실해지는데, 이는 글로벌 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예수님의 삶과 존재와 행동과 말이 우리의 총체적 사명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열두번째 돌 : 왐본어 성경
한국 선교사들이 번역한 부족언어 성경들은 구한말 조선의 흑암에 비추인 ‘예수성경젼서’처럼, 이들 부족들의 땅에 창세기 1장 3절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에 자신을 던져,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의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청춘을 불살랐던 파란 눈의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한국 선교는 그 기억으로 닻을 삼아 항해중이고 앞으로도 그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입 니다. 한국교회의 부르심, 그것은 이 땅의 역사가 말해주듯, 세계 선교와 복음 통일에 있습니다. 아직 발자국을 남긴 적 없는 수많은 땅이, 검은 머리의 한국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7년, 그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던 장소는 지금 평양 최대 규모의 김일성 부자 동상이 서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부르심을 향한 항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의 열두 돌을 찾아 떠난 여행의 종착지에 와있습니다. 단 하나의 관문을 남겨둔 채 말이죠.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의 언어로 번역하신 성경들이 소개 되었다.
<처음에 나오셨던 유기성 목사님이 다시 나오셔서 마지막을 장식해 주셨다>
코리텐 바움은 ‘기억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열쇠’라고 했습니다. 열두 돌을 찾아 떠난 과거로의 여정은 추억을 회상함이 아니라 미래를 다시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열쇠를 찾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를 찾기 위해, 지금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요?
한국의 열두돌 너무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뮤지컬도 좋았고, 역사적인 자료들도 감동이였고, 한복 입은 출연자들도 감동이였다. 한국 문화를 유감없이 전세계에 공유하는 감동적이며 가슴 떨리는 순간순간들이였다.
2024년 4차 로잔 대회의 표어이다.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
역사적인 제4차 로잔대회 기간중에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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