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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경순왕릉 방문 (2024.05.30)

다이나마이트2 2024. 6. 2. 19:58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288번지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능. 왕릉.

국도37호선을 타고 다니면서 경순왕릉이라고 안내 간판은 여러번 보았는데

실재 방문은 처음으로 해 보았다.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1,777㎡. 무덤봉분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과 함께 그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주변에는 1986년에 건립된 재실과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다. 즉, 다른 신라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지만 경순왕릉만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2]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래서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4]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기에,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거나,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5]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 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6],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전술한 것처럼 우연이 아니다. https://namu.wiki/w/%EA%B2%BD%EC%88%9C%EC%99%95%EB%A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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